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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가 자녀보다 예쁜 이유

인간은 아이를 낳고 오래 동안 양육하고 교육을 시키면서 문명을 낳았다. 여기에 인간의 수명 증가도 문명탄생에 기폭제가 되었다. ‘나이든’ 성인이 자녀와 손주들을 오래 돌보면서 지식과 경험이 전수되었다. 양육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자녀와 손주세대로 전승되었다. 수명이 길어져 중년과 노년이 늘어나고 한 사람의 일생동안 축적된 지식이 언어를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되었다. 이를 통해 예술, 과학 등의 발전을 가져오고 문명이 탄생하게 되었다. 인류학자들은 이를 ‘할머니’ 가설이라고 부른다. 물론 집단을 이루고 인간보다 오래 사는 동물들도 있어 수명만으로 인간문명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인간의 지능이 높아졌고 동시에 수명이 늘어났던 것이 문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많은 생명이 번식능력이 없어지면 죽는다. 그러나 인간은 폐경을 한 뒤에도 수십 년을 더 산다. 여성은 약 200만 개의 난모세포를 가지고 태어난다. 매달 월경을 하며 난자를 하나씩 배출한다. 난모세포를 모두 소진하면 폐경에 이른다. 이렇게 폐경을 하는 동물은 인간과 고래가 유일하다. 폐경은 생명의 세계에서 미스터리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남기는 쪽으로 진화하는 것이 진화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50세를 전후해 폐경을 하고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없으니 냉혹한 자연과 진화론의 관점에서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자연계에게 번식을 끝낸 늙은 인간은 ‘자연적으로’ 의미는 없다.


인간과 같은 고도로 사회화된 동물의 폐경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할머니 가설(grandmother hypothesis)’이다. 직접 자녀를 낳기보다는 손자들의 양육에 도움을 줘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번성시키는 방향으로 여성의 몸이 진화했다는 것이다. ‘노인들이 간접적으로 자손 번식에 도움을 준다.’는 주장이다. 노인 부모가 손주들을 돌보아 후손의 생존비율을 높여 유전자를 후세에 전할 가능성도 높아지게 한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손주양육에의 참여는 학업 성취도 향상, 사회성 증가, 신체 건강 등 다양한 지표에서 긍정적 효과를 보인다는 연구는 많다.


실제로 할머니의 역할은 자손의 번성에 도움이 됐다. 역사적으로 아동 사망률이 높은 시기에 할머니의 양육 참여는 사망률을 낮췄다. 할머니와 함께 살면 손주의 생존율이 높아진다고 분석한 과학 연구들도 많다. 더 나아가 유전적 친밀도가 높을수록 손주의 생존율이 더 높아진다는 결과도 있다.


17세기경 7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손자는 외할머니와, 손녀는 친할머니와 함께 살 때 생존율이 더욱 높았다. 이들이 유전적으로 더 친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유전자와 다른 유전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설명으로 한계가 있다. 이후 연구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것이 생존율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만 유전적 친밀도에 따른 차이는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자녀보다 손주가 더 예쁘다고 한다. 그것은 과학적으로 설명된다. 할머니는 손주의 사진을 보면 정서적 공감과 관련된 뇌 영역이 눈에 띄게 활성화한다. 활성화되는 정도는 아빠보다 할머니가 더 컸다. 할머니에는 손주에 공감하는 감성을 가진 것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부모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뇌까지 조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할머니가 키운 손주가 살아남는 방향으로 진화된 것이다. 반면 아들, 딸, 며느리, 사위의 사진을 보여줬더니 감정적 공감 영역보다 인지적 공감과 관련된 영역이 더 활성화됐다. 성인 자녀를 보면 그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이해하려 하지만, 손주를 볼 땐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부부 중 반이 부모가 자녀양육을 돕는다. 이 때문에 ‘할마할빠’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우리 사회는 경쟁이 치열하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면 부부가 함께 일하지 않으면 살기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경쟁의 정도는 점점 더 격화되어 과연 지속가능성이 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로 나아가고 있다. 여기에 극단적인 이념대립은 노인 비하로 종종 나타나고 있다. 물론 노년층이 청년층의 미래에 부담을 준다는 역설은 있다. 극히 일부라고 믿고 싶지만 진보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노인은 투표권을 주면 안 돼! ‘노인은 죽어야해!’라고까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20세기 초 구소련 공산당이 공산주의를 위해 우크라이나 농민 수백만 명 또는 천만 명 이상을 죽게 만든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주장이다.


얼마 전에 통도사를 방문하고 그 뒤에 있는 영축산을 등산을 했다. 영축산 등산로 입구에 하나밖에 없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등산로 입구에 ‘경호지역’이라고 표지가 있어 식당주인에게 물었더니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다고 한다. 식당주인은 이 사저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불만이었다. 매주 주말이 되면 진보와 보수 측 인사들이 와서 데모를 하고 싸워 시끄럽다고 한다. 우리 사회가 어쩌다가 서로를 이렇게 ‘증오’하게 되었는지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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