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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무소유인가


불교가 나온 배경이 된 힌두교의 소유관념은 불교와 거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는 브라만에 이르는 수행방법이 제시돼 있다. 브라만은 힌두교의 유일신의 명칭이자 인간이 이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의미한다. 첫 번째는 스승으로부터 배우는 학습이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가정생활을 하여 가족을 부양하여 세속의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 우파니샤드는 현생을 고통으로 보지만 현실적인 삶을 그냥 버리라고는 하지 않는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삶을 열심히 살도록 권장한다. 그러나 세상은 환영과 같은 것이고 무상하니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인간들이여! 항상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백 년을 살아갈 소망을 가져라. 인간으로서 그렇게 살고 싶으면 업보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라는 말을 많은 사람들이 염세주의로 이해한다. 그렇지 않다. 불교에서의 무상이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늙고 죽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불교도 기독교와 거의 비슷한 소유 관념을 가진다. 탐욕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고 법정스님이 말하는 ‘무소유’와 일맥상통한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란 소유를 탐하지 않고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아무것도 갖지 않거나 가난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소유에 집착하는 한국사회에서 1976년 출간된『무소유』를 3백만 부나 사서 읽었다.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법정스님의『버리고 떠나기』 중) 사실 욕망과 욕심이 없다면 그것은 ‘물건’이며 생명이 아니며 인간도 문명도 존재할 수가 없다. 법정스님이 말한 무소유는 ‘단순히 가지지 말라.’가 아니라 불교의 탐진치(貪瞋痴)를 버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불교는 그리스도교와는 현격하게 다르지만 세상에서의 재물에 대한 생각은 비슷하다. 불교에서 인간의 욕망과 재물은 ‘고통’(dukkha, 苦)라고 생각한다. 고통이란 정말로 고통스럽다는 의미는 아니면 이런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상식’이 불교이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불행의 원인은 집착이다. 인간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좋은 것이다. 최소한 나쁜 것은 아니다. 붓다는 인간이 세속적인 것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기쁨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물질적이거나 신체적인 편안함 그 자체는 포기되어야 하는 것도 비난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러한 것들은 덧없는 것이므로 그것들에 사로잡혀 집착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결국 죽어서 가져갈 것도 아닌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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