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 11 : Trial & Error
9개월의 자료 조사와 11달의 집필 과정을 거친 『삼키는 칼』 작업은 2015년에 막바지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 와중에 희곡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모의>는 제8회 전국창작희곡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았다. 2015년 여름의 일이었다. 부산연극협회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인데 왜 전국창작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짐작은 가지만 분명친 않다. 대상과 금상 각 1명씩이었는데, 수상식장에서 발표날 때까지 내가 금상인지 대상인지 몰랐다가 멘탈이 살살 녹았었다.
이 즈음, 왜 희곡 공모전이 그리 많은지를 알게 되었다. 각 협회는 대한민국 연극제에 출품할, 상연되거나 발표되지 않았던 신작을 필요로 했고, 협회원인 극단들이 고를 원고를 확보할 셈으로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공모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전국창작희곡공모전도 대한민국 연극제에 참가할 부산 극단을 위한, 일종의 사전정지 작업이었다. <모의>를 잡은 곳은 극단 무진(가칭)이었다. 부산연극제가 열렸고 본선 진출은 실패했지만, 뒤풀이로 열렸던 해운대에서의 밤은 화기애애했고 무척 유쾌했었다.
2015년 가을에는 제7회 대전창작희곡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내 아버지의 집>은 성녀로 추앙받던 김마리아 수녀가 죽고 그녀의 노트가 발견되며 사건이 벌어진다. 그녀의 아버지가 지었던 집을 수녀원으로 헌납한 김마리아는 아버지의 집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죽는다. 하지만 그녀의 헌신은 80년대 안기부의 프락치 노릇을 했던 아버지의 죄를 덮으려 한 위선적인 행동이라는 폭로가 나온다. 노트를 중심으로, 이 일을 덮어야 한다는 측과 김마리아의 그림자를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는 측이 대립한다. 난 <내 아버지의 집>을 통해 진실이 지닌 아이러니와 역사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작품은 다음 해 대한민국 연극제에 출품될 희곡 중 하나로 나와야 했다. 하지만 당시 협회장이었던 김한샘(가명) 대표가 이 작품을 극단들이 선정할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후에 듣기론 대전 예술의 전당과의 협의를 통해 대전시로부터 예산을 받아 대전연극인들 전체가 참여할 작품으로 세우려 했다는데, 결국 그리 되진 못했다. 결국 대한민국 연극제에 출품도 되지 못하고, 단독 공연도 무산된 상황에서, 어찌어찌해서 대전예당의 2016 스프링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공연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대한민국 연극제에 나가지 못한 건 유감이다.
공모전이 많은 이유를 이해하자, 내가 왜 그리 많은 공모전에 당선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연극제의 작품들은 일정한 볼륨을 필요로 했고, 볼륨이 확보되려면 이야기의 선이 굵어야 했다. 그 길을 간 뒤에야, 나는 내가 연극제에 걸맞은 작품을 쓴다는 걸 알았다.
좌충우돌이 필요한 이유다.
수상에 대해 말씀드릴 겸, 감사의 표현을 할 겸 학교를 찾았다. 정순진 교수님은 퇴직하셨지만, 희곡을 가르치시던 조성필 교수님(가명)은 다른 관련 학과로 옮기셨다. 그분께 잊을 수 없는 한 마디를 들었다.
“너 요즘 상금 사냥꾼 되었다면서?”
연이은 공모전 수상을 상금을 따먹으러 다니는 걸로 주변에서 구시렁대던 건지, 그분께서 그리 생각하셨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상금 사냥꾼. 하지만 그건 내 이름을 알리려는 발버둥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내 이름을 높여줄 리 없었고, 다른 방법으로 나를 알릴 수도 없었다. 당시의 나는 좀 더 당선되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거라고 여겼다.
어리석은 착각이었지만.
상금에 미친 사람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먹고살아야 했고 꿈의 연장 기한을 늘이기 위한 길은 공모전 당선뿐이었다.
<내 아버지의 집>의 당선 이후, 희곡 한 편을 더 쓰면 한 권으로 묶어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전의 세 작품과는 결이 다른 걸 쓰고 싶었다. 여전히, 난 세상에 없던 작품을 쓰고자 했다.
<파국>을 쓰는 일이 쉽진 않았다. 그걸 쓰며 배웠던 건, 꼭 순서에 맞춰 쓸 필요는 없다는 거다. 내가 <파국>을 쓰게 만든 장면은, 장보고의 잘린 목을 굽어보며 신라 왕이 내뱉는 미친 말들이었다. <모의>에서 모사장이 전화를 받는 장면과는 사뭇 다른 독백이다. A4지 1장에 달하는 대사를 쓰면서 왕의 캐릭터가 한 번에 잡혔다. 왕의 대척점엔 왕후가, 그들로 대표되는 신라 왕궁의 반대편엔 장보고의 청해진이 있을 것이었다. 갈등 관계를 그리 잡으면 되는구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을, 그렇게 이야기를 쓰면서, 괴롭게 끙끙대면서도 무척이나 즐겁게, 익혔다.
전전긍긍이 필요한 이유다.
공고는 2016년 1월 즈음에 났다. 전 챕터에 언급했던 사이트 중 하나였다.
기존 대한민국 연극제엔 서울연극협회가 참가하지 않았었다. 대한민국 연극제 자체가 지방 연극 활성화를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연극 침체기가 길어져서인지 2016년엔 서울연극협회의 대한민국 연극제의 참가가 확정되었다. 내가 본 건 연극제 출전을 위한 성북연극협회의 작품 모집 공고였다.
그 무렵엔 <내 아버지의 집>을 쓰고 네 번째 희곡인 <파국>을 구상하는 중이었다. <파국>은 장보고의 암살이 주된 소재이지만, 내가 다루려 했던 건 신념을 지닌 자강과 기회주의자 운각의 갈등, 그리고 무녀와 황후로 대표되는 신라 왕실 내부의 대립이었다. 쓰고 나서야, 그리려 했던 부분이 박근혜 정부 시기의 청와대였음을 깨달았다.
성북연극협회는 첫 대한민국 연극제 참가할 작품으로 <파국>을 결정했다.
<끈>의 실패를 만회하고 싶었다. 일주일 넘게 <파국>만 붙들고 다듬어서 연습 이전에 최고의 원고를 보내드리려 했었다.
협회 내부에서 결정한 최진성 연출(가명)은 연습이 들어간 이후에 배우들과 함께 만났다. 성북구 내에 있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 연습실에서였다. 인상이 좋은 분이었는데, 내 작품을 어떻게 만지실지 그걸로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연습은 딱 한 번 참관했다. 말씀을 요청하기에, 내가 생각하는 <파국>에 대해 얘기를 하고 나왔다. 작가가 할 일은 매혹적인 바탕을 깔아주는 것뿐이다. 여기에 세세함을 더하고 극을 살아있게 만드는 건, 연출가와 배우들의 몫이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성북연극협회는 원고료를 줄 수 없다고 말했다. 예산이 없다 했다. 듣자 하니, 배우들 식사도 연습실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걸로 때우는 모양이었다. 지금의 나라면 배우들 밥을 왜 그 따위로 주냐며 뭐라 했겠지만, 당시엔 경력도 미천했고 관계자 모두와 초면이었다.
예산이 없다는 핑계는 이후 자주 들었지만, 당시엔 처음이어서 어찌 대응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무리 없어도 어디에선가 받아 운용하는 자금이 있을 건데, 원고를 제공한 내게 돈 한 푼 못 준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이런 사업은 지원금을 받아 진행되는데, 지원금 신청란에는 받을 돈을 어떻게 쓰겠다는 계획을 쓰기 마련이다. 서류에는 작가 원고료가 포함되기 마련이고, 보통 전체 예산의 10%를 작가 원고료로 책정한다. 10%라니. 그걸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공모전 당선은 원고료의 선인세 개념으로 지급되는 거라, <모의>나 <내 아버지의 집>에서는 원고료 얘기를 할 일이 없었다.
처음 공연을 올리는 걸 초연이라 하는데, 연극 지원금은 초연극이 아니면 나오지 않았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지원금 없이 공연을 올릴 수 있는 극단은, 대한민국에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극단들은 초연 대본을 찾으려 하고, 그게 아니면 19세기에 죽은 작가들의 ‘골이 따분한’ 연극을 올린다. 그 경우에도 지원금 서류에는 지원금의 10%를 원고료로 책정한다. 하지만 관례는 백만 원이고, 이는 당연히 10%에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성북연극협회는 오십만 원 밖에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그것도 원고를 다 받은 다음에야.
“그러지 말고 오십만으로 끝내, 이 작가. 혹시 알아, 내가 나중에 룸빵이라도 데려갈지.”
나름 명성을 지닌, 해외에까지 잘 알려진 1인극을 하는 극단의 대표가 내게 한 말이었다.
그러긴 정말 싫었다. 돈 오십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걸 승낙하면 그게 극작가들의 원고료 기준이 될까 걱정이 컸다. 저번에 <파국> 작가도 원고료 오십에 했는데, 왜 당신은 백을 다 받겠다는 거야? 다른 작가들 앞에 내 이름이 그렇게 팔릴까 봐 싫었다.
아니, 근데, 정성을 쏟은 원고를 단돈 백만 원에 넘겨받는 거 자체가 말이 되나.
내가 버티자, 말이 돈 모양이었다. 나중엔 배우들까지도 비웃었다고 한다.
“지방 작가가 서울에서 공연하면, 꽃가마 탄 거 아냐? 무슨 원고값을 받아?”
협회는 그럴 수 있다지만, 라면 먹으면서 고생하는 배우들이 그런 얘기를 내놓는다는 게 가슴 아팠다. 배우 여러분, 명심하세요. 말은 돌고 돌아 목적지까지 어떻게든 도착합니다. 결국 그런 편 가르기 속에서, 아랫것들은 서로의 뺨을 치면서 윗분들의 만족을 끌어내는 법인가 싶었다. <파국>의 배우 개런티는 차비도 안 되었던 걸로 안다.
<파국> 공연을 준비하면서 깨달은 건, 이런 거였다. 연극은 산업이 아니다. 대한민국 연극은 동아리 수준에 머물러 있다. 모든 구성원들이 가난하고, 공연을 올려도 나눠먹을 파이가 생기지 않는다. 지원금이 없으면 공연을 올릴 수도 없고, 극단을 유지하기도 힘들다.
여기가 바닥이구나 싶었다.
지난 챕터 중에서, <끈>의 실패에 대해 얘기했었다. 그 이후로 나는 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팀을 끝내 구원하는 희곡을 쓰려 애썼다. 대망의 대한민국 연극제 서울예선 공연일, 장보고가 목 잘리자 거기에서 솟구친 붉은 꽃잎들은 구현되지 않았다. 중간중간에 이해 안 되게끔 대사는 뭉텅이로 잘렸다. 전개는 어찌나 어수선한지. 장보고의 잘린 목을 받은 신라왕은, 원고에서는 그저 목을 굽어보며 대사를 외면 그만이었다. 신라왕이 왜 함에서 장보고의 머리를 들어 올렸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미용실에서 빌려온 게 분명했을 그 플라스틱 머리를 보고는, 관객들은 하나 같이 웃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앉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가니, 최진성 연출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떻게 보셨어요?”
“잘 봤습니다.”
꽃가마를 타고 있다고? 공연을 저따위로 만들고? 속내를 그대로 털어놓을 순 없었다.
심사 결과는 이틀 뒤에 나왔다. 성북연극협회가 대한민국 연극제 서울 대표로 뽑혔고, 내가 희곡상을 수상했다는 결과를 듣고 곧장 서울로 갔다. 뒤풀이할 돈은 있었는지, 커다란 파전집을 전세 내다시피 하고 앉아들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따로 모여 있었고, 나는 연출님과 함께 거기로 불려 갔다.
“진성아, 너 연출한 지 몇 년 되었냐?”
“네?”
“너 연출상 못 받았지? 배우 중에 조연상이랑 신인상 하나씩 받았고, 또?”
“없죠.”
“없는데, 어떻게 너희 팀이 올라갔니? (침묵) 너, 순전히 작가 글빨에 올라탄 거야. 알잖아, 응?”
연출은 말이 없었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미안한 상황이었건만, 내겐 지난 몇 년의 괴로움을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나는 팀의 실패를 막는 수준의 원고를 쓰고 싶었고, <파국>은 그걸 정말 실현했다. 팀원들이 나를 팀원으로 여겼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내 작은 소원을 이루었다.
<파국>은 2016 대한민국연극제 경쟁부문에서 은상을 탔다. 당연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게 지금까지의 연극제 마지막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배워나갔다. 연극 무대를 이해하고, 그걸 만드는 사람들의 사정을 알게 되며, 여기가 매력적인 곳임에도 끝내 정착 못할 땅임을 깨달았다. 나는 실수(Error) 속에서 계속 시행(Trial)하는 중이었다.
시행착오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