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 23 : 기준에 대하여 – 하
마지막 책들에는 의도치 않게 내 기호가 깊이 담겨 있다. 내가 좋아하는 방식의 책들이 그득한 셈인데, 상과 중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지, 하에 실린 목록이야말로 내 스타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나는 이런 작가들을, 이런 글들을 좋아했고, 그것들이 내 내면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그렇기에 그들의 글은 내 글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찾아서 읽길 권한다. 당신의 내면에서 강렬함 선사할 이 글들이, 당신을 창작의 세계로 밀어올릴지 모를 일 아닌가.
1. 돈 윈슬로, 박신호 옮김, 『더 포스』, 위즈덤하우스, 2018.
두 편의 책을 목록에 올린 작가가 있던가? 돈 윈슬로가 유일한 것 같다.
『개의 힘』이 장구한 세 갈래의 이야기를 마침내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밀어올리는 구조를 지녔다면, 『더 포스』는 추락에 대한 서사다. 타락한 형사가 FBI의 손아귀에 들게 되고, 동료를 팔아넘겨야 하는 입장에 처해진다. 그러면서 몰락이 시작된다. 데니 멀론은 지난 과오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갚는다. 몰락에 대한 이야기가 매력적이긴 쉽지 않다. 그리고 몰락한 악인을 복된 결말로 이끌어내는 마무리도 마뜩치 않다. 작가인 돈 윈슬로는 매우 가느다란 줄을 오래도록 탄 셈이다. 솜씨 좋은 돈 윈슬로이기에, 그런 줄타기는 흥미진진하고 눈길이 가게 만든다.
2.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최필원 옮김, 『엑스』, 그 책, 2011.
박찬욱 감독이 이병헌 배우를 주인공으로 이 작품을 영화화하는 걸로 안다. 하지만 난 이 책을 십여 년 전에 이미 읽었었다.
이 책은 해고에 대한 이야기이다. 버크 데보레는 22년 동안 제지회사에 일해온 사람이다. 아무리 구직 활동을 해도, 자신이 원하던 자리에는 다른 누군가가 들어간다. 의자뺏기 싸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버크 데보레는 자신이 원하는 정도의 일자리의 구인광고를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에 응하려 면접을 보려 오는 자들을 죽인다. 자신의 경쟁자들을 제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과연 경쟁자들의 목을 자른 버크는 자신이 원하던 그 직장에 들어갈 수 있을까? 살인을 소재로 한 단순한 작품이 아니다. 해고당한 인간이라는 테마를 아주 깊이까지 파고드는 이 소설은 매우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만다.
3. 데니스 루헤인, 조영학 옮김, 『밤에 살다』, 황금가지, 2013.
몰락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으니, 성공에 대한 이야기도 읽어야지.
이 소설은 데니스 루헤인이 쓴 『운명의 날』의 스핀오프 격인 소설이다. 금주법 시대의 보스턴을 살았던 커글린 삼형제가 경찰 파업의 날에 맞았던 격변을 다뤘던 『운명의 날』도 좋은 소설이지만, 『밤에 살다』에 미치진 못한다. 그리고 영리한 벤 애플렉은 이 판권을 사, 영화를 찍고 주연까지 맡았다!
주인공은 막내인 조 커글린이다. 야심차며, 똑똑하고, 재빠르며, 배짱도 지닌 그는 범죄로 돈을 벌어들이며 명성을 얻는 가운데,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로 인해 조 커글린의 세계는 뒤집어지고 만다.
영화보다는 확실히 소설이 낫다. 빠르고, 격렬하며,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4. 앤서니 호로위츠, 이은선 옮김, 『중요한 건 살인』, 열린책들, 2023.
앤서니 호로위츠를 올해에 알게 된 건, 가장 큰 수확이자, 가장 큰 실수였다. 나는 왜 『중요한 건 살인』을 얼른 집어들어 재빨리 읽지 않았던가! 알라딘 책방에서 매대에 꽂힌 이 책이 나를 그토록 유혹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메타 소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매우 훌륭하고 탁월하게, 정말 영악할 정도로 이 부분을 잘 활용했다. 주인공인 나는 앤서니 호로위치일 리가 없지만 정말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엉뚱한 주인공을 세운 것에 비해 훨씬 자연스러운 흥미진진함을 연출해냈다.
위에 자리한 책들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위트가 있으며, 견고하다. 또한 소설과 드라마 작가의 삶이라는, 독자가 궁금해할 지점을 영리하게 활용했다.
5. 빌 윌링험, 이수현 옮김, 『페이블즈』, 버티고, 2012.
닐 게이먼에 이어 다시 그래픽 노블 시리즈를 가져왔다.
우리 모두 동화를 안다. 직접 소비하기도 했고, 자녀나 조카들을 위해 읽어주기도 했으니까. 동화를 비트는 작업은 유구하다. 안데르센과 월트 디즈니의 손을 거쳐 빚어진 환상동화들은, 닐 게이먼을 비롯한 수많은 작가를 통해 짧고 위트 있게 변형되었고, 근래엔 카렌 두베의 『납치된 공주』를 통해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그 총합이 바로 빌 윌링험이다.
빌 윌링험은 동화 속 인물들을 현대 미국으로 가져오고, 이를 동화 전쟁으로 능숙하게 뒤바꾸어 놓았다. 엄청나게 많은 대사들과 끊임없는 비틀기 시도로 인해, 동화들은 원래의 케릭터를 바탕으로 놀랍도록 흥미로운 부분들을 보이는 능동적인 모습으로 발전해나간다. 이제 12권 읽기에 접어든 지금, 나 또한 이 놀라운 그래픽노블이 어떤 결말을 지녔을지 매우 궁금하다. 조바심이 날 정도로 말이다!
6. 요네자와 호노부, 김신영 옮김, 『흑뢰성』, 디엔씨미디어, 2022.
매년 홀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고 있지만, 2024년이야말로 박빙이다. 『중요한 건 살인』이 좋았고, 아깝게 이 목록에 오르지 못한 이혁진 작가의 『누운 배』가 놀라웠으며,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도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베스트는 요네자와 호노부의 『흑뢰성』이다.
이 놀라운 작품은 실제하는 일본 역사 내 미스터리에 기반한다. 오다 노부나가를 배반한 아라키 무라시게는 농성을 하던 아리오카 성을 왜 내버렸을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4편의 미스터리를 통해 차차 밝혀진다. 여기에서 요네자와 호노부의 재능이 빛을 발한다. 적에게 포위된 성, 거기에서 벌어지는 납득되지 않는 여러 사건들, 그걸 풀어내야 하는 성의 주인 아라키 무라시게. 그리고 그가 성의 지하에 가둔 적의 사신이자 뛰어난 지혜를 지닌 구로다 간베에와의 음습한 대화에 이르기까지.
실화에 바탕을 두었지만, 허구와의 차이를 알아낼 수 없을 정도로 이음매는 촘촘하다. 그리고 매끈하다. 두껍지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페이지 터너가 아닐까.
이걸 쓰면서 찾아보니, 엄청나게 많은 책을 써낸 작가였다. 역시나 좋은 작가가 된다는 건, 일정량을 써내야 하는 것과 맥이 닿아 있으려나. 『책과 열쇠의 계절』에서의 다소 지나친 퍼즐성과, 『부러진 용골』에서의 서사의 부자연스러움을 지나, 『흑뢰성』에서는 정말로 높게 솟구쳤다.
세계는 넓고, 탁월한 재능은 넘친다.
7. 스콧 스미스, 조동섭 옮김, 『심플 플랜』, 비채, 2009.
요네자와 호노부와 반대인 작가는 스콧 스미스가 있을 것이다. 스티븐 킹이 “소설 쓰기는 자전거 타기와 달라, 꾸준히 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며 다음 작품이 나오지 않는 걸 걱정했던 작가가 바로 스콧 스미스였다. 『심플 플랜』 이후 나온 『폐허』가 8년의 간격을 두었으니, 많이 쓰는 작가는 전혀 아니다.
『심플 플랜』의 탁월함은 제목에 모두 담겨 있다. 눈 덮인 숲에서 세 남자는 비행기 잔해와 돈으로 꽉 찬 가방을 발견한다. 둘은 사이가 서먹한 형제고, 다른 하나는 매우 친근한 친구이다. 계획(Plan)은 간단(Simple)하다. 이걸 한 사람이 맡아두고 이 사건이 완전히 잠잠해질 때까지 지폐 한 장도 쓰지 않는다. 그리고는 세 덩어리로 나눈다.
계획이 간단해도, 실천은 달라진다. 그리고 일은 틀어지면서, 점차 망가지기 시작한다. 계획이? 아니, 그걸 이루려는 사람 각각이, 그들 사이의 관계가, 그 사람들의 내면이.
『심플 플랜』의 최고 장점은 막판에, 막판으로 흘러들어가는 변곡점에 자리한다. 이 작품은 단순한 스릴러가 아니다. 스콧 스미스는 인간성 자체의 끔찍함을 다루고 있다. 그건 우리 모두가 지닌 단면이다. 『심플 플랜』의 날카로움은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나의 내면에 깊은 자국을 남겨놓았다.
8. 애니 프루, 조동섭 옮김, 『브로크백 마운틴』, media 2.0, 2006.
소설 쓰기를 시작했을 때, 굉장한 작품을 많이 읽었다. 2009년은 아니었을 것이다. 2010년쯤이었지 않았을까. 애니 프루의 걸출한 작품을 만났던 때가.
나는 이 『브로크백 마운틴』에 수록된 단편 전부에는 관심이 없다. 「벌거숭이 소」와 「진창」이 좋았지만, 내 가장 큰 찬사를 받은 작품은 표제작인 「브로크백 마운틴」이었다.
이안 감독이 영화화했고, 나름으로 좋았지만, 역시나 소설에 미치진 못한다. 적절하고도 아름다운 묘사, 그리고 압축된 서술, 상징의 적확한 사용, 그리고 독자를 후려치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이 짧은 소설은 놀라운 채움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설은 아름답고, 아름답고, 아름답다. 비견할만한 작품은 스트라우트의 「밀물」와 앨리스 먼로의 「기차」를 비롯한 몇몇 작품 뿐이다.
쉬운 작품은 아니다. 그러나 독자를 납득하게 만든다. 한편으로 숙련된 독자들에게는 더 깊이 있는 독서와 이해를 가능하게 만든다. 높은 수준으로 압축된 서사를 지닌 탁월한 작품들만이 지닌 미덕을, 「브로크백 마운틴」은 지녔다.
9. 조 힐, 노진선 옮김, 『하트 모양 상자』, 비채, 2007.
모든 아들은 아버지를 뛰어넘으려 한다. 굳이 오이디푸스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아들은 자신의 기준을 아버지에게 두는 법이다. 그런 측면에서 조 힐은 아득한 기준을 지녔을 법하다. 미스터리 스릴러를 쓰려는 문학소년에게 아버지가 스티븐 킹이라는 현실은.
하지만 조 힐은 데뷔작으로 그 기준을 넘어버렸다. 까마득하게.
조 힐은 아버지보다 스트레이트한 편이다. 킹은 볼륨이 지나친 편이며, 그게 간혹 맥락을 끊어먹기도 한다. 조 힐이 매우 탁월한 서술로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이야기를 써내는 작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가 뛰어넘었어야 했을 사람을 떠올려보면, 이 책의 흥미는 더욱 커진다. 더욱이 『하트 모양 상자』가 지닌 매끈함과 섬뜩함을 감각해보면, 그가 비단 킹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젊은 작가로도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작품인 『뿔』도 괜찮았지만, 역시나 내겐 『하트 모양 상자』가 더 나았다. 저 책에서는 정말 시커먼 증오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10.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1.
김훈은 유물론자다. 그는 세계를 자기 몸으로부터 감각한다. 그는 적막한 인물의 심경을 서술하며, 자기 안에 물이 고인다는 표현을 쓴다. 고일 물을 들이기 전엔, 비었을 몸이었으리라. 그 물리적 비었음이, 그 내면의 적막을 은유한다.
그의 문장이 감각적인 이유이다.
문장은 짧고 단단하다. 그것은 칼을 믿고 적을 베려 하는, 그러나 세상이 아지랑이 같아지면서 그 적 또한 베지 못해 아득해지고마는 천상 군인인 이순신의 심경을 올곧이 투영한다. 문체와 그걸로 드러내려는 인물의 내면이 자연스레 합치하고 있다.
『칼의 노래』가 자연스런 설득력을 지니는 이유이다.
그런 이유들로 이 책을 원고지에 한 글자씩 옮겨적었었다. 소설을 배우기로 결심한 2009년의 일이었다. 꼬박 반년이 걸렸다. 그걸 적어가며, 그 문장들이 내 안으로 들어오길 바랐었다. 그러나 흘러들어온 건, 흘러나가기 마련이다. 그리 나갔더라도, 그 문장들이 내 내면을 문지르며 자취를 남겼음은 분명하다.
내가 김훈과 『칼의 노래』에 빚을 졌다고 여기는 이유이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을 다루지만, 『난중일기』에서의 문장 또한 가져왔다. 당연하다. 김훈은 이순신 그 자체를 그의 글에 드러내려 했을 테니, 이순신의 문장 또한 퍼올려야 했으리라. 그렇게 거듭 길어올려지면서 또렷해진 건 이순신 그 자체이다. 『칼의 노래』를 읽을수록 갑갑해지고 묘연해지며 응당 이를 데 없는 심경이 되어버리는 건, 읽는 이가 이순신의 처지와 그의 상황에 그토록 강렬하게 몰입되기 때문이다. 독자는 『칼의 노래』를 통해 이순신을 살아내게 된다.
『칼의 노래』가 걸작인 이유이다.
11. 츠쯔젠, 강영희 옮김, 『뭇 산들의 꼭대기』, 은행나무, 2017.
전혀 몰랐던 작가의 탁월한 작품을 알게 되면서, 기꺼이 감탄하면서, 놀라워하면서, 그리고 마침내는 숭앙하는 마음이 들기까지의 과정은, 복되다. 츠쯔젠에 대해선 이 책을 읽기 전엔 전혀 몰랐다.
『뭇 산들의 꼭대기』는 구불구불한 서사를 지녔다. 이 소설은 커다란 강물을, 드높은 뭇 산들을, 그리고 광장에 몰려 있는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츠쯔젠은 정말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야기들은 마디를 지녔고, 그 덕에 『뭇 산들의 꼭대기』은 수많은 마디들로 아름다워진 외양을 지니게 되었다. 장구하고 아름다우며 고고하게 흘러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뭇 산들의 꼭대기』를 집어들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