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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Oct 12. 2024

Drowning man

Chap. 20 : 온전한, 글쓰기

  그즈음은 다시 쓰던 『검은 물 아래에』의 작업이 막바지였다. 3부까지 썼는데, 내용이 성에 차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많은 페이지가 말썽이었다. 줄인다고 했지만 여전히 320장이나 되었고, 편집하기에 따라 3권에 달할 수도 있는 분량이었다.


  “그냥 똑같죠. 늘 쓰고 있죠.”

  민형식 대표의 질문에 나는 그리 대답했다. 의논할 게 있다 해서 서울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민 대표가 일본에서 소설 판권을 들여와 그걸 각색할 작가를 찾고 있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걸 깊게 상의하고도 각색 작가 제안을 내게 하지 않았기에 난 다소 언짢은 상태였다. 민 대표는 그걸 대학 후배에게 줬는데, 돌아온 시나리오가 실망스러워 상호 합의 하에 계약을 해지했다고 말했다.

  “작가님이 좀 써주세요.”


  『리카』는 일본 작가 이가라시 다카히사의 공포 소설이다. 리카라는 여성과 인터넷상으로 가까워진 유부남이 집착과 스토킹을 보이는 리카에게서 달아나려 하자, 리카가 이 남성에게 벌이는 끔찍한 짓을 써놨다. 『리카』의 가장 좋은 점은, 리카라는 인물의 강렬함이다. <헬 레이저> 시리즈의 핀 헤드나, <나이트 메어> 시리즈의 프레디 크루거에 비견될 정도의 강렬함이다. 우리나라엔 『리카』와 『리턴』 두 편만 번역되었지만, 일본에서는 더 많은 시리즈가 나와 있었고,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가 되기도 한 걸로 안다.


  각색 제안과 계약서 작성은 2024년 2월 말에 이뤄졌다. 이후 꼬박 석 달 동안 <리카>에만 매달렸다.


  이때 정말 많은 걸 배웠다. 20일가량 공 들여 작업을 했던 첫 버전을 보내놓고는 자신 있어했는데,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이건 시나리오가 아니라 소설이에요.”


  나로선 꽤 잘 썼다고 생각했는데, 왜 그런 평을 받았을까. 첫 버전을 분석하며 깨달았다. 나는 영화 시나리오의 문법에 너무 집착해, 영화 시나리오의 적절한 문장을 쓰지 않고 있었다.


  시나리오의 문장은 화면에 대한 묘사여야만 한다. 그리고 아주 간결해야 한다. 군더더기 표현이나 꾸밈말이, 정확한 설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가령, 커다란 책상 위에 시신은 놓여 있었다라고 소설에선 써도 된다. 물론 저 문장은 수동적이고 좋은 문장은 아니지만, 저리 써도 허용이 된다는 의미다. 소설에선 독자가 상황을 유추하면서 스스로 재구성할 폭이 존재해도 된다. 하지만 시나리오에선 안 된다.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소품팀은 책상을 구해야 하고, 이는 그냥 커다랗기만 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몇 cm 너비와 높이를 적으라는 말이 아니다. 스탠드와 서류함이 놓인 갈색 책상은, 시신이 흘린 피로 흠뻑 젖어 있다라고 쓰는 게 보다 낫다. 일종의 구체성을 띠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니, 내가 보낸 첫 버전은 엉망이었다. 한 씬을 일단 썼다. 길지 않은 씬이었는데, 쓰는데 무척 오래 걸렸다. 시나리오의 문장을 쓰는데 익숙해지기가 그리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 씬을 책상 한쪽에 놓인 컴퓨터 본체에 붙여놓고 다른 씬을 쓸 때의 기준이 되게 했다. 그렇게 97개 씬을 죄다 다시 썼다.


  그러면서 내가 습작으로 썼던 시나리오의 부족함을 새삼 깨달았다. 학폭으로 죽은 딸의 복수를 하려는 의사 엄마를 다룬 <Under the skin>과, 무한 반복되는 꿈속의 꿈을 통해 학대받은 자신과 학대하는 자신에 대해 깨닫는 <루프 무한의 고리>와, <모의>와 <상해 임정 최후의 날>에 이르기까지, 잘못된 문장으로 쓰였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런 좌충우돌을 통해 배워나가고, 나아지는 법이지 않은가. <리카>를 쓰면서 그런 걸 배웠다.


  여러 장르를 다 잘하면서, 각 장르마다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는 작가는 드물다. 나는 소설과 희곡을 했지만,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적은 아직 없다. 내 가치를 입증받은 건 무수한 문학상들 뿐이다. 대중을 설득하는 매력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는 일은, 내가 아직 정복하지 못한 영토이다. <리카>의 버전은 총 7개이다. 3고까지 써주는 계약이었지만, 나는 6개의 버전을 썼고, 추가로 들어온 수정 요청까지 해서 <리카>를 7번 썼다. 즐겁지만, 한편으론 괴로운 일이었다. 괴롭지만, 대단한 작업이었다. 괴로운 만큼 글은 나아졌고, 영상 글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글쓰기에 대한 강고한 원칙은 이러하다. 글쓰기 실력은 오직 글쓰기를 통해서만 나아진다. 하지만 오래 홀로 쓰다 보면, 자기만의 방식에 갇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주변에서 그 방식의 그릇됨을 짚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무렵 민 대표를 만난 건 행운이었고, 그의 한 마디에 난 이전의 내가 보지 못했던 지점을 생각하게 되었다. <리카>의 촬영은 2024년 9월에 이뤄질 예정이다. 하지만 영화는 투자를 받아야 출발이 가능하고, 변수는 무척 많다. 민 대표가 <리카>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멋지게 선보이길 바란다.


  그래야 나도 입봉을 할 테니까.


  『검은 물 아래에』는 또 한 번의 고쳐쓰기를 거쳤다. 1부와 2부는 괜찮았지만, 3부가 고민이었는데, 아예 다시 써버렸다. 그리고 3부가 다른 내용으로 쓰이면서 『검은 물 아래에』는 완전히 뒤바뀌어졌다. 고려 시대 벽란도를 중심으로 부하 웨이둥에게 세력을 빼앗긴 송나라 상인 짜오스와, 주먹패거리를 장악하려는 악랄한 소년 해문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싸움은, 3부로 가면서 남송의 황도였던 린안, 지금의 항저우로 가게 된다. 2부에서 죽었던 자들이 3부에서 넋으로 돌아오면서, 싸움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세력 대결이 되고 그 사이에서 마술과 환상이 뿜어져 나온다. 마르케스는 책이란 묵직해야 하는 법이라는 말을 남겼다. 『검은 물 아래에』는 내가 쓴 가장 묵직한 책이고, 진한 맛이 풍겨 나오는 놀랍도록 흥미로운 소설이다. 그 책으로 독자를 만날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마이디어북스와 함께 『밤의 색깔들』을 내기로 한 건 2023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한 해를 넘겨 2월부터 원고를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이미 써놓은 바 있다.


  작가란, 책을 쓰는 사람이다. 책을 판매하며, 작가는 인세를 받고, 만들기 전 계약금을 받는다. 『삼키는 칼』은 계약금이 없-다시 생각해도 기가 막힌 일이다-었고, 『강철로 된 무지개』의 경우엔 K-스토리 공모전 당선작이기에 상금이 계약금 역할을 했다. 『나쁜 검사들』을 낸 마이디어북스는 신생 출판사였고 기본금 정도인 이백만 원을 계약금으로 제시했다. 인세는 10%였다.


  이 글을 쓰는 2024년 8월 17일을 기준으로, 『나쁜 검사들』은 출간된 지 보름이 지난, 따끈한 신작이다. 이 책의 1쇄는 1,500부를 찍었다. 1쇄는 중요한데, 2쇄부터는 버는 돈이기 때문이다. 홍보와 초기 출판 작업 비용으로 1쇄의 수입을 보전하기 때문에, 2쇄 작가는 손익분기점(BEP)을 넘긴 감독이 되는 셈이다. 나는 대중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내겐 대중을 설득시키고 그들을 즐겁게 만든 글을 썼다는 판매이력이 절실하다. 『나쁜 검사들』을 통해 그 이력이 채워지길 간절히 소원한다.


  <리카>를 끝낸 5월 말부터 나는 『상해 임정 최후의 날』을 소설로 썼다. 김구와 상해 조선인들의 삶에, 그걸 쓰는 나도 피가 뜨거워지곤 했다. 200자 원고지로 1,048매, A4로 126장이니, 내가 썼던 장편소설 중엔 가장 짧다. 앉은자리에서 격렬하게 읽기에 가장 좋은 규모가 아닐까. 나는 이봉창부터 윤봉길에 달하는 상해 임정 사람들의 격렬한 분투기를 그리려 했다. 가장 다루고 싶었던 건, 젊은이들을 의열행위로 보내는, 젊은이들을 죽을 곳으로 보내는 김구의 속내였다. 그 괴로움을 이해했기에 이봉창부터 윤봉길에 이르기까지, 젊은이들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자기 피를 뿌리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던 것이리라. 『상해 임정 최후의 날』을 통해 독자들이 내가 느꼈던 뜨거움과 격렬함을 함께 느꼈으면 싶다.


  이 글을 마무리할 즈음, 암 판정을 받았다. 초기이기에 큰 걱정을 하진 않지만, 수술과 이후 치료 과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썩 좋진 않다.


  괴로움을 그치게 만든 건, 이 에세이였다. 40% 정도 썼던 이 에세이를 얼른 써야겠다는 생각에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낮과 밤 동안 5장을 내리 쓰고 나서야 내가 치료에 대한 근심과 암에 대한 공포를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쓰는가?


  글 쓰는 과정만이 나를 유일하게 집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잊어버리게끔, 글을 쓰는 나는 다른 차원으로 가고, 글쓰기에 몰입된 나는 여기 있되 여기 없는 지경에 이른다. 오직 글쓰기만이 나를 거기로까지 밀어낸다.


  그렇기에 나는 글쓰기를 놓칠 수 없다. 세상의 보상이 지금보다 적더라도 나는 글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게 나를 나로 만들기 때문이다. 쓰는 나야말로, 온전한 나이다.


  이 잡문의 큰 제목이 후에 어찌 결정될지 모르지만, 쓰는 중에는 『Drownig man : 가라앉는 남자』라고 지었다. 그리 정했을 땐 내가 저질렀던 수많은 실패와 그때 내 안에 스며들었던 검은 흔적을 떠올렸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측면에서, 여전히 가라앉아 있다. 글을 쓴다는 건, 나 스스로를 유폐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한, 나를 지극히 낮은 곳으로까지 잠기게 만들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짧고도 기쁜 무대 위의 순간을 제하면, 작가는 언제나 자기만의 방에 깊이 머무르며 잠겨야 하는 법이다. 이제야, 이렇게 내가 걸어왔던 길을 찬찬히 돌아본 다음에야, 나는 내가 깊이 잠겼던 시간들이 고통과 슬픔이면서도 그게 반드시 겪어야 했던 한 뼘들이었음을 깨닫는다.


  깊어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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