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 18 : 좋구나, 프리랜서가 아닌 것은
또 다른 기회는 시나리오 <모의>를 쓰는 중에 찾아왔다. 역시나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넣었고, 연락이 와서 면접을 보았다. 시나리오 <모의>를 넘긴 지 사흘쯤 지난 시기였다.
2024년인 요즘은 작가에게 기회가 너무도 줄어들었다. 2019년까지만 해도 시장에 돈이 있었고, 찍을 뭔가를 기획하는 사람들과 기획안을 검토해 투자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꽤나 존재했다. 푸른날 엔터테인먼트(가칭)는 몇 개의 드라마와 영화를 만든 제작사였고, 기획안을 지닌 작가를 두루 뽑는 중이었다. 나까지 총 10명의 작가를 고용한 걸로 알고 있다.
제시받은 계약 조건은 다소 놀라웠다.
A안은 연봉을 사천팔백만 원으로 다달이 받고, 편성이 되면 연봉만큼의 금액을 보너스로 받는 조건이었다.
B안은 60회 분량의 선계약을 하고, 소정의 계약금을 받으며, 편성과 동시에 회당 천만 원의 원고료를 받는 방식이었다.
A안은 매달 안정적인 급료를 받는 방식이었고, B안은 편성 이후의 회당 원고료가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말할 것 없이 나는 A안을 선택했다. 나중에 드라마 작가들과 모임을 가진 자리에서 당시 받은 제안을 얘기하니 다들 놀라워했다.
“그런 방식의 드라마 작가 계약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매달 적지 않은 금액의 월급을 받고 4대 보험까지 받았던, 정규직의 꿈을 실현해 준 푸른날 엔터테인먼트에게, 지금도 난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본부장 사무실로 내려오니, 다른 PD들은 퇴근하고 없었다.
“대전에 좀 늦게 내려가도 되죠?”
본부장은 영화 담당과 드라마 담당 두 명이었고, 감독들에게 주어진 사무공간이 좁다랗게 이어 붙은 작지도 크지도 않은 사무실이었다.
여의도에서 상암 인근까지 택시를 타고 갔던 걸로 기억한다.
국내 첫 손에 꼽히는 드라마 제작사에 소속된 윤상호(가명) PD는 작은 체구에 신랄한 혀를 지닌 사람이었다.
“내가 작가님 체구였으면, 사람들 엄청 패고 다녔을 거예요.”
그건 체구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말을 그렇게 했다.
본부장의 계획은 이랬다. 괜찮은 기획안을 들고 온 나를 자신이 직접 핸들링한다. 기획안에 관심이 있어하는 윤 PD와 함께 아이템 개발을 진행한다. 진행이 넉넉한 수준에 괜찮은 속도로 이뤄지면, 국내 첫 손에 꼽히는 그 드라마 제작사와 푸른날이 함께 제작을 맡아 편성을 이룬다. 큰 제작사와 작은 제작사가 아이템 개발 단계에서부터 협의하는진 몰랐는데, 본부장과 윤 PD는 이전에 같은 드라마의 제작자와 연출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었다.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는 이러한 연줄들이 긴요하게 작용했다.
이 모든 계획이 이뤄지기 위해선, 내가 드라마를 매끈하게 후딱후딱 써야 했다.
그리고 그게 잘 되지 않았다.
입사한 뒤부터 퇴사하기까지 9개월 정도 걸렸다. 아이템은 법이 제대로 심판하지 않은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종의 자경단인 셈인데, 나는 여기에 다른 꺾기를 넣어서 후반부가 달라지게 만들었다. 좀 더 인간을 들여다보는 드라마를 염두에 두었달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아이템은 숙성이 필요했다. 나 혼자 이리저리 뒤집어보고 잘라보다가 다시 뭔가와 합치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나름 전문가라는 분들이 여기저기 지시를 하면서 아이템이 내가 바라보는 방향과 다른 곳으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 즈음 난 두 가지 실책을 저질렀다.
하나는 내가 지난 한 주 동안 뭘 했는지 일일이 그 둘에게 얘기했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쓰는 과정과 자료를 모아 원고를 진행하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에 대해 공유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원한 건 자기 입맛에 맞는 원고였고, 그걸 만드는 과정에 대한 이해나 공유는 필요치 않았다.
다른 하나는 그 두 사람이 원하는 바에 대한 즉각적인 수용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개연성과 맥락을 중요시하는 작가다. 가령 임상윤 감독이 만들고 소지섭 배우가 주연한 <회사원> 같은 영화는 내게서 멀다. 흥미롭지만, 내가 구상하는 이야기들과는 다른 높이에 자리한, 좀 떠 있는 영화다. 내가 요구받는 부분은 이야기를 띄우라는 것이었고, 나는 그게 떠 있는 게 불안했다.
각오는 단단했다. 난 소설가고, 극작가고, 영화도 했지만, 여기에는 여기 문법이 있는 거다. 나는 계속 성장하고 확장해 온 작가니까 그런 확장을 요구받아도 잘 이뤄낼 것이다. 나는 그리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협업을 위해서는 정확한 이해(Understand)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들의 이해는 이해(利害)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 아이템을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드라마의 방향으로 내가 끌고 나가주길 바랐다. 작가란 그런 존재였다. 제대로 된 마당을 깔아주고, 모두가 일을 벌일 바탕을 만들어주는 사람. 아이템을 얼른 만들어 윤 PD가 소속된 제작사에 얼른 태우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작가라는 자가 원고 작성이 더뎠다.
내가 필요했던 건, 내가 생각한 세계를 이해하고, 다양한 레퍼런스 안에서 함께 논의해 나갈 동료였다. 하지만 아이템 개발 상황에 놓인 드라마 작가는 홀로 존재하는 법이고, 요구를 수용하던지, 자기만의 더 나은 대안이 담긴 원고를 내놓아야 했다.
그러기엔 내 드라마 작법 기술이 부족했나.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드라마가 편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정과 개작과 다시 쓰기에 놓이는지를 알면, 결국 드라마의 작법 기술이란 될 때까지 밀어붙이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이템 개발 단계에서부터 정말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요구가 들어오고, 작가는 자기 생각이 옳았는가를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확신을 가져도 글이 나갈까 하는 판에, 의심이 들면 생각을 텍스트로 밀고 나갈 수가 없다. 많은 드라마 아이템 개발이 엎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리라.
여의도에 올라가 깨지면 다시 수습해 내려오고, 대전 작업실에서 다시 이리저리 붙여서 만들어 올리면 여의도에서 다시 깨지는 수순이 몇 달이고 반복되었다. 큰 기둥을 그대로 둔 채 아이템의 진행 방향과 장르까지도 미친 듯이 바뀌었다. 내게 찔러진 참고 자료만 해도 장르들이 너무 다양했다. 이걸 끼우려면 저걸 빼야 하는데, 저거엔 다른 뭔가가 얽혀 있어 그러려면 수술을 해서 재배치를 해야 했다.
가장 괴로웠던 건, 윤 PD의 신랄한 혀였다.
“올해 우리 인생 풀릴지 어쩔지는 작가님한테 달린 거, 아시죠?”
“아니, 이걸 못 알아들어요? 안 쓰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나?”
“난 참 이해가 안 가네. 여태 그러고 있으면 뭘 어쩌자는 거야.”
“작가님만 똑바로 하면, 참 편한 건데.”
나중에 다른 드라마 작가들에게 들으니, 비아냥과 하대로 업계에서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내게는 상당히 예우를 갖춘 편이라고 얘기해 주어 무척 놀랐다.
예우를 갖추지 않은 사람들에겐 대체 어떻게 대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에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되는 것부터 잡고 상호 공통분모를 잡은 상태에서 다른 걸 조율해 가는 방식이었다. 윤 PD는 자신이 원하는 과녁이 존재했고, 내가 거길 맞춰주길 바랐다. 내게는 그 과녁이 매주 미팅 때마다 바뀌는 기분이었는데, 아마 당사자는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기획안에서 개선점을 찾아서 커다란 문제부터 잡아나갔으면, 세 사람 모두 시간낭비를 하진 않았을 거다. 내겐 『밤의 색깔들』이라는 근사한 대안도 있었고, 그건 자경단보다 훨씬 풀어내기 쉬운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꺼낼 틈이 없었다. 한 주만에 가져온 원고와 기획안은 난도질당하기 바빴다.
지금 디렉토리를 열어보니, 버전이 다른 기획안이 7개에, 각 기획안에 맞춘 원고가 1∼2개씩 있다. 열심히 쓴 것과 별개로, 과녁을 맞히지 못한 원고는 모두 폐기대상이다. 원고 뭉치를 보니, 왜 원하는 걸 해내지 못하냐는 식의 핀잔과 눈초리들이 떠오른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 꽂히는 회사에서의 생활을 유지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더 크게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준 푸른날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좋은 원고를 제공하고 싶었다. 회사에 득이 되는 전속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좋은 원고가 만들어지기 썩 괜찮은 상황은 아니었다.
드라마 작가들과 모임을 지속하면서 배운 건, 다들 나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는 것이다. 더 심한 자들도 많았고, 상처받은 작가들은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기도 하고 정신과 신세를 지기도 했다. 좋은 결과를 낸 작가들은, 긴밀히 소통하거나 제대로 된 피드백을 받아 가능했다고 입을 모았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쉽게 이뤄지기 어렵겠지만, 힐난 섞인 비아냥보다는 격려 섞인 대안 제시가 훨씬 효과적이지 않나 싶다.
“이 작가, 내일 안 올라와도 될 것 같아.”
기획안을 수차례 받던 윤 PD는 시들해졌는지 다른 작가에게 다른 기획안을 붙들러 갔고, 본부장은 미팅을 중지하자고 말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비슷한 드라마인 <모범택시>가 방송되면서, 기획안이 생명을 잃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내 기획안은 <모범택시>와 전혀 다른 드라마였는데, 그들은 콘셉트가 겹치면 편성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편성 문제 판단은 그들의 전문성과 연관된 일이지만, 작가로서 작품의 판단은 전혀 달랐다. 나는 실수하는 인간과 그걸 만회하려는 휴머니티에 대한 드라마를 쓰려 했다. 내가 기획했던 <사냥하는, 밤>은 단순한 자경단 드라마가 아니었다. 자경단 콘셉트를 지닌 드라마는 세상에 널리지 않았던가.
2019년 늦여름에 시작해 2020년 봄이 될 때까지, 푸른날 엔터테인먼트에서 벌인 악전고투가 내가 뭘 남겼는지는 모르겠다. 사람에게 시달렸고, 마감에 쫓기며 초조해했었다. 입맛에 맞는 글을 써내려 끙끙 앓기도 했다. 좋은 경험이었던가? 어떤 경험이든, 약으로 쓰려는 마음가짐은 나쁜 경험조차 빛나게 만드는 법이다.
본부장에게는 4월에 전화가 왔다.
“회사가 드라마 제작부 전체를 정리해고 하는 중이에요. 나도 지금 나갈 판이고.”
본부장은 사표를 요구했다. 퇴직 통보는 석 달 전에 받아야 했고, 여러 부대 상황에 대해 따질 게 많았지만, 군더더기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사직서를 제출했다. 편성이 될 수준까지 기획을 밀어 올리지 못했다는 자괴감은, 나중에 드라마 작가들과의 모임을 가지면서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정말 많은 드라마들이 기획 단계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엎어졌고, 들어갔던 편성에서 빠지는 일도 빈번하며, 악덕 대표의 횡포로 회사에 물리게 된 원고를 위해 소송을 감당하는 작가도 있었다. 드라마와 영화는 상당한 자본이 투입되는 사업이었다. 많은 간섭은 필연이었고, 거기에 요구되는 작가적 덕목도 다른 장르와는 달랐다. 입맛에 잘 맞추는 작가여야겠지만, 작가의 카운터 파트너들도 존중과 함께 공통분모를 늘려나가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지닌 분들이어야겠다. 내 첫 드라마 제작사에서 만난 분들은 그러질 못했다.
드라마 기획안에 매달려 있던 열 달 동안, 성과들이 적지 않았다.
2020년에 희곡 <이제 우리 노래를 들어라>로 웅진문학상 희곡 부문을 수상했다. 단편소설 「먼 데에서의 귀환」을 같이 내어 둘 다 각각 당선되었는데, 희곡에서는 따로 줄 사람이 없어 내게 희곡상이 왔다는 뒷얘기를 들었다.
대전대학교를 다닐 때 흥이 돋아 짧게 썼던 A4 1장짜리 소설 「새로운 취미」로는 문학나무 스마트소설을 수상했다. 여전히 극단 셰익스피어를 통해 살롱 뮤지컬 <초콜릿 하우스>를 공연했으며, 난 방금 해직당한 상태였다.
내 인생 가장 달콤했던 정규직의 삶 열 달이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