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 19 : 네가 지닌 동전을 세어보아라
총을 들었는데, 바닥에 칼이 보이면 그것마저 얼른 집어 들라는 얘기를 했었다.
방패와 칼을 들었는데, 그중 하나를 바닥에 떨어뜨리면 어찌해야 할까?
일단 손에 든 걸 바짝 들어야 한다. 양손으로 꽉! 방패로 찍던가, 칼을 휘둘러라. 무조건 이겨야 한다. 이 전장에서 패배는 곧 죽음이니까.
2020년 퇴사 이후 정신줄을 붙잡긴 쉽지 않았다. 실업수당을 신청하고는 망가진 기획안을 나 홀로 수습하려 두어 달 버둥거렸다. 그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열 달 동안 내놓은 버전이 7개였다. 그 사이에 여기 골몰했던 내 정신도 피폐해져 있었다.
새로운 게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각 버전에 대한 분석이나 차이점 구별도 잘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사냥하는, 밤>이라는 아이템에 정수리까지 잠긴 상태였고, 뭔가를 파악하고 분석하려면 그것과 건강한 거리를 둬야 하는 법이었다.
드라마 기획안 런칭을 바닥에 떨어뜨렸는가?
다른 손에 내가 뭘 들었던지를 떠올릴 일이다.
단편은 그때까지 써놓은 게 일곱 편 정도 있었다. 「고리」,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 「인터, 뷰」, 「머나먼 동방」, 「아르논 테오라의 우아한 점심」, 「포이즌 아이비」, 「소설을 쓰다」였는데, 몇 편은 괜찮았고, 몇 편은 습작에 머물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전체를 다시 읽으면서 각 작품의 등급을 매겼고, 고친 뒤 한참 두고 다시 읽어 각 작품이 좀 더 나아졌음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새 단편소설을 구상했다. 「기차로」는 제목과 한 문단만 써놓았던, 아직 씨앗 상태의 작품이었다.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늘 저걸 마저 써야 하는데 싶었고, 퇴사 이후 「기차로」를 끝냈다. 아이를 유산한 젊은 부부가 묘한 거리감으로 인해 서로에게 소원해지는 과정을 다루었는데, 기차에 뛰어들려 했던 소녀가 그들 부부의 삶에 끼어들며 변화가 이는 하룻밤이 소설의 내용이다.
「더 먼 곳에서의 귀환」은 나로 119호를 타고 우주로 나아가려는 소녀에 대한 소설이다. 소녀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기일에 돌아온다고 믿으며 하늘로 귀환 신호를 쏘아 올린다. 제사를 지낸 밤 아버지가 소녀를 찾아왔다가 떠나가고, 새벽녘 마당에 나앉은 소녀는 어머니가 아직 어린 동생에게 젖을 먹이는 소리를 들으며 낯설어진 마당을 돌아본다. 나는 내 아들을 낳았던 대전 변동의 주택가를 모티브 삼아 아빠에게 손을 내뻗는 소녀를 생각했었다. 인물을 오래 떠올리지 않아도 이야기가 풍성하게 뻗어 나오게 할 방법을 배운 작품이었다.
희곡은 <두 여자 이야기>와 <밤이여 나뉘어라>와 <상해 임정 최후의 날>과 <이제 바다로 가자>까지 4편이 남아 있었다. <상해 임정 최후의 날>은 대전연극협회의 제안으로 썼지만 대전시의회에서 예산 편성을 해주지 않아 무산된 프로젝트의 부산물이었다.
결국, 길게 끌고 나갈 프로젝트를 가져야 했다. 계속 <사냥하는, 밤>에 함몰되어 있을 순 없었고, 다른 모퉁이를 모색해야 할 시기였다. 우선은 <강철로 된 무지개>를 만졌다. 벽산희곡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이 정도 상황을 내고 그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소설을 통해 타개책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고치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닷새쯤 걸렸던 것 같다. 애당초 희곡을 쓸 때 잡아놓은 글 타래가 있었고, 그걸 주축으로 이야기들을 붙여나갔다. 『강철로 된 무지개』를 장르 문학 공모전 몇 곳에 내고는 잊어버렸다. 당선 전화는 11월에나 왔다.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기에 어떤 공모전인지 다시 물을 지경이었다. 리디와 쇼박스와 샘앤파커스 출판사가 함께 만든 K-스토리 공모전이었다.
시상식을 다녀온 뒤 원고를 다시 읽었는데,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장점을 보여 뽑혔는지 짐작도 안 가는 형편없는 글이었다. 정신없이 만들어서 내느라 꼼꼼히 보지 못했는데, 오타나 비문은 넘기더라도 이야기의 빈 곳과 연계되지 않는 서술이 너무나도 많았다. 당선이 부끄럽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 달을 들여 원고를 완전히 다시 썼다. 큰 얼개가 바뀌진 않았지만, 삭제된 부분과 새롭게 의미 지은 부분이 꽤 되었다.
『강철로 된 무지개』은 책을 내면서 많은 기대를 가졌던 작품이었다. 샘앤파커스는 꽤 큰 출판사였고, 이북은 리디가, 영상화 판권 우선 협상은 쇼박스가 갖고 있었다. 난 『강철로 된 무지개』가 꽤 괜찮은 영화 기반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판권 제안은 들어오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위축된 투자 때문일까. 하지만 가장 큰 책임은 『강철로 된 무지개』로 독자를 설득하지 못한 나에게 있을 것이다.
2020년은 『검은 물 아래에』를 다시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푸른날 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하기 전에 『검은 물 아래에』를 시작해 A4 370장을 써두었었다.
그건 어떤 장면에서 출발했는데, 거대한 목선이 물속으로 침몰하고, 거길 향해 소년 하나가 헤엄쳐 가는 광경이었다. 어릴 적 봤던 뤽 베송의 <그랑 블루>에서 출발한 이미지였을까. 그 광경은 그즈음 썼던 <이제 바다로 가자>에서 이순신의 몸종인 해가 물속에서 노래하는 소리를 향해 헤엄치는 장면으로 쓰였지만, 여전히 그 장면은 다른 거대한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를 알아내야 했다. 저 침몰하는 목선은 무엇이고, 헤엄치는 저 소년은 누구인가?
목선이니 조선시대 이전이겠고, 신라까지 올라가진 않을 것 같았다. 목포에 가서 신안선을 보고 나서야 그게 고려시대 배겠다 싶었다.
목선을 향해 헤엄쳐 간 소년이 소설의 핵심인물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소년이 주인공이라 넘겨짚었던 게 패착이었다. 소년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전체 이야기가 잡히질 않았다. 되는대로 떠오르는 대로 무작정 아무 서술이나 썼다. 땡볕 아래를 걷는 아버지와 아들 이야기, 발이 부르튼 아이를 우마차에 뉘이고 발에 물을 부어주었던 이가 토지신이었다는 이야기, 배 위에서 벌어지는 험악한 싸움과 당시 뱃사람들이 가졌던 꿈과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50여 장 썼다. 그리고 그 소년이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의 가장 큰 난관이자 빌런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에야 소년 해문이 아니라, 짜오스가 주인공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죽어라고 써낸 게 그 370장이었다. 그걸 다시 읽고는 고민이 커졌다. 결국 『뿌리』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시간을 두고 읽어보니, 장점만큼이나 단점이 컸다. 결국 장편소설은 다시 쓰기라는 과정을 꼭 거쳐야 하는 것 같다. 나라는 작가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다시 다 버리고, 『검은 물 아래에』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작업은 2020년부터 2024년 4월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 사이에 여러 일들을 감당할 기회들이 주어지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막바지인 2021년에 문체부 산하 국정홍보처에서 정책라디오 책임 작가를 지내는 행운이 있었다. 2021년에도 <초콜릿 하우스>를 공연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제대로 된 공연을 해나가기 어려웠다.
「오래된 미래」는 대전대 소성창작심화 수업의 기말고사였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된 시기라 그랬는지, 박지영(가명) 교수님은 소설의 소재를 마이클 잭슨으로 정했다. 나는 잭슨보다는 그의 노래를 다루고 싶었다. 대여섯 개의 노래 가사들을 직접 인용해 과제 요건을 만족시켰는데, 정작 이야기의 얼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으로 잡았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의로운 사람 롯은 천사들의 방문을 받아 죽음을 피하게 되는데, 나는 우리 시대가 다 끝나 없어져 흔적만 남은 먼 미래를 가정해 SF로 이야기를 풀었다. 「오래된 미래」는 꽤 괜찮은 소설이었는데, 여러 SF 공모전 예선에 오를 뿐 성과를 내지 못했었다. 그게 다산북스와 밀리의 서재에서 공동으로 주관한 SF 오디오 스토리 어워즈에 우수상으로 뽑혔다. 대상을 받은 「온세상의 세이지」를 표제작으로 한 모음집에 「오래된 미래」를 실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다산북스에서 상을 받은 걸 기회로 편집자에게 일부 원고를 검토받을 수 있냐고 제안드렸는데, 흔쾌히 수락하셔서 지니고 있던 원고를 보내드렸다. 『검은 물 아래에』와 『밤의 색깔들』을 드렸지만, 다산북스에서 출간할 기회를 얻진 못했다. 하지만 원고가 편집자를 통해 퇴사해 마이디어북스를 세운 이호빈 팀장에게 넘어가 『나쁜 검사들』을 출간할 기회로 이어졌다. 결국은 두드리는 사람에게 기회가 열린다는 생각이 든다.
2022년 말미에는 제11회 고양행주문학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먼 데에서의 귀환」은 뭉클한 애틋함을 지닌 글이었고, 고양에서 인정받아 굉장히 기뻤다. 우찬제 평론가와 천운영 소설가가 심사하셨고, 우찬제 선생님께서 시상식까지 와서 작품을 크게 상찬 해주셔서 감격했다.
여러 좋은 일이 있었지만, 아직 나는 내 글로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신 5%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들을 설득할까. 어떤 글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을까. 그러던 중에, 사거리 픽쳐스 민형식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작가님, 요새 바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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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세 작가입니다.
늘 여는 글쓰기 수업이지만, 이번엔 브런치를 통해서도 홍보를 하려 합니다. 10월말부터 이뤄질 수업은 세 곳에서 진행됩니다.
<서울, 신춘문예 대비반> : 온라인 수업 / 매주 목요일 / 19시~22시 / 10월 24일 밤 예비 온라인모임 / 10월 31일~11월 28일까지 매주 목요일마다 5회차 수업 / 수업료 22만원 / 단편소설 및 희곡 부문
근래 뽑힌 괜찮은 신춘문예 작품을 함께 읽고, 수준을 감각합니다.
신춘문예에 제출할 참가자들의 작품을 함께 읽고 합평한 뒤, 개선점을 찾아 작품을 고칩니다. 1회 수업 당 2작품을 합평하고, 필요할 경우 추가로 1:1 코칭을 해드립니다.
등단까지, 동반합니다.
<대전, 신춘문예 대비반> : 오프라인 수업 / 매주 토요일 / 18시~21시 / 10월 21일 밤 예비 온라인모임 / 10월 26일~11월 30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6회차 수업 / 수업료 25만원 / 단편소설 및 희곡 부문
근래 뽑힌 괜찮은 신춘문예 작품을 함께 읽고, 등단의 허들을 감지합니다.
서울과 마찬가지로 신춘문예에 제출할 참가자들의 작품을 함께 읽고 합평한 뒤, 개선점을 찾아 작품을 고칩니다. 1회 수업 당 2작품을 합평하고, 필요할 경우 추가로 1:1 코칭을 해드립니다.
더 나은 작품으로 도전할 수 있게 만듭니다.
<세종, 글쓰기의 해답> : 온오프라인 병행 수업 / 매주 토요일 / 13시~16시 / 10월 23일 밤 예비 오프라인모임 / 10월 26일~11월 30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6회차 수업 / 수업료 25만원 / 글쓰기 모든 부문 영상화 포함
제가 만든 글쓰기의 문제들을 매주 일요일에 받고, 목요일에 제출하며, 토요일에 함께 각자의 제출한 글을 합평합니다. 글쓰기가 나아지려면 더 나은 교사와 적절한 평을 해주는 동료가 필수입니다. 함께 고독하고 어려운 글쓰기의 과정을 겪어나가다 보면, 더 광활한 글쓰기의 영토를 발 아래 두시게 될 겁니다. 그리 오르다 보면, 등단은 과정 중에 있을 수밖에 없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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