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중세 Oct 19. 2024

Drowning man

Chap. 21 : 기준에 대하여 - 상

  수업을 할 때마다 꼭 이런 질문을 한다.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인가요?”

  취향을 물으려는 게 아니다. 나는 작가란 모름지기 글에 감동했던 경험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예술적 감흥을 춤이나 노래나 그림이나 글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저마다 각각 잘 하는 분야를 타고나긴 하지만, 그걸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마저 타고나는 건 아니다. 네 살 먹은 아기는 둘러싼 어른들이 노래하고 박수 치는 걸 보면서 춤을 추며 재롱을 부린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겪었다고 다들 댄서를 욕망하진 않는다. 내 생각에 그런 욕망은, 그걸 정말 잘 하는 어떤 누군가를 보며 정신적 정서적 충격을 받았을 때 일어난다.


  나에게 그런 충격을 준 책이 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황순원의 「소나기」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그리고 김유정의 「봄봄」을 여러 차례 읽은 것 같은데, 그건 청소년기에 겪은 일이었다. 좀 더 어릴 때 몇몇 책을 무서워 했었다는 생각이 들자, 그 책들이 내게 영향을 미쳤구나 싶었다. 정말 어릴 때 사들였던 책 중엔 책의 앞뒤를 오가며 경로를 선택하는 게임북들이 있었고, 추리소설을 어린이용으로 만들어낸 책들이 있었다. 거기에서 한두 살 더 먹으며 내가 모았던 책들은, 해문출판사의 아가사 크리스티 시리즈였다. 그중에서 특히 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애클로이드 살인 사건』을 무서워 했는데, 표지도 그렇거니와 그 소설이 지닌 강렬함에 압도된 탓이었다. 코넌 도일의 「베스커빌 가의 개」도 무서웠고, 그렇기에 아르센 루펭 시리즈는 다소 시시했다. 그 중 최고이자 최악은 엘리리 퀸의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이었고, 지금도 가끔 십자가를 보면, 작품에서의 삼거리와 윗부분이 잘린 십자가와 거기 묶였던 목 잘린 시신이 떠오른다. 지금은 할 수 없는 트릭이지만, 당대엔 정말 놀라운 방식의 범죄 소설이었다.


  내가 하고픈 말은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을 격동시키고, 놀라움에 입을 벌어지게 만든 작품을 만난 경험을 지녔다는 거다. 그 만남을 통해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는 자기만의 마디, 자기만의 먹물, 자기만의 쓰고픈 지점을 자기도 모르게 지니게 된다. 결국 자신을 설득시키고 감동케 만든 작품이, 그 사람이 쓰고자 하는 작품의 방향이 된다.


  한편으로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 그걸 묻는 까닭은, 그것으로 자신의 기준을 삼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를 설득하고 나를 작가로 살고싶다는 욕망을 갖게 한 그 작품보다 더 나은 글을 쓰겠다는 목표를 지니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기준들을 공개하려 한다. 이 작품들을 뛰어넘는 욕망을 지닌 건 아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내가 어떤 경향의 작품을 썼는지를 어느 정도 아시리라 믿는다. 지금 작업실에 자리한 2,200권의 책 중에서 뽑은 33개의 작품을 볼 때, 이 책들이 내 뿌리이자 바탕을 이루었구나, 내가 구축한 별 볼 일 없는 문학적 영토의 첫 출발지점이었구나 싶다. 여전히 나는 이 책들을 뛰어넘고 싶다. 그러면서도 내 근간에 이 작품들과 이걸 쓴 작가들이 자리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다. 그건 그들에 대한 내 존중을 표하는 겸허한 행위이기도 하다.


  우선은 목록의 일부를 올리겠다. 나머지는 이 뒤에 공개하겠다. 그리고 좋은 글쓰기 작법서에 대한 이야기도 다른 챕터에서 하겠다. 글쓰기를 진지하게 대하는 이에겐 늘 궁금한 주제이기도 하니까.     



1. 한강, 『소년이 온다』, 문학과지성사, 2014.

  이 글을 쓰는 지금,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얼마나 대단한 업적이자, 영향력인가. 80년 광주를 다룬 소설 중 가장 뜨겁고 놀라운 이 장편소설은 그 해를 떠나 2010년도에 읽은 모든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이었다.

  안타깝게도, 아직 『흰』은 읽어보지 못했다. 다른 작가들의 탁월한 업적을 기릴 때마다 『소년이 온다』를 언급하는 내게, 많은 분들이 『흰』에 대한 소감을 물었으니, 분명 뛰어난 작품이리라.

  독자는 좋은 작품을 통해 읽기 전과 읽고나서의 삶이 바뀐다. 이 글이 광주에 대한 누군가의 관점을 바꾸는 글은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광주를 대강 알던 이는 이 독서를 통해 광주를 깊이 이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문장은 단단하고, 문장 사이에는 여백이 자리한다. 독자는 그 여백에 자기 생각이 고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대화문과 서술문 사이에 문장 부호를 쓰지 않은 면은 코멕 매카시와 같다. 그게 이 소설을 더 건조하게 만든다. 실제 있었던 고통스러운 서사를 그 자체로 바라보게 만드는 명료함을 지님으로써, 서사는 더 아프게 다가온다.     


2. 필립 로스, 정영목 옮김, 『에브리맨』, 문학과지성사, 2009.

  독자는 때때로, 서술자와 저자를 헛갈리곤 한다. 특히나 1인칭 소설이 자전적 요소를 지녔을 땐 더더욱 그렇다. 필립 로스가 쓴 『에브리맨』 얘기다.

  결국은 나이듦 앞에 무너지는 모든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면서도 성공한 사내의 이면에 대한 소설이며, 한 인간이 지닌 다채로운 측면들에 대한 작품이다. 모두를 위한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한 남성이자 작가로, 이 소설만큼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은 작가는 없었다.     


3. 제임스 설터, 박상미 옮김, 『어젯밤』, 마음산책, 2010.

  「어젯밤」을 읽었을 때에 처음 느꼈던 충격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세 사람의 관계를 서술을 읽어가며 자연스레 이해하게 만든 출중한 실력도 실력이지만, 안락사와 이에 대한 파국적인 결말로 이어지는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든다. 매우 기묘한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다룬 「알링턴 국립묘지」 또한 수업에서 즐겨 다루는 단편소설이다.     


4. 손원평, 『아몬드』, 창비, 2017.

  47쇄를 찍은 이 장편소설을 굳이 칭찬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이 겪은 끔찍한 일과, 거기에서 버팀목이 되어주고, 디딤돌이 되어주는 사람들을 매우 간결한 서술로 잘 풀어냈다. 좋은 청소년 소설이면서 동시에 모든 연령들이 즐길 수 있게 잘 쓴 소설이다. 대중을 상대로 해서는 이렇게 써야 한다는 일정한 기준을 일러주는 작품이어서 포함시켰다.     


5. 이기호, 『김 박사는 누구인가?』, 문학과지성사, 2013.

  한 때, 한국문학의 두 축은 김애란과 이기호였다. 10여 년 전에 나는 그렇게 믿었었다. 놀라운 장편소설 『차남들의 세계사』가 아닌, 『김 박사는 누구인가?』를 뽑은 건, 『차남들의 세계사』를 통해 장편소설 또한 매우 잘 쓰는 작가임을 증명한 이기호임에도 그의 장점은 단편소설에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기호 문학은 소소함과 너스레를 겉으로 하여, 속에 든 둔중하고 버거운 진실을 감싼다. 잘 읽히지만 소화하긴 어렵고, 맥락을 이해한 듯하지만 다시 살펴보게 만든다. 한편으로 한국적 단편소설이 으레 지녀야 할 포맷과 방식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전범이 될 만하다. 표제작인 「김 박사는 누구인가?」와 「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 「이정-저기 사람이 나무처럼 걸어간다2」를 깊이 읽었다.     


6. 코멕 매카시, 임재서 옮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사피엔스, 2008.

  이 책은 아니었다. 원고지에 책 전체를 필사한 책은 『핏빛 자오선』이었다. 1,000자 원고지에 엄청나게 많은 분량의 글자를 꾹꾹 써넣으며, 코멕 매카시의 문장을 내 안에 들이려 무진 애를 썼었다.

  그렇다면 왜 『핏빛 자오선』이 아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인가? 일단 더 간결하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더 간결할 수 있다면 그리 해야 한다. 매우 빼어난 묘사 솜씨를 지녔지만, 어느 부분에선 지나치다. 빌런들도 그러하다. 판사는 안톤 시거보다 장황하다. 그는 자연 그 자체를 상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더 또렷했어야 했다. 안톤 시거는 명확하다. 그의 규칙과 방식은 매우 정밀하며, 그 자신마저도 거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또한 주인공인 소년과 르웰린/에드 톰 벨의 역할도 흐릿함에 있어 차이를 지닌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매우 탁월하다. 짧은 대화문과 속도감, 코멕 매카시 특유의 건조한 문체. 그걸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거세된 문장부호들. 내 문장들은 여기에 매우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매카시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7. 로맹 가리, 백선희 옮김, 『레이디 L』, 마음산책, 2013.

  이 책을 어떤 경로로 알게 되었나 궁금하다. 나는 로맹 가리의 단편소설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레이디 L』을 곧장 사들이진 않았을 거다. 어디 다른 누구에게 추천을 받았더라면 기억에 남았을 텐데.

  지금 떠올려보면, 이 책은 에이모 토울즈의 『모스크바의 신사』와 무척 닮아 있다. 서사 전반에 흐르는 귀족적 분위기, (자발적 혹은 타의적) 감금이라는 상황, 그리고 어떻게 전환될지 예측이 안 되는 서사에 이르기까지.

  로맹 가리의 다른 책들에 비해 『레이디 L』은 매우 함축적이다. 한편으로 이만큼의 충격을 주는 결말 또한 흔치 않다. 『레이디 L』을 통해 내가 쓸 수 없는 분야의 탁월함을 배웠다.     


8. 이안 매큐언, 박경희 옮김, 『암스테르담』, media 2.0, 2008.

  재미있는 글을 원하는 사람에게 추천할 책은, 사실 많지 않다. 『암스테르담』이 절판되었을 때 그래서 낙담했고, 복간되었을 때 그래서 기뻤다.

  『암스테르담』의 재미는 블랙 유머에 있다. 사회 상층부에 자리한 인물들이 지닌 허위가 아주 흥미로운 과정을 통해 폭로된다. 2000년대에 영화로 만들어질 아주 좋은 구성과 요소들로 이 얇은 책은 꽉 차 있다. 놀라운 여성이 숨지고, 그녀와 관계했던 세 명의 남자가 장례식장에서 만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툼! 그들이 찾으려는 건 대체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왜 이 책의 제목은 암스테르담인가? 반전에 유의하라. 그대가 앉은 의자가 뒤집어질지도 모르니까.     


9. 토니 모리슨, 임애주 옮김, 『술라』, 들녘, 2005.

  『술라』를 읽고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백인은 흑인과 절대로 융화될 수 없다. 그리고 선인을 주인공으로 해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마저도.

  사실은 술라가 주인공이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내적 주인공은 따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술라가 주인공이다. 강렬한 여인이라고 하면, 나는 『술라』에서의 술라가 떠오른다.

  토니 모리슨의 소설은 이해가 어렵다. 대중문화로서의 미국 문화가 아닌, 미국에서의 실제적인 삶을 알아야 토니 모리슨 소설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그중에서 흑인의 삶과 그들이 살았던 방식을 알아야 한다. 그 단계를 안다면, 그녀의 문학은 당신의 세계를 깊게 만들게 될 것이다. 그걸 가장 강력하게 느낀 책이 바로 『술라』였다.     


10. 미나토 가나에, 김선영 옮김, 『고백』, 비채, 2009.

  1인칭의 고백적인 문체로 이뤄진 『고백』은 폭력의 순환에 대해, 인간이 지닌 악한 면에 대해 썼다. 한 아이의 죽음은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보복이 만들어낸 고리는 스스로 증폭하며 커져나간다. 여기에는 치밀하게 미리 엮어낸 인물들 간의 전사(前事)가 긴요하게 작용한다. 그러면서도 이 전사들을 미리 말해두지 않고, 필요한 부분에서 툭툭 던지는 방식이 매우 영리하게 쓰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막판에 사건이 증폭되는 과정에는 이스트를 너무 많이 넣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전반적으로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과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실력이 무척 좋았다.     


11. 허먼 멜빌, 모리스 포이에 그림, 김석희 옮김, 『모비 딕』, 작가정신, 2011.

  허먼 멜빌이 생전에 『모비 딕』을 몇 권 팔았을까? 그건 내가 즐겨 묻는 질문 중 하나다.

  실제 포경선에서 선원 생활을 했던 멜빌은 우체국에서 일하면서, 하얀 고래에 집착하는 에이허브 선장을 그린 장편소설 『모비 딕』을 썼다. 초판은 3,000부 인쇄했으나 판매는 500부 가량 되었다. 생각해보라. 2,500부의 두꺼운 소설이 창고 가득 쌓였을 광경을.

  작가정신이 내놓은 증보판엔 멋진 그림이 그득하다. 모리스 포이에가 그린 그름들을 통해, 멜빌의 묘사를 좀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포경선을, 그것도 19세기 미국 배를 타본 건 아닐 테니, 그림의 재구성은 매우 훌륭한 도움을 준다. 그림들엔 서술과 묘사가 되지 않은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어 이해를 크게 돕는다. 그림만 쭉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한강처럼 생전에 빛을 보는 작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멜빌은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써놓은 글을 읽어보면 안다. 그가 결과가 아닌, 과정을 중시했음을. 그가 글쓰기 자체에 푹 빠졌다는 것을.

  그래, 그거면 된다. 그거 하나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