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 22 : 기준에 대하여 - 중
이번에 선정된 책들은 내가 두 번씩 읽었다는 특징을 지녔다. 그렇다면, 제목의 중은 中이 아닌 緟인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책들을 여러분께 기쁜 마음으로 알려드린다. 내가 책을 두 번이나 읽는 건, 그리 흔치 않은 일이기에.
1. 줄리언 반스, 최세희 옮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다산책방, 2012.
이 책의 미덕은 빠르게 읽힌다는 점이다. 실제 분량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줄리언 반스가 말했듯, 두 번 읽어야 하는 소설이다. 마지막에 덮쳐오는 충격이 뭔지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 도로 첫 장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글인 셈이다.
줄리언 반스가 갖춘 품격, 너무 무겁지도 지나치게 경쾌하지도 않은 그 적절한 무게를,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글을 써내려온 방식을 사랑한다. 그의 글을 통해 많이 배웠지만, 그 중 으뜸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이다.
2. 힐러리 맨틀, 하윤숙 옮김, 『울프홀』, 올, 2010.
왜 이 책을 2010년도에 곧장 읽지 않았을까. 내 관념 속의 역사소설의 첫 기틀은 김성일과 미야기타니 마사미쓰가 세웠다. 하지만 거기에 거대한 변혁을 가져온 건 힐러리 맨틀이었다. 역사소설을 쓰면서 거기에 자신이 아는 모든 걸 다 담지 않는 걸, 꼭 모든 시기들을 폭넓고 깊게 다룰 필요가 없다는 걸 힐러리 맨틀을 통해 배웠다. 토머스가 주교의 몰락을 보는 첫 대목부터, 그가 울프홀로 걸어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단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모든 대목이 대리석과도 같으며, 거기에는 옛 로마인이 새겨넣었을 것 같은 가늠할 수 없는 의미들이 가득하다.
3. 돈 윈슬로, 김경숙 옮김, 『개의 힘』, 황금가지, 2012.
작가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책의 목록을 길게 늘어놓는 일은 잡다하니 많다. 나 또한 데미안이니 양철북이니 떠든 적도 두어 번 있다. 그 책들을 앞에 내놓는 이유는, 돈 윈슬로라는 작가를 내놓기 싫기 때문이다. 오오, 누구도 알아선 안 돼.
넷플릭스를 살린 시리즈는 초반의 <하우스 오브 카드>를 지나, <나르코스>였다. 하지만 나는 <나르코스>가 시시했다. 『개의 힘』을 읽은 사람은 <나르코스>에 심드렁할 수밖에 없다. 멕시코 갱단에게 고문 당하고 죽은 자와 몰살당한 그의 가족을 보는 FBI 수사관, 갱단 두목을 잡기 위해 활용되는 고급 콜걸, 갱단 두목이 바닥에서부터 그 위로 올라가는 처절한 이 세 토막의 이야기가 두 권을 통해 흘러나간다. 밤을 책임질 수 없고, 삶이 통제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개의 힘』은 강렬하다.
4. 김애란, 『침이 고인다』, 문학과지성사, 2007.
이기호 작가와 함께 난 김애란 작가를 언제나 첫손에 꼽았다. 등단작부터 좋아했고, 장편에 있어서는 갸우뚱하기도 했지만, 김애란 작가에게 경탄을 보내게 된 건, 『침이 고인다』에 수록된 「칼자국」을 읽고나서였다. 얼마나 놀라운 소설인가. 지구를 떠나 저 멀리 가버린 엄마와 검은 내 안을 문지르며 내려갈 사과 한 조각과 서술자인 내가 품은 새 생명이라는 소재가 소설 막판에 이리 휘몰아칠 줄이야. 한 편의 단편소설을 함께 읽을 때, 나는 고민 없이 「칼자국」을 추천한다.
5. 로버트 해리스, 김흥래 옮김, 『당신들의 조국』, 랜덤하우스, 2006.
우선, 이 영국 아저씨의 한국어판 책이 작업실에 전부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일반적인 역사소설인 다른 책들과 달리, 『당신들의 조국』은 가상역사소설이다. (복거일을 언급하는 건, 로버트 해리스에게 크나큰 실례이리라)
독일은 영국을 상대로 승리했고, 나치 깃발은 유럽 전역에 휘날리고 있다. 히틀러 정권의 지배 하의 1964년, 케네디 대통령은 히틀러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베를린을 방문하고, 그 사이에 고위 나치들의 시신이 발견된다. 사건을 수사하던 사법경찰 크사비어 마르크는 게슈타포를 통해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압박을 받게 된다.
이 소설만큼 좋았던 소설이 『아크엔젤』과 『고스트 라이터』였다. 『당신들의 조국』만큼 본격적인 가상역사소설은 아니지만, 조금씩 핀트가 바뀌어진 기획과 멋진 상상력이었다. 겸하여 추천한다.
6. 조르지 아마두, 안정효 옮김,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 서커스, 2007.
가장 잘 쓴 소설을 고르라면 여러 편을 집었다 놓아야겠지만, 가장 농익은 소설을 말하라면 몇 편 되지 않는다. 마르케스가 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과 더불어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일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관능적인 여인 가브리엘라의 존재로 인해 유쾌한 재난에 빠지는 한 마을. 단순히 한 여자와 거기에 환장한 남정네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걸 통해 지주들과 신흥세력들의 이야기. 남미의 복잡한 상황들이 강물처럼 흘러나간다. 테임즈 강이나 센 강처럼 시시한 물결이 아니다. 대륙을 가르는 거대한 물결처럼, 조르지 아마두의 탁월한 소설 『가브리엘라, 정향과 계피』는 당신을 가로지를 것이다.
7. 미야기타니 마사미쓰, 신봉승·김하중 옮김, 『안자』, 한경, 1995.
절판된 책을 읽어보라며 추천하는 짓을 악취미라 욕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을 빼놓을 순 없다.
신봉승 작가의 책을 읽은 적은 있지만, 기억에 딱히 남는 건 없다.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을 연재한 드라마 작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가 내 기억에 남는 작가인 건, 미야기타니 마사미쓰의 걸출한 작품 『안자』를 번역했기 때문이다.
안영은 제갈량이 그의 마차를 끌기만 해도 좋겠다고 할 정도로 숭앙했던 인물이다. 『안자』에서 안자는 아버지인 안약과 아들인 안영 두 사람을 일컫는다. 제갈량의 존경을 받았던 사람은 복숭아 하나로 세 장사를 죽인 걸로 유명한 안영이었고, 제갈량처럼 제나라의 뛰어난 재상이었다.
단순히 두 부자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춘추시대의 상황,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는 정치적 배경, 그리고 그걸 담담히 들려주는 단순하고 고졸한 문장들이 자리한다.
다시 들춰보아도, 여전히 놀랍다.
8.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권상미 옮김, 『올리브 키터리지』, 문학동네, 2010.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읽고 싶은 책……이 내 책이면 좋겠지만, 모두가 읽을 법한 책은 따로 있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미국 시골 마을에서 수학 선생님을 했던 올리브를 주인공으로 한다. 올리브는 괴팍한 사람이고, 약사이자 남편인 헨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걸로 유명하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올리브가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차차 깨닫게 된다. 어떤 슬픔이 사람을 뒤틀리게 만드는지, 그런 뒤틀림이 다른 어떤 뒤틀림을 만드는지. 그러면서도 결국 그러한 뒤틀림을 다시 펴지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까지도, 책에는 실려 있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각각 독립된 단편소설 13편으로 이뤄져 있다. 올리브 키터리지가 모든 단편의 주인공이진 않다. 하지만 이야기엔 모두 올리브가 닿아 있다. 결국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내는 인물이 바로 올리브인 셈이다.
드라마로도 제작된 이 탁월한 장편소설에서, 내가 좋아하는 단편은 꽤나 많다. 가슴이 아려오는 「약국」, 격렬한 결말로 끝내 벅차오르게 만드는 「밀물」, 미묘한 맛을 안겨주는 「피아노 연주자」, 아들의 결혼식이라는 소재로 새롭게 미국인을 들여다보는 「튤립」, 작품 전개 속에서 커다란 미소를 짓게 만드는 「범죄자」에 이르기까지.
다른 수강생들과 함께 이 책을 읽게 되는 날이 얼른 왔음 좋겠다.
9. 닐 게이먼, 이수현 옮김, 『샌드맨』, 버티고, 2009.
전세계의 공항엔 닐 게이먼의 동상을 세워야 한다. 왜냐. 그는 위대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얼마만큼 위대하기에 그리 호들갑을 떠느냐? 그는 사실상 하나의 거대한 왕국을 세웠고, 그 왕국들은 호메로스부터 단테와 괴테를 지나 현대의 무수한 그래픽노블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전무후무한 규모의 대규모 통합의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 놀라운 작가가 현대판 진흥하는 신들과 몰락한 신들 사이의 전쟁을 다룬 『신들의 전쟁』을 쓴 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총명한 닐 게이먼은 세계의 모든 신화를 가져와서 가장 아메리칸한 방법으로 자기만의 신화를 빚어낸다. 누가 자기 주인공을 죽이는가? 위대한 작가들만이 그런 결말을 꿈꾸었고, 멋지게 실현시켰다. 하지만 자기가 몇 해 전에 써낸 작품에서 힌트를 가져와 대서사시의 거대한 연유를 삼고, 마침내 통합시켜 끔찍할 정도로 놀라운 전환을 만들어내는 건, 오직 닐 게이먼만이 가능하다.
10. 도나토 카리시, 이승재 옮김, 『속삭이는 자』, 시공사, 2011.
도나토 카리시의 『속삭이는 자』의 충격에 가장 근접했던 작가는 토마스 해리스였다. 『레드 드래건』과 『양들의 침묵』 정도만이 『속삭이는 자』에 비슷했다. 도나토 카리시 또한 토마스 해리스를 읽고 자랐으리라. 하지만 그는 토마스 해리스를 끝장내버렸다. 후배가 선배를 극복해내는 모습은 얼마나 대단한가. 그것도 전설을 상대로 말이다.
스포일러가 될 내용은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이 소설은 가장 뛰어난 추리소설은 아닐 것이다. 한편으로 가장 실제에 가까운 범죄소설 또한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레드 드래건』의 끔찍함과 『양들의 침묵』의 섬뜩함을 아득하게 뛰어넘는다. 가장 소름 끼치는 연쇄살인소설을 도나토 카리시는 썼다.
11. 스티븐 킹, 정진영 옮김, 『그것』, 황금가지, 2004.
바로 위에 쓴 『속삭이는 자』에 대해, 스티븐 킹은 이런 헌사를 보내지 않았을까. 잔혹함을 갖췄지만, 성숙함에 이르진 못했어!
킹은 『그것』을 썼기에, 그런 말을 할 자격을 지녔다.
광대가 나타나 아이들을 납치하는 초반부, 델리를 떠난 다섯 친구들은 유일하게 남은 친구가 보낸 소식을 받는다. 그것이 돌아왔어. 얼마나 놀랐는지 그 전화를 받은 한 친구는 즉시 자살한다.
여섯 친구가 어렸을 적에 광대에게 겪은 공포스러운 일과, 현재의 델리로 돌아온 다섯 친구가 광대를 상대할 방법을 찾는 두 갈래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서술된다. 『그것』은 단순히 무서운 소설이 아니다. 킹은 잔혹한 사건 위에 소년과 소녀가 각자의 유년시절에 자리했던 끔찍하고 두려운 일들을 극복해내는 과정을 그린다. 광대는 그런 근원적 공포를 자극하고, 두려움을 집어삼키며 커져가는 존재였던 것이다. 거기로부터 다섯 친구들은 광대를 이기는 방법을 찾아내어 간다.
이런 내용이 『그것』이 단순히 자극적인 호러 소설이 아님을 나타낸다. 광대를 그것이라 부르는 건 호그와트에서 볼드모트를 부르는 방식으로, 웃음을 주는 존재인 광대의 이면에서 끔찍한 냉담함을 뽑아내는 건 이후 <조커>로 발전해나갔다. 바탕을 마련한 건 늙었지만 여전히 강건한, 스티븐 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