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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Oct 03. 2024

Drowning man

Chap. 17 : 엄정화보다 영상화

  영상 글쓰기가 뭐인지를 생각해 본 건,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에 대한 에세이 때문이었다. 소설 『7년의 밤』이 화제라며, 드라마 PD들이 한국 소설답지 않게 ‘그림이 보인다’는 평을 했다는 대목에서 어랏 싶었다.


  그림이라.


  이 개념은, 굉장히 중요하다. 소설은 풍부한 연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글을 요구한다. 반면에 영상은 스크린 위에서의 명확한 재연이 가능한 글을 요구한다.


  영상 작가는 미리 본 자에 가깝다. 그는 영화를 미리 본 사람이다. 스크린에 뭐가 있고, 구도는 어떻게 인물의 표정과 대사는 어떤지를 미리 본 그가 정확하게 일러줘야 한다. 시나리오의 언어는 스크린에 대한 묘사로 이뤄진다.

  소설은 서술로 이뤄져 있으며, 묘사는 대상과 세계를 다소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에 그친다. 영상 작가는 머릿속 영상이 스크린에 어떻게 떠오르는지를 글로 정확하게 일러줘야 한다. 그는 영상화 참여자들의 머리에 같은 개념과 그림이 들어가게끔 글을 써야 한다.

  이런 개념은 2024년에 시나리오 <리카>를 쓰면서 명확해졌다. 하지만 그건 지금 풀어낼 이야기는 아니다.


  그림에 대해 생각하게 된 다른 계기는 다음 챕터에서 서술할 푸른날 엔터테인먼트(가칭)에서 일어났다. 내 기획안과 함께 소설과 희곡의 아이템들을 점검하던 이영환(가명) PD는 아직 출간하지 못한 『밤의 색깔들』을 무척 좋아했다. 이 PD는 영화 <북벌>(가칭) 제작부에 있던 사람이었다.

  “이게 쳅터들이 색깔 별로 있잖아요.”

  이 PD는 촬영 감독 몇몇의 이름을 대며, 그들이 이런 원고대로 촬영을 진행할 걸 무척 좋아할 거라고 말했다.

  “그림이 싸악, 보이잖아요.”


  그림이었다.


  많은 나날, 영상화에 대한 나의 관심은 내 소설에 대한 판권 판매에 그쳤었다. 영상과 관련된 작업을 본격적으로 해보진 않았고, 못 쓸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섣불리 덤빌 일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았다.


  그 생각은 어떤 공고를 보고 뒤바뀌었다.


  영화 제작사 사거리(가칭)가 기획 작가를 모집하는 공고였고, 이력서를 보내자 답장 메일이 왔다. 보낸 지 1시간도 안 되어 답장이 오는 건 처음이었다. 어떤 장르를 쓰는지, 첨부 파일에 소개된 이력 사항의 소설이나 희곡은 어떤 내용인지를 묻는 메일이었다. 이런 메일이 그날 저녁에 서너 번이 오가니, 벌써 자정이었다. 마지막 메일엔 애들을 재우고 오겠다며, 그 뒤로 통화가 괜찮은지가 적혀 있었다.


  자정 지나 시작된 통화는 2시가 넘어 끊어졌다. 사거리의 민형식(가명) 대표는 나와 비슷한 연배였고, 작은 영화를 만든 이후 머릿속에 든 기획을 시나리오로 만들어줄 작가를 찾는 중이었다. 나는 나만큼 일에 미친 사람이 처음이었고, 그 사실이 꽤나 반가웠다.


  며칠 뒤 서울역 2층 카페에서 처음 만난 이후, 사거리의 조지훈(가명) 실장이 합류하면서 모임은 여러 차례 이어졌다.


  묘한 건, 민 대표는 공고를 필름 메이커스에만 냈다는 것이다. 난 당시엔 필름 메이커스라는 사이트를 전혀 몰랐고, 그걸 스토리움에서만 봤다. 민 대표는 스토리움을 전혀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영화인 누군가가 올라온 공고를 복사해다가 스토리움에 올린 거였다.

  되려는 일은 안 하려 들어도 어차피 들어오고, 안 되는 일은 애를 써도 결국 성사되지 않는다. 일의 성립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나 혼자만으로는 결코 이뤄지지 않는다. 그 공고를 누군가 거기로 옮길 줄이야.


  민 대표가 고민하던 아이템은 자경단에 대한 것이었다. 그가 구상하던 자경단에는 다른 작품과는 다른 경향성이 있었고, 내가 지닌 성향이 그 경향성을 채워주리라 생각했다. 아이템을 맡았지만, 기획을 제대로 밀어 올리진 못했다. 자경단이라는 아이템에는 현실적으로 채워 넣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고, 거기를 마술적으로 부풀리기엔 당시의 내 실력이 충분하지 않았다.


  자경단 이야기가 오래 지속된 건 아니었다. 일주일도 안 되어 우리는 자경단 아이템을 만들어나가기엔 충분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민 대표는 영화로 만들 아이템을 내 작품 속에서 찾으러 들었다. 주목받은 작품이 바로 <모의>였다.


  내가 지닌 가장 상업적인 경향의 작품이 바로 <모의>였다. 투자의 귀재로 불리며 엄청난 돈을 굴리던 모영훈은 해외금융위기사태에 휘말리며 많은 자산을 순식간에 날리고 만다. 투자자들은 모 사장이 달아날까 감시의 눈초리를 높이고, 누군가가 골드를 비롯한 범죄자들에게 접근해 납치를 의뢰한다. 의뢰자는 자신을 납치하는 자작극을 벌이려는 모영훈과 그의 아내였다. 모영훈은 납치당하지만, 자신을 납치한 자들이 애당초 의뢰했던 골드 패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라고 만다. 그리고 납치를 의뢰받았던 골드 등은, 모의 아내가 모 사장을 자신들이 납치한 걸로 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는 거짓 납치를 유지해 약속된 돈을 뜯어내려 한다. 잘못된 납치를 당한 모영훈은 자신을 납치한 자들을 꾀어내 상황을 뒤집으려 한다.


  모의는 현란한 대사와 복잡한 상황을 속도 있게 만들어낸 희곡이다. 희곡으로 딱 맞는 아이템이어서가 아니라, 전에 없던 희곡을 쓰겠다는 생각에 만든 작품이다.


  어떻게 희곡 <모의>를 시나리오 <모의>로 바꿨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그 파일을 들여다보는데,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 영상화 작업에는 많은 작가가 동원되기 마련이고, 민 대표는 원작에 대한 이해가 높은 내가 나름으로 세계의 바탕을 모양 있게 구축해 주리라 여겼던 것 같다.


  사실, 이 작품의 각색은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높이다가 작가 입봉을 앞두던 윤상환(가명) 감독에게 먼저 갔었다. 하지만 버전이 민 대표의 만족을 끌어내지 못했고, 이후 내게로 넘어온 것이다. 첫 시나리오를 쓰게 된 걸로는 꽤나 운이 좋은 상황이었다.


  희곡을 시나리오로 옮기면서 내가 놀랐던 사실은, 여러 가지 빈 곳으로 놨던 지점을 명확히 기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 사장의 펜트하우스로 써놓으면 그만이었던 부분은, 실제 촬영이 가능한 로케이션으로 써야 했다. 그래야 촬영 장소를 세트로 만들던, 실제 존재하는 곳을 섭외하던 할 테니까. 구체적인 아이템을 인물에게 줌으로써 상징화를 상대적으로 손쉽게 시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난 그즈음 그걸 발견했을 뿐, 능숙하게 해내진 못했다. 계약을 마쳤지만, <모의>는 투자를 끌어내는 데엔 실패했다. 막 일기 시작한 OTT붐과 코로나 발생으로 극장용 영화에 대한 투자가 급격히 준 게 컸다. <양자물리학> 같은 색깔로 <모의>를 뽑아내고 싶어 했던 민 대표의 꿈은 유보되어야 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내 영화가 세상에 공개된 건 아니었다. 소설이나 희곡도 그렇지만, 영화는 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동의와 투자가 끌어내야 했다. 한편으로 난 나를 시나리오 작가라고 여겨도 될지 의문스러워했다.

  “제가 시나리오 작가인가요?”

  “그럼요.”

  “아직 상영 전이잖아요.”
   “저희가 계약 제안을 드렸고, 그걸 충족시키는 원고를 주셨잖아요. 거기까지 오는 작가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세요.”


  근사한 대답이었지만, 아직 일이 제대로 이뤄진 건 아니었다.


  그걸 제대로 이뤄내야 할 사람은, 여전히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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