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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Sep 27. 2024

Drowning man

Chap. 15 : 부스럭거리는 지도들

  어떻게 그리 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좋은 작품을 쓰려 노력했고, 적절한 공모전에 제출했을 뿐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견디는 것이었다.

  기회를 엿보는 곁눈질을 감당하게 만들어준, 어려운 시기를 견디게끔 도운 비상식량들이 있었다. 이런 수혜 덕에, 작가들의 목숨이 아직 Yuji되는 게 아닐까.


  아르코와 대전문화재단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이런저런 사업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작가로서 살아남으려 했고,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작가로서 책을 내고, 그걸 통해 인지도를 높이면서 책을 더 많이 팔게 되면 좋겠지만, 『삼키는 칼』로 설명했듯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단편들을 묶어 내는 건 왜 하지 않았느냐고? 출판시장은 어렵고 단편을 묶어낸 책의 판매고는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작은 출판사에서는 단편집을 내지 않으려 하고, 큰 출판사 또한 슬롯을 많이 잡지 않는다. 그 적은 슬롯에 들어가는 작가는, 어쩌면 당연히, 그 출판사의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단편들을 묶어서 투고했지만, 대답은 오지 않았다.


  생계는 유지되어야 했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지원금을 타서 타계책을 마련하던가, 응모 가능한 문학상에 계속 도전하던가.


  그 사이에 알음알음으로 일들을 소개받기도 했다. 부지런히 인사해 둔 덕인지, 2016년엔 한국연구재단에 초빙되었다. 전국 20개 대학들의 학문과 사업을 잇는 브릿지 사업이 진행 중이었는데, 그 사업부 컨설팅 위원회 자문위원 겸 작가로 초빙되었다. 전국 20개 대학을 순회하는 두 달 기간이 꽤나 즐거웠고, 원고료도 넉넉해 그 해 여름 가계에 큰 보탬이 되었다.


  도서관상주작가사업은 무수한 공고들 속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마권발매에 따라 발생하는 기금으로 고안된 사업인데, 나는 2016년 사업 도입 첫 해에 수혜 했다. 대전 어은동에 이제 막 세워진 문학마을 도서관에 상주하며 글을 썼고, 오후와 밤에 책 읽기 프로그램과 소설 창작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문학마을 도서관에서 매주 수요일 밤에 만났던 소설창작반 사람들과는 이후로도 함께 공부하는 사이가 되었다. 도서관상주작가사업은 지역민과 창작인을 묶어주고, 지역의 문화발전에 이바지하는, 매우 좋은 사업이다. 하지만 2016년 이후 대전 지역 도서관들은 도서관상주작가사업을 단 한 곳도 신청조차 하지 않고 있다. 선거로 도서관 인력이 차출될 예정이라서, 도서관 리모델링이 들어가서, 사서 한 분이 출산 휴가를 내야 해서 손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지역은 선거 없고, 리모델링 없고, 출산 안 하나? 대전의 문화 수준이 바닥인 건, 인식의 문제도 있지만, 낮은 단위에서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문화사업 주체들의 문제도 있다.


  그 와중에 솔깃한 제안을 받기도 했다.


  극단 셰익스피어의 복영한 대표는 그즈음 대전연극협회장을 지내면서 이런저런 사업에 골몰했다. 그러던 중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극장 뮤지컬 말고는 답이 없어요.”

  복 대표는 극장 상상아트홀을 이전하면서 120석 규모로 리모델링을 한 상태였다. 120석 규모가 연극 무대로 가장 좋다. 객석이 더 많은데 관객이 적으면 휑해 보였고, 객석이 적으면 수익성이 낮았다.

  문제는 극장을 돌릴 레퍼토리였다.

  “뮤지컬을 해봅시다.”

  소극장에서 할 법한 뮤지컬을 살롱 뮤지컬이라 불렀는데, 이야기의 규모나 출연배우의 수나 진행의 정도가 그에 맞게 바뀌어야 했다. 제안을 받았으니 안 할 순 없었는데, 내가 본 뮤지컬이 하나도 없었다. 급한 대로 뮤지컬 넘버들을 들으면서 이야기를 짜 맞춰 갔다.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객석과 가까우니 뭔가 실제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가장 고민했던 건, 가사였다. 뮤지컬을 보며, 감정을 고조시키는 게 노래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노래는, 인물의 감정 고조를 표현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이야기 진행에 재미를 넣고, 감정은 노래에 쏟아야 하는구나. 높아지는 집세로 인해 일어나는 젠트리피케이션에서 착안해, 가게를 내주고 나가야 하는 석현을 떠올렸다. 그리고 가게에서 일하는 사고뭉치 지숙이 석현을 흠모하는 과정과, 그 사이에 개입하는 은수를 떠올렸다. 가장 아름다운 도형은 삼각형이고, 가장 흥미로운 관계는 삼각관계다. 사랑이 한 겹이면 재미가 덜 하지. 석현을 내쫓는 건물주 할아버지 영판과 한입할머니 미선의 사랑으로 한 겹을 더 채우고, 여기를 들락날락하며 사건을 진행시키고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사랑스러운 개와 고양이인 미요와 무람을 넣어주었다.

  원고를 받은 복 대표는,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흥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당장 합시다. 이거 너무 재미있네!”

  작곡가를 섭외해 가사에 곡을 입히고, 세트를 맞추는 일까지 삽시간에 이뤄졌다. 첫 공연에 가서 기쁜 마음으로 매우 만족스럽게 공연을 봤다.


  2017년 11월에 시작한 뮤지컬 <초콜릿 하우스>는 2022년까지 대전을 대표하는 살롱 뮤지컬로 공연되어 왔다. <초콜릿 하우스>의 론칭은, 작가가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작가가 가장 먼저 설득해야 할 사람은 제작자이다. 소설가라면 담당 편집자 혹은 대표일 것이다. 즉, 결정권자를 납득시키는 글을 써야 한다. 결정권자의 목표가 상업적인 성공, 수입의 증대라면, 작가는 대중의 만족을 끌어내는 글을 써야 한다. 결과적으로 작가는 대중의 기호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초콜릿 하우스>의 공연은 6년 동안 매년 12월에 한두 달가량 이뤄졌다. 고무된 복 대표가 열정적으로 대구 및 서울에서 함께 오픈런을 할 계획을 세웠지만, 메르스가 기세를 꺾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살려야’ 했던 건 환자만이 아니었다. 공연 마지막 날은 나도 우연히 극장에 들렀었는데, 관객도 너무 적었고 활력도 바닥이었다. <초콜릿 하우스>를 마치고도 지역 전체에 공연이 전혀 없어 많은 사람들이 연극판을 떠나기도 했다. 괴로웠던 메르스가 끝나고 나서 잠시 나아지나 싶던 기간을 지나 본격적으로 기획을 해보려는 때에, 코로나가 유행했다. 온갖 역병이 내 <초콜릿 하우스>의 흥행을 막아 세우고 있었다!


  2023년 한 해 쉬었던 <초콜릿 하우스>는 2024년 다시 출발하려 한다. 코로나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2018년에는 소설로 활로를 틔웠다. 2018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에서 「코의 무게」로 우수상을 탔다. 시상식에서 만난 김이환 작가가 예심 1등으로 올렸다고 상찬을 해줘 기분이 무척 근사했다. 「코의 무게」는 이전에 없던 한국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으로 쓰인 최초의 작품이다. 전혀 없던 주인공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완전히 다른 개념의 충격적인 소설을 쓰겠다는 결심이 아시가루 나오야를 통해 펼쳐졌다. 온전한 작품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작품이 다 애착이 가지만, 「코의 무게」는 특별하다. 그 자부심이 2018년에 교보 스토리 공모전을 통해 인정받은 셈이다. 책은 다음 해에 나왔지만, 여느 공모전 수상집이 그러하듯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다만, 대상을 받은 강한빛 작가의 「루왁인간」이 드라마가 된 과정이 인상 깊었다.


  해가 바뀌어 2019년엔 많은 기쁜 일을 겪었다. 2017년 벽산희곡상을 수상한 「강철로 된 무지개」의 공연을 홍대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올리게 되었다. 공연 수입은 작가에게 책정되지 않았는데, 그건 상금이 선인세 개념이니 전혀 불평할 일이 아니었다. 도리어 공연의 질이 너무 떨어진 게 불만이었다. 극단 검은연꽃(가칭)의 김민순(가명) 연출이 너무 많은 부분을 잘라냈고, 이 극의 핵심인 2078년과 2048년의 사건이 한 장소를 매개로 동시에 진행된다는 부분을 아예 거세해 버렸다. 제자들과 함께 부푼 마음으로 올라갔는데, 몹시 실망스러웠다.


  2019년엔 대전창작희곡공모전에서 <그대 돌아올 그 바다에>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평생 어부로 살던 송만재가 죽으며 낚시 손님이었던 이재석에게 유언장을 남긴다. 이재석은 송만재의 뜻에 따라 평생 머물던 너른 바다 위 자기 배 갑판에서 유언장을 공개하겠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배를 팔아 몫을 나누려던 삼 남매는 바깥 바다에까지 나오게 된다. 자식처럼 아끼던 배를 여기 이 바다에 침몰시키라는 유언이 공개되며, 세 남매와 집행인 이재석은 큰 소동을 겪는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가벼운 코미디이자 끝맛이 좋은 가족 코미디로 만드는 법을 익혔다.


  극작가로서 이름이 높아지자, 원고 청탁이 들어오기도 했다. 이전 <초콜릿 하우스>에 이어, 극단 정기 공연을 위한 대본을 써달라는 우찬형(가명) 연출의 부탁이 있었다. 여러 요구들을 만족시키면서 우찬형 연출이 대표로 있던 극단 해 뜰 날(가칭)을 위해 썼던 극이 <만조>였다. 내가 해보려 했던 건, 기억의 혼탁함이었다. 하나의 일을 함께 겪은 세 사람이 상황을 저마다 다르게 기억해 냈을 때, 진실은 무엇일까. 한편으로 그 세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도 존재해, 마지막의 파멸에 이르게 만들고 싶었다. 역시나 내 극의 초점과 연출의 해석 및 배우들의 연기 방식이 무척 달라, 공연을 즐겁게 보진 못했다. 하지만 내 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요청으로 창작을 이뤄나가는 경험은 무척이나 행복한 것이었다.


  사촌동생이자, 어릴 적 <원숭이 섬의 비밀 2 : 리척의 복수>를 추석에 함께 플레이했던 김민철은 강원대학교에 처음 생긴 게임학과를 들어갔고, 거기에서 첫 박사가 되었다. 게임을 같이 했던 아이가 게임 교수가 된 셈이다. 교수가 된 민철이는 제자들과 함께 게임을 만들 회사 피드백루프를 춘천에 세웠고, <런 업!>이라는 게임의 시나리오 집필을 의뢰했다. 자전거를 타는 세 남녀의 경쟁과 갈등을 대사화하는 거였는데,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게이머로 자랐고 지금도 게임을 즐기는 입장에서, 그 제작 과정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게 되어 기뻤다.


  돌아보니, 2018년과 그다음 해는 무척이나 많은 행운이 함께 했었다. 극작가로서 여러 입지를 다양하게 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소설가이고 싶었고, 첫 책을 망친 작가였다. 그리고 아직 디렉토리 안에는 세상에 선보이지 못한 단편소설과 쓰고 있는 장편소설과 개작 중인 희곡이 그득했다. 그리고 그즈음 나를 찾아온 일들이, 내게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기에 앞서, 작가들은 왜 가난한지를 조망해 보자. 그건, 내가 왜 문학상 수상에 열심이었는지에 대한 대답과 연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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