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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세 Sep 24. 2024

Drowning man

Chap. 14 : 이 에스컬레이터는 왜 이리 빠르죠?

  네 편의 희곡을 쓰면 희곡집을 출간해 봐야지라는 생각은, 두 번째 희곡인 <모의>를 쓰면서 했다. 분량이 대게 그러하니 해보겠다는 짐작이었지, 어떤 결심을 한 건 아니었다.


  한국에서 희곡집의 위치는…… 어디에 자리할까. 책 읽기를 꽤 즐긴다는 사람들도, 희곡을 읽은 경험은 많지 않다. <작가는 어떻게 쓰는가!>라는 강의를 세종 집현전에서 수요일마다 하는 중인데, 희곡을 처음 읽어본다는 분들이 꽤 많다. 희곡집을 구매하는 건, 희곡을 쓰는 사람들 정도가 아닐까. 배우들조차 연습할 대본을 지니지, 희곡집을 사들이진 않는다. 소설 독자층이 점점 얇아진다지만, 그리 따지면 희곡은 애당초 종이 두께의 독자뿐이었다.


  희곡집을 내는 출판사는 거의 없다. 두어 곳 정도에 원고 투고를 할까 하는 시점에 대전문화재단에서 창작지원금 공고를 봤다. 반나절을 들여 서류를 만들어 보냈는데, <내 아버지의 집> 연습 중에 연출을 맡았던 주찬영(가명) 교수님이 일러주었다.

  “창작지원금 심사 맡았는데, 거기 이름이 있던데.”

  “네, 공고 있어서 내봤어요.”

  공공기관에 낸 첫 지원금 신청이었다.

  “심사 통과 되었으니까, 며칠 내로 창작지원금 받을 거야.”


  이런. 원고를 낼 출판사를 찾아야 할 판이었다. 『삼키는 칼』처럼 몇 년 동안 앓던 이 노릇을 할 거면 창작지원금 수혜가 독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잠깐 내 얘기를 뚱하니 듣던 주찬영 교수님이 어딘가에 전화를 했다.

  “어, 난데. 여기 이중세라고 희곡 쓰는데. 책을 내야 해.”


  거기로 내 번호가 갈 필요도 없었다. 무대와극작(가칭)을 네이버에 치고, 거기 이메일 주소로 원고를 보내라고 했다. 닷새 뒤에 표지 디자인 시안이 왔다. 잡다하고도 번다하지만 매우 긴요하고 꼭 해야만 하는 논의와 살핌은, 없었다. 오타는 출판사에서 보겠다고 했지만, 출간된 다음에 뒤적여보니 보낸 그대로였다.


  내 첫 희곡집 『파국』은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네 편의 희곡이 『파국』에 실렸다. 썼던 순서대로 <끈>, <모의>, <내 아버지의 집>, <파국>을 놓았고, 그걸 묶는 작가의 말을 써서 보냈다. 열흘 뒤에 책 20권이 담긴 커다란 상자가 작업실로 배달되었다.

  오, 파티 파티, 렛츠 파티.


  독자가 거의 없다시피 한 희곡집이 출간되는 건 혹시 나 같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창작지원금인 300만 원을 통해, 일종의 자비출판 개념으로 책이 만들어지는. 300만 원 안쪽으로 경비를 들여 책을 만들고, 책이 팔리면 온전히 이익이 되는 구조가 되는.


  연극 자체가 초연작을 조건으로 하는 공연지원금 사업의 수혜를 받지 못하면 만들어지기 어려운 것처럼, 관련된 사안 또한 지원사업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다. 자생적으로 돌아갈 수 없는 구조를 지닌 곳을 사업체라 부를 수 있을까.


  한편으론 『삼키는 칼』에서 겪었던 괴로움 없이 온라인 쇼핑하듯 쓰윽 진행되어버리자, 웃긴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다른 작가들은 이처럼 편안하게 자기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나처럼 업 앤 다운을 오가며 난리 부르스 속에서 책을 내려 발광하지 않고, 극도로 우아하고도 부드럽게 수순을 밟으며 책을 내고 있는가 싶었다.


  희곡집과 장편소설을 포함해 다섯 권을 펴낸 지금과 달리, 괴로운 과정을 통해 『삼키는 칼』을 출간했던 그즈음에, 『파국』을 내는 과정은 충격이었다. 너무 매끈해서, 있어야 할 게 없다고 느낄 지경이었으니까.


  없기도 했고.


  그러고 보니, 여기도 정산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창작지원금을 내고 만든 『파국』은 계약금도 없었고, 이후 인세가 들어온 것도 없다.


  <파국>을 쓴 뒤로 극작을 멈춘 건 아니었다. 일단 대전 연극인들로부터 자잘한 대본 요청이 꽤 있었다. 병원이나 보건소나 학교를 돌며 공연을 할 일들이 많았는데, 거기에 쓸 짧은 레퍼토리들이 필요했다. <언덕, 오래된 마중>과 <담배 피는 공주님>과 <작별>은 공연시간이 15분 남짓 되는 작품들이다. 자살방지를 위한 캠페인의 일환이었던 공연을 보고 한 중학생이 죽으려던 생각을 돌이켰다고 해, 극을 쓴 내게도 큰 위안이 되었던 기억이 난다.


  장막극도 계속 썼다. <그대 돌아올 그 바다에>와 <강철로 된 무지개>와 <밤이여 나뉘어라>를 구상하고, 써 내려갔다. 그중 <강철로 된 무지개>를 완성하고는 어디 내놔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강철로 된 무지개>는 이육사의 「절정」의 한 구절을 가져와 제목 삼았다. 2048년의 연방한국을 이룬 북조선과 남한에서 관할 밖 범죄를 수사하기 위해 연방수사국을 만든다. 그리고 평양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파고드는 연방수사관 이영훈과 박세욱은 이 죽음들이 30여 년 전인 2017년의 탈북브로커 사건과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파고들며 진실을 추적한다.


  극작가가 받을 수 있는 상 중에, 가장 높은 격을 갖춘 상이 무엇일까. 연혁으로 보나 상금으로 보나 동아연극상과 백상예술상일 텐데, 그건 상연된 공연을 대상으로 심사가 이뤄진다. 제출된 희곡으로 평가받는 상 중에는 벽산희곡상이 최고다. 상금과 더불어, 공연 지원금을 주기 때문이다. 행사비를 포함하면 벽산문화재단은 희곡 한 편에 1억 가까운 금액을 쓰는 셈이다.


  2017년, <강철로 된 무지개>로 벽산희곡상 7회 수상자로 당선되었다.


  나는 극 진행 상황을 독특하게 만들었다. 2048년 살인이 벌어진 평양의 아파트와, 2017년 망명하려는 주영북한대사 백영환과 탈북브로커가 만나는 평양의 아파트를 동일하게 설정했다. 그리고 두 사건을 분리시키지 않고 동시에 진행하도록 만들었다. 관객은 헛갈릴 테지만, 2048년의 복장을 한 사람들끼리, 2017년의 복장을 한 사람들끼리 대화하는 걸 보고는 두 개의 사건을 동시에 펼쳐놓았다는 걸 깨달을 것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둘로 나뉘었다고 한다. 이건 연극이 아니며, 상을 주면 심사위원을 사퇴하겠다는 분도 계셔서 다른 분들이 애를 먹었다고 한다. 어쩌면 난 연극의 기존 문법을 답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극작으로 성공했던 걸지도 모른다. 내 공연을 두 번 연출한 복영한 대표는 내 극이 연극 같으면서 연극답지 않은 면을 지녔다고 평한 적 있다. 바로 그 지점이 벽산희곡상 심사위원 중 한 분을 격분하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다.


  희곡을 쓰는 극작가의 위상은 어디에 자리할까? 그걸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벽산희곡상 시상식에서 겪었다. 수상을 위해 연단에 섰는데, 트로피를 건네시며 벽산문화재단 이사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열심히 해서, 좋은 연출가 되세요.”

  결국 한국 연극계에서 극작가란 연출가가 되기 위해 밟는 수순인 셈이었다. 그건 좋은 시나리오 작가가 없는 것과 맥이 같다. 시나리오를 쓰는 건, 그 사람이 영화감독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감독이나 연출 지위와 관계없이 전문적으로 극작을 하는 사람이 한국엔 부족하다. 극작을 전문적으로 하지 않는 건, 연출가와 감독이 더 돈이 되고 지위가 높기 때문이다. 한국은 극작가와 시나리오 작가의 전문성을 그리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국 희곡의 수준은 낮은 위치에 머물러 있다. 자본이 들어가며 여러 작가와 제작사와 감독까지 붙는 시나리오가 점점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과 달리.


  아무튼 이런 과정을 통해 내 첫 희곡집 『파국』이 세상에 나왔다.


  작년에 두 번째 희곡집 <강철로 된 무지개>를 냈을 때에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으니, 희곡집을 출간하는 과정은 소설에 비해 꽤나 헐거운 게 분명하다.


  신인문학상이나 신춘문예를 받는다고 책이 뚝딱 만들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장편소설 문학상들은 달랐다. 한겨레문학상, 문학동네소설상, 수림문학상 등은 수상작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애당초 성경의 사건을 소설로 펴낸다는 기획 자체가 멍청했던 걸까. 하지만 『삼키는 칼』은 정말 그럴듯한 계획이었고, 쓰는 과정을 돌이켜보면 그걸 통해 성장시켜야 하는 내 글쓰기의 단계들이 존재했다. 두 번의 다시 쓰기를 통해 많이 배웠으니까.


  작가란 자기 안에 떠오른 테마를 성심을 다해 써야 하는 존재다. 그때 내게는 다윗과 압살롬의 이야기가 들어왔고, 난 『삼키는 칼』을 쓸 수밖에 없었다.


  희곡집을 출간한 뒤로도 세상은 그대로였다. 이 책은 대전문화재단의 창작지원을 받았습니다라는 문장이 나붙은 책을 대전문화재단에 보내곤 사업을 종료했다. 책을 내는 것과 별개로, 나는 작품을 쓰고 내일의 다른 기회를 엿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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