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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멈블비 Sep 30. 2024

말 없던 아이의 그림

아이는 말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항상 입안에서 말을 우물거려서 똑똑히 말해라, 크게 말해라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의 소리는 몸 안에서 부터 울려 스스로에게는 아주 또렷히 들렸으므로 왜 다른 사람들은 아이의 소리를 잘 들을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소통할 때 쓰는 말이라는 매체는 아이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아주 자주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맞는 그릇을 찾을 수 없어서 음식을 담지 못하는 것처럼, 아이는 자신을 담을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장난감 중에 네모, 세모, 동그라미 모양의 구멍이 뚫린 상자 퍼즐이 있다. 그 구멍에 맞는 모양의 퍼즐을 넣어 통과시키는 것이다. 세상에는 네모, 세모, 동그라미 모양 구멍만 있는데, 그런 매끈한 모양의 조각들을 아이는 가지고 있지 않아서 통과시킬 수 없는 느낌이었다. 아이가 느끼는 감정들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을 배운 건 한참 뒤에 자라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이가 너무 말이 없다며 아이의 엄마가 친구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계속 말을 걸어주고 노래도 같이 해보라 했고, 그 후로 정말로 엄마는 아이를 배에 앉혀서 같이 동요도 부르고 놀아주기 시작했다. 아빠와 크레파스라는 노래를 많이 불렀다. 그때부터 어른들이 뭘 갖고 싶으냐 물으면 아이는 한결같이 크레파스라고 대답했다.

조금 더 자란 아이는 만화영화를 많이 보았다. 엄마의 아는 친구가 비디오 가게를 해서, 아이를 혼자 집에 남겨두고 외출할 때면 보라고 하나씩 가져다주었다. 배추도사 무도사 같은 한국 만화영화도 있었고, 이름이 복잡한 중국 만화영화나 일본 유명 만화 시리즈도 있었다. 우연이었는지 호기심이었는지, 어느 날인가부터 아이는 비디오 화면을 멈춰놓고 보이는 대로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림 그리기는 혼자 하는 놀이에 가까웠지만, 거듭할수록 무언가 다른 세계에 다다를 것만 같은, 뭔가에 가까워지는 것 같은, 설명하기 힘든 추구 같은 것을 근저에 느꼈다. 옆에서 보는 얼굴은 이렇게 그리는 거구나, 위에서 보는 귀는 이런 모양이구나 모방하면서, 이런 뾰족한 선은 화난 눈썹, 이런 크기의 원은 놀란 눈, 이런 발색은 부끄러운 얼굴 하는 식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던 사람에 대한 이해를 그림을 그리면서 배웠다.

아이가 딱히 창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유치원 시절 그림일기 숙제가 있었는데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아이는 당연히 하지 않았고, 선생님이 어느 오후 아이를 붙잡고 밀린 숙제를 같이 해주었다. 겨울방학 때 무엇을 했는지 일기로 그려야 했다.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탕에 갔다고 아이는 말했다. 그것이 그림일기의 주제가 되어서 커다란 욕탕과 많은 사람의 누드를 그려야 했다. 숙제를 안했다는 점에서 어쩐지 미안해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같았지만, 선생님이 사람 몸을 분홍색 크레파스로 칠하기 시작했으므로 참지 못하고 피부는 살색인데 왜 분홍색으로 칠하는 거냐고 따지고 말았다. 선생님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아이는 살색 크레파스로 선생님이 먼저 색칠했던 부분을 크레파스 때가 밀려 나올 때까지 있는 힘껏 덧칠하기 시작했다. 목욕탕 열기가 분홍빛 피부를 만들 수도 있다는 건 정말 나중에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부끄러워졌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하고 계속 마음에 남았다.

다른 유치원 친구들은 여름 바닷가를 그릴 때 위에서 본 것처럼 표현했다. 스케치북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파도의 곡선을 그리고 한쪽은 모래사장 다른 한쪽은 바닷물 색으로 칠하는 것이다. 동동 떠 있는 튜브위에 보이는 사람들의 상체는 어쩐지 정면이며, 웃고있는 태양, 꽃게, 불가사리 등을 가득 그린다. 정말 아이들은 그렇게 그리는 건지, 보육교사가 도와주니까 다들 비슷해진 건진 잘 모르겠지만 아이에게는 그것이야말로 참 어린이다운 그림의 패턴과 정형처럼 느껴졌다. 어린이다운 그림을 그리려면 저렇게 해야 하는구나, 자신의 그림과는 너무 비교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그린 바다 그림은 가로로 놓인 파란색과 흰색, 건조한 황토색이 밋밋했고 사람이 없이 거의 비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한 번도 제 눈으로는  적 없는 그 "전형적인 아이의 시점"을 모방하여 다시 그렸고, 그 그림으로 상을 탔다.

아이는 그림이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2차원 평면에 표현되는 마법 같은 미술이 즐거워서 빠져들었고, 재능도 있었다. 많고 많은 재능중에 그리기를 잘했던 것이 운명 같았고 특별했고 소중했다. 그 무엇보다 자신의 재능을 소중히 여기던 그 마음이 진로를 결정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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