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잎사귀의 개수는 50여 장으로 정해져 있다. 가느다랗게 말려있는 잎이 중심에서부터 올라와 크기가 커지면서 잎사귀가 활짝 열린다. 바나나 잎은 증산작용이 활발해서 물방울이 맺혀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시원시원한 크기의 바나나 잎의 줄기는 시든 후에도 바나나 풀의 본체를 겹겹이 지탱해 주어서, 그 힘으로 나무줄기처럼 단단하게 높이 자랄 수 있고 바나나 열매를 한가득 열고도 쓰러지지 않는다.
바나나 풀을 집에 들인 뒤로 내게 버릇이 하나 생겼다. 바나나 풀을 볼 때마다 잎사귀가 몇 개인지 세어보는 것이다. 다른 식물을 보고 한 적 없던 일인데, 정해진 숫자의 잎사귀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듣고부터는 자꾸만 세어보게 된다. 이제껏 몇 장을 피워 올렸는지 기억을 하는 것도 아닌데, 거의 무의식적으로 지금 달린 잎사귀가 몇 개인지 볼 때마다 세어보게 된다. 이년 남짓 거의 강박처럼 바나나 잎사귀를 세었다. 가장 적었을 땐 세 장이었고, 많았을 땐 여덟 장이었다.
우리 집 바나나는 아마도 영영 바나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열매가 열리려면 흙의 온도가 5개월 이상 26도는 되어야 한단다. 독일에 있는 우리 집은 공기의 온도가 26도에 이르는 날조차 손에 꼽는다. 하물며 흙의 온도라니. 여름이 5개월은 있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이 정도면 불가능하다는 말을 써도 과장이 아니다.
정해진 개수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비단 바나나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도 그럴 수 있다.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았을 뿐. 나 또한 아이가 없지만 정해진 개수의 난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한다. 우리의 이빨도 그 수가 정해져 있다. 빠진다고 마냥 다시 나지 않는다. 손가락 발가락은 10개씩, 하나라도 잃으면 그뿐일 뿐 재생되지 않는다.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정보일 뿐이다. 그런데 왜 나는 유독 바나나 잎을 세는 걸까.
이 바나나가 영영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거라는 미안함 때문일까? 어떠한 형태의 조바심일까? 단지 우리 집에서 제일 큰 잎사귀를 가져서 눈에 띄는 걸까?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해서 이 바나나가 정체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부지런히 잎사귀를 올리고 있고, 자구도 그간 6개나 올려서 따로 화분을 만들어 주었다. 아주 따뜻하지 않은 기후라 해서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계속 살아간다. 열매가 존재 이유일 필요는 없다. 정해진 숫자의 가능성에 아쉬워할 이유도 없다. 무언가를 해내서가 아니라, 바나나는 바나나라서 그 자체로 멋지다. 바나나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해서 바나나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살 수 있는 삶을 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