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대학까지 다니면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포함하여 네 번의 졸업식을 한다. 그렇지만 나는 단 한 번의 졸업식도 경험하지 못했다.
초등학교는 밀린 육성회비를 내지 못해 졸업식에 가지 못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학력을 인정받는 과정을 거쳤으므로 당연히 졸업식은 없었다. 쉰여섯의 나이에 스무 살 아이들과 다닌 대학교 졸업식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코로나19’ 영향으로 학교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졸업식으로 대체되었다. 이쯤이면 학교나 졸업식 하고는 인연이 없는 운명이 아닌가 싶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밀린 육성회비와 졸업앨범 값을 내지 못했다. 담임선생님은 그것을 납부하지 못하면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했다. 부모님은 그것을 내주지 못했고 나는 졸업식이 가까워지던 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졸업하기 전에 밀린 돈을 받아내기 위한 선생님의 독촉이 유난히 심했고, 나는 미납된 육성회비와 앨범 값을 내지 못한 채 졸업식에 참석할 만큼 배짱이 없었다. 그렇게 졸업식에 가지 못한 유난히 길고 지루한 하루를 나는 종일 대문 밖을 들락거리며 보냈다.
삼 년 후, 세 살 터울의 동생 졸업식에 갔다. 졸업하고 처음으로 간 학교였다. 졸업식은 큰 행사였다. 학교 정문과 후문에는 화려한 꽃과 함께 졸업장이나 상장이 구겨지지 않도록 말아서 넣을 수 있는 둥글고 긴 보관 통을 파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얼었다가 햇살을 받아 질퍽거리는 운동장에는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날 누구와 갔는지, 꽃을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졸업식을 추운 겨울 날씨 때문인지 운동장이 아닌 실내에서 진행한 것이다. 나도 수업을 받은 적이 있는 교실이었다. 그 교실은 교탁 뒤쪽이 나무로 된 미닫이 문이다. 평소에는 닫아놓은 미닫이문에 칠판과 태극기, 교훈이나 급훈을 걸고 수업을 하다가 졸업식처럼 큰 행사가 있을 때면 미닫이문을 떼어 낸다. 그러면 미닫이문으로 나누어졌던 교실 몇 칸이 그대로 커다란 강당처럼 확 트인 넓은 공간이 되는 것이다. 방음은 당연히 잘 되지 않았고 맨 뒤에 앉은 아이들에게는 옆 반 선생님의 목소리가 더 잘 들리는 구조였다.
그렇게 임시 강당이 된 그날 교실에는 선생님과 졸업생들, 그리고 축가를 불러 줄 5학년 아이들이 책상을 치운 의자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가지 못한 내 졸업식도 저런 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가족들은 복도에서 유리창을 통해 졸업식이 진행 중인 교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어른들 틈에 끼어 시린 발로 까치발을 하고 긴 목을 한껏 늘인 채 보고 있었다.
지루한 여러 절차들이 끝나고 마지막쯤에 ‘졸업식 노래’를 불렀다. 졸업식 노래가 불러지는 동안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훌쩍이며 울었다. 나도 울었다. 그냥 슬펐다. 참석하지 못한 내 졸업식이 생각나서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부르는 졸업식 노래가 어린 마음으로 울려 들어왔다. 누가 볼까 싶은 부끄러움 때문에 가슴이 저릿해지고 코끝이 아프도록 참았지만 눈물은 끝없이 흘렀다. 그날 나는 많이 슬펐고 오래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