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버지 고향인 공주에서의 일이다. 가끔 다니러 가는 큰 집 앞이 바로 신풍 장터였다. 그곳에는 나무로 만든 야트막한 가벽(假壁)이 있었다. 긴 가벽은 장날 상인들에게 한 칸의 상가 역할을 했다. 가벽은 주로 옷을 걸어 놓고 파는 옷장수들 차지였다. 장이 서지 않는 날 우리는 이 나무 벽을 오르내리며 놀기도 하고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있는 교회까지 할 일없이 한 바퀴 돌고 오기도 했다. 이처럼 동네 아이들 여럿이 우르르 몰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다니는 것도 시골에서는 놀이 중의 하나였다.
큰집 뒤에는 구기자나무가 울타리처럼 심어져 있었다. 여름쯤이면 빨간 열매가 다닥다닥 열렸다. 언젠가 나는 앙증맞은 크기로 빨갛게 매달린 구기자를 따서 입에 넣은 적이 있었다. 빨간색의 작은 열매는 어린 내게 유혹적이었다. 구기자에서는 달착지근하고 씁쓸하면서도 비릿한 풋내가 났다. 입안이 살짝 아렸다.
동네 사람들이 ‘자칫 다리’라고 부르던 다리 아래 개울에서 물놀이도 했다. 참외나 오이를 따 가지고 가서 물속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지면 그것들을 먹었다. 밤 개울가에는 반딧불이가 무리 지어 빛을 내며 날아다녔다. 감나무 아래에 떨어진 감꽃을 갈대처럼 긴 풀에 꿰어서 목걸이처럼 만들어 걸고 다니기도 했다. 동네 아이들은 오빠와 나를 어디든지 잘 데리고 다녔다. 밤이면 시골마당에 모깃불을 피웠다. 그리고 펼쳐놓은 멍석 위에 둘러앉아 금방 삶아 대소쿠리에 담겨 나온 무럭무럭 김이 나는 찰진 옥수수를 먹기도 했다. 내 시골에서의 추억은 변변치 않다. 공주는 잠깐 다니러 가서 짧게 머무르는 곳일 뿐 도시빈민으로 오래 살았던 까닭이다.
“부대에 비상이 걸리믄 애들 아부지가 한 달씩 집에 못 오거든. 그럼 애들 데리고 공주 큰집에 내려가서 한 참씩 살다오는겨~ 경미는 어리니께 내가 데리고 있구, 경식이랑 경자는 동네 애덜이 데리구 다니믄서 놀아주니께 좋아했지. 그때만 해두 시골 애덜이 먹을게 뭐 변변이 있었남? 우리 집은 쟤덜 아부지가 부대에 있을 때니께 미제 사탕이랑 캐러멜 같은 게 흔했거덩. 우리 경식이는 사탕이랑 캐러멜을 얼마나 먹었는지 이빨 성한 것두 없었구, 사람덜이 경식이는 똥두 달것다구 했을 정도였으니께~ 우리 애덜 데리구 놀아주믄 사탕이니 캐러멜이니 나눠주구 하니께 시골 애덜이 서로 놀아주려구 야단이었지 ~ 아침밥만 먹으믄 우리 집으루 쟤덜 데리러 왔었으니께~ ”
그날도 예닐곱 명의 아이들과 무리 지어 교회 쪽으로 몰려 가던 길이었다. 내가 넘어지며 돌부리에 부딪혀 무릎이 까지고 코피가 심하게 났다. 아이들은 당황했다. 놀란 아이들이 집으로 코피를 닦을 수 있는 걸레를 찾으러 갔다가 엄마가 알게 되었고 나는 울면서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입었던 분홍색 원피스 앞자락은 온통 피로 얼룩져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집 마당에 쪼그리고 앉은 내 목에 수건을 두르고 양은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엄마가 세수를 시켜주고 있었다. 코를 풀라는 엄마의 말에 '흥'하고 코에 힘을 주었는데 그만 코피가 터져 버렸다. 코피는 금방 세숫대야를 빨갛게 물들였다. 그리고는 금세 내 턱을 지나 목으로 뜨뜻하게 흘러내렸다.
"참말로 속도 가지가지 썩인다~!"
엄마는 내 머리채를 힘주어 움켜쥐고 목을 뒤로 거칠게 젖히며 흔들었다. 그러자 코피는 사레가 들릴 듯 꿀떡거리며 내 목으로 넘어갔다. 코피에서는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아프고 무서웠지만 운다고 혼날까 봐 소리도 못 내면서 눈물만 흘렸다.
엄마는 훗날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이렇게 했다.
“그때 경자 쟤가 코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며칠이 지나 거길 지나가는디 그때까지도 쟤가 흘린 코피가 굳지도 않고 고여 있더라니께.. 그리구는 며칠 지나 세수를 시키는데 또 코피가 나는겨~ 그 코피두 겁나더라구~ 세숫대야가 금방 시뻘게지는디...”
엄마는 어린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 거칠게 목을 뒤로 젖히며 흔들었던 일은 말하지 않았다. 나는 불행하게도 왜 지금까지 이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엄마의 말을 들으며 내 기억이 사실임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분명한 건 내가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일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