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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자의 조각보 Sep 26. 2022

내 원체 무용(無用)한 사람이오.

나의 쓸모에 대한..


지루한 하루



잠에서 깼을 때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 채 하염없이 흐르는 긴 강물처럼 '하루'라는 시간만이 내게 놓여있다. 집에는 얼추 나와 비슷하게 늙어가는 텔레비전,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들, 그리고 버릴 건 없지만 입을 것도 없이 과거처럼 쓸데없는 것들로 가득 찬 옷장 반대로 현실처럼 텅 비어있는 냉장고와 른 탓에 물기 말라버린 걸레가 나처럼 지루하고 긴 하루를 함께 맞이한다.  


오늘은 또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까? 유일하게 한 일은 매일 제시간에 먹어야 하는 한 알의 약을 먹은 일이다. 거실에 가도 주방에 가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없다. 나갔다가도 우두커니 서 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나갈 일이 없으니 바쁘게 씻지 않는다. 배고플 때나 챙겨 먹으니 아침부터 먹을 일도 없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으니 치우고 청소할 것도 없다. 덩치 큰 세탁기를 채워 빨래를 하는 일은 월례행사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거기다 흔하게 키우는 반려동물 하나 없고 물을 줘야 하는 화분 하나가 없으니 다른 것 끼니를 챙겨야 하는 일도 없다. 집안에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어느 청소 안된 구석에 나 모르게 살고 있는 거미라도 한 마리 있다면 아마도 그것과 나뿐이리라.






'내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그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멎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꿈이오.' 


벌써 몇 년 전,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 속에서 빛나던 수많은 대사 중 하나이다. 나도 무용(無用) 한 것들을 좋아하지만 무용 그 자체이기도 하다. 나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다. 잘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람도 잘 못 알아보는 데다 심각한 길치이기도 하고, 아무런 기술도 가지지 못했다. 노래도 춤도 못하고 음식 솜씨도 없고, 사회경험도 없고, 남들보다 잘 아는 분야도 없다. 나이 값도 못한 채 아직도 낯을 몹시 가리고 눈치까지 없다. 게다가 이쁘지도 않고 이제는 젊지도 않다.


내가 무엇이라도 하면 주변 사람들 눈에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어설프고 불안한 모양이다. 그렇게 기대치가 낮다 보니 무얼 해도 곧잘 했다는 말을 듣는 장점도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지리 솜씨도 없이 못났다는 말을 하고 싶을 것이나, 듣기 좋게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자라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한다.


가난한 집에서 엄마로부터 학대에 가까운 구박과 차별을 받고 자랐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리고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아 기르며, 삼십 년을 넘게 살림이라고 해 온 내가 이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칭찬이 아니라 모욕에 가깝다. 하지만 나를 세세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해명할 이유를 나는 구태여 찾지 않는다.


 

되풀이되는 일상



생수랑 과일이며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온라인으로 주문을 하고 창가에서 몇 번을 서성거려도, 늦은 가을까지 손톱 작게 남아있는 봉숭아 물처럼 그저 조금 줄어들었을 뿐, 내 하루는 한참을 남기고 버티고 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상대로 흥분하며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무료함을 달랠 수 있을까? 어쩌다의 외출에도 재미가 없다. 화젯거리가 항상 없는 나는 친구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맞아!' '그랬어?' '잘했네~'를 몇 번하고, 또 그렇게 몇 번 웃고 나면 얼굴에서는 지루함을 감추기 어렵다. 드물게 만들어지는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재미가 없으니 바쁘다거나 다른 일이 있다는 핑계로 그마저도 피하게 된다. 그러니 하루 종일 찾는 이도 없고 전화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채 아파트 분양광고 문자나 대출 문자, 또는 보험사의 안부 문자를 받아내는 일에 쓰일 뿐이다. 그 어느 것도 나의 막강한 무기력(無氣力)을 당해내지는 못하는 듯하다.  

 

매일 되풀이되는 지루한 일상은, 오늘은 어제와 같았으니  내일은 오늘과 같으리라. 하루하루가 익숙한 '데쟈뷔'의 굴레다. 나의 멍한 시간은 그저 공상일 뿐 사색(思索)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권태로울 때 찬찬히 나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이 나를 주저하게 하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무것도 할 수 가없고 하기도 싫다. 그렇게 집중할 수 없는 '안절부절'의 상태로 하루가 지나간다. 약을 챙겨 먹고 오랫동안 계속해온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겨우 쓰는 것과. 시집 몇 권을 가까이 두고 잠깐씩 눈길을 주는 것이 내 하루 일과의 사람다운 작은 부분이다. 가끔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몸이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한 마리의 흉측한 다리 여러 개 달린 벌레가 되어있기를 꿈꾸기도 한다.  그리하여 가족들에게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버려지기를.. 불행한 일이다.






기(旗)를 꽂고 산들 무엇하나.
꽃이 내가 아니 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빛 몸매를 닮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엇하나.


박인환의  '얼굴'의 일부다. 안절부절 상태 머릿속에는 이 시가 맴돈다. 나 꽃 될 수없고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사는 것도 아니니..


무엇하나

무엇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다 부질없다. 이런 글을 쓴들 또 무엇하랴!


'도대체 너를 어디다 써먹는다니~'

오래 들어온 엄마의 잔소리가 귓가에 다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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