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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자의 조각보 Aug 11. 2022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정신건강 의학과를 찾아갔다.



엄마~!!!



"나한테 평생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당신이 내게 뭔데?"


가끔 나를 무시하는 엄마의 작은 행동에도 이렇게 소리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온다. 아직도 틈만 나면 내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엄마에게는, 내가 아직도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만만한 아이로 남아있는 게 분명하다.

어디 한 순간의 일 때문일까? 오랜 시간 동안 드럼통이 부식되도록 토굴 속에서 숙성되는 새우젓처럼 켜켜이 눌렸던 감정이 올라와서겠지. 온몸이 녹아내리도록 흠뻑 뿌려진 소금 속에서도 온전히 제 모습을 간직한 작은 새우처럼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어서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매번 혼란스럽다. 심호흡을 하며 진정시키지만 후유증은 오래간다. 죄책감이다. 하지만 내가 나쁘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싫다.






나는 효녀였다. 엄마의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을 보상해 줘야 한다는 책임과 의무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나와 차별되어 다른 대우를 받던 형제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그것이 엉뚱하게 내게 있었다. 그것에 균열이 생긴 때가 언제, 무엇 때문이었는지 자를 대고 선을 긋듯 명확하지는 않다. 아마도 많은 나이에 어린아이들과 공부사람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나는 왜 이러는 걸까?'라는 성찰을 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고 반대로 자존감은 너무 없었다. 무능하고, 잘하는 것이나 매력이라곤 전혀 없이 나이만 많을 뿐인 그런 사람으로 남들에게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나를 매사에 당당하지 못하게 했다. 초등학교를 겨우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내 말과 행동의 가치를 폄하하는 편견을 가 두려워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내 의견이나 제안이 거절되거나 비난, 또는 인정받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 때문에 조별과제처럼 함께 하는 작업에서는 의견이 달라도 적극적인 목소리내지 않았다. 또한, 그런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대인관계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선을 그었다. 나잇값을 해야 한다거나 어른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도 심했다. 그런 것이 티 날까 봐 또다시 전전긍긍하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나에 대한 개념도 약해서 나는 도대체 어느 때  행복하고 즐거운지, 어떤 때 화가 나고 슬프고 외로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성취하려고 하는 것과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늘 불완전한 사람이었다. 스무 살 아이들도 다 아는 것을 나만 모르 있는 것처럼 소외된 느낌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럴 필요 없어,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최면을 걸듯 다독이며 힘을 내보지만 의식적으로 그러는 건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본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엄마에게 구박받던 어린 시절이 바탕에 있었다. 어릴 때 엄마로부터 받은 결핍과 학대의 영향을 지금까지 받고 있는 것이구나 느끼면서 조금씩 엄마를 향한 내 눈의 콩깍지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끊임없이 복기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때를 가리지 않고 떠 올라 괴로웠다. 인생을 살면서 절대 잊힐 것 같지 않은 장면들이 잊히고, 절대 용서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용서되면서 우리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거라는 글이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도 '철없는 아이'를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잊지 못하고 용서하지 않아서 일까?


여자애들 대하기가 남자애들보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불편했던 까닭도 '기승전 엄마'로 결론을 내린 지금에야 엄마 때문에 나도 모르게 여자에게 뿌리 깊은 불신과 혐오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나에게 엄마란 사랑과 희생이 아니라 불안과 공포였으니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없이 되살아 나는 생생한 나쁜 기억과 불쑥 올라오는 엄마에 대한 분노였다. 이 분노가 가라앉고 나면 어김없이 죄책감이 따라왔다.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되는 엄마와의 거리두기는 어려웠다. 나와 다르게 대우해 온 아들과는 마음도 몸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엄마와 함께 사는 혼자된 여동생은 직장에 다녀야 했다. 여러 군데 병원 진료에 동행하는 것과  조금씩 잦아지는 입원 치료 병간호도 오롯이 내 몫이다. 게다가 아직도 계속되는 자기 연민의 신세타령을 오랜 시간 들어줘야 하는 것도 나였다.



나는 '정신건강 의학과'의 치료를 신뢰하지 않았다. 엄마로부터 물리적 분리가 지금 내게 최선인데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담이나 받고 약이나 먹는다고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정신이 은화처럼 맑아지는 밤들을 지새면서 결국 오랜 고민 끝에 '정신건강 의학과'를 찾아갔다.


그리고 가족이 아니면 알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를 젊은 의사에게  털어놓았다.

 




짧은 손톱과 솜털이 많은 손으로 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판을 두드리는 의사를 본다. 나와의 대화를 몽땅 받아 적는 걸까? 나름 분석한 내용을 적고 있는 걸까? 의사에게 나는 그냥 흔한 일반적인 수준의 환자에 지나지 않을까? 더한 아픔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도 있을까? 대화 도중에도 집중하지 못한다.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처음 본 낯선 사람에게 이래도 되는 것인가? 아무리 전문가라고 해도 나는 이 사람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과연 나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내 이야기에 혼자 몰입해서 가슴 뻐근한 감정이 올라오는 도중에도 이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들었다.



계속해서 "어떻게 지내셨어요?"라는 물음으로 시작되는 진료가 진행되면서 누군가 내게 어떻게 지냈느냐는 평범한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던가 싶다. 나는 관심에 목말라 있었던 것일까?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내 이야기를 들어줄 믿음직한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이렇듯 진료를 끝내고 온 날에는 나를 향한 질문과 더불어 내 의사는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나는 정말 솔직했는지, 필요 없는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또다시 복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나는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반응에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보 같은 짓이다.


요즘 약을 먹고 있다. 여러 가지 상처로 해진 내 마음을 멀쩡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


'제 버릇 개 못준다'이 있다. 그만큼 버릇을 고치기가 힘들다는 말일 것이다. 내게도 아직 개에게 주지 못한 나쁜 버릇이 아주 많다. 많이 부족하고 부끄러웠던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말로 털어놓고, 얼굴도 모르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글로 털어놓으면서 내게 있는 나쁜 버릇들을 개에게 줄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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