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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자의 조각보 Feb 04. 2022

뭔 좋은 꼴을 보것다구..

아버지의 마지막 눈빛






아버지가 병이 났다. 엄마는 게으른 아버지가 방구석에만 있어서 생긴 운동 부족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네라도 한 바퀴 돌고 오라며 아픈 아버지를 매일 집 밖으로 내 몰았다. 나는 차 안에서 그렇게 등 떠밀려 나온 구부정한 뒷모습의 아버지를 멀찍이 본 적이 있다. 문득 가물가물하게 잊혀가는 슬픈 흑백영화 속 한 장면처럼 어딘가 낯익었다. 나는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집에서 쫓겨나 갈 곳 없이 집 근처 골목을 아는 사람들을 피해 어슬렁거리던 열 살 무렵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버지에게서 그 무렵 내가 겹쳐 보였다.


내가 결혼하면서 집에서 나온 뒤로 엄마의 잔소리는 아버지를 향했다. 엄마에게는 잔소리가 살아가는 생명의 에너지라도 되는 듯했다.



“느이 아부지는 말이다. 저러구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누워있다. 허리두 안 아픈지 원~ 그래 누워있다고 뭐라구 하믄 듣기 싫으니께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는 하염없이 꿔다논 보릿자루마냥 또 앉아있는 겨~ 세상 돌아가는 것두 알아야 먹구사는디 도움이 될 거 아니냐? 눈 크게 뜨고 남들은 뭐 하구 사나~ 그러면서 남들 말두 듣구, 세상은 어찌 돌아가는지 텔레비전 뉴스두 좀 보구, 밖에 나가서 사람덜 하구 어울리기도 하구말여~ 남자는 그래야 하는 거 아녀?  앉는 것두 씨도둑질은 못한다구, 옛날에 신풍 사는 고모가 똑 저렇게 앉더니만, 넓은 방에서 왜 청승맞게 쪼그리구 앉는 건지. 아주 누가 한 엄마 자식들 아니랄까 봐 똑같다니께~ 그러니 속이 안 터지것냐?”  

   





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받은 아버지는 신장이 안 좋아서 투석을 해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 걸러 한 번씩 병원에 가야 했다. 어쩌다 혈압이 떨어지거나 몸무게가 많이 늘거나 하는 날에는 입원 치료를 받기도 했다. 건강하지 못한 아버지는 늘 주눅 들어 있었고 엄마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느이 아부지는 허구헌 날 병원에 가는 걸 무슨 어린애 소풍 가는 날 기다리듯 한다니~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는 거울두 보고 머리두 만지구 하면서 말여~ 내가 냄새나게 하구 다니라는 게 아니라, 어디 좋은데라 두 가는냥 들떠하니께 하는 소리여~ 그저 한 번 안 가믄 큰 일이라두 나는 것 마냥 시간 한 번을 안 어기구 시계 쳐다보구 있다가 신나서 나가는 거 보믄.. 참~ 지금까지 사는 걸 그와 같이 신경 썼으믄 오늘날 요 모양 요 꼴루다 살지는 않았을꺼여~ 어째 사람이 한결같지 않은가 그말이여~ 아이구~ 사는 거 지겹다. 아주 지겨워~ 언제까지 이렇게 살어야 한다니~”  

   

투석을 하는 아버지는 가려야 하는 음식도 많았고 주의사항도 많았다. 내가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것은 그때 아버지의 병간호를 전적으로 엄마에게 맡긴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나 연민, 하다못해 동정 따위도 찾아볼 수 없었던 엄마였다. 자신은 더 늙지도 병들지도 않을 것을 보장받은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내가 말했지? 말년에 느이 아부지가 듣도 보두 못한 괴상망측한 병들어서 속 무진장 썩이다 죽을 거라구... 내 말 틀린 거 봤니? 투석이라니? 너는 들어봤니? 나는 살다 살다 사람 피를 기계루 걸러줘야 하는 희한한 병이 있단 소리는 들어보지두 못했다. 내 팔자가 그럼 그렇지. 뭔 좋은 꼴을 보것다구 여태 살어갖구는...”  

   

엄마는 말을 독하게 해서 듣는 사람의 속을 후비는 재주가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투석을 받으러 간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급격하게 떨어진 아버지의 혈압이 돌아오지 않아서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연락을 받은 가족들은 모두들 병원으로 모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하루를 보낸 다음날이었다. 의사가 오늘 밤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가족들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한 사람씩 의식이 사라져 가는 아버지를 보러 들어갔다. 당연히 엄마가 먼저 들어가야 했지만 들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사람 봐서 머 한다니? 마지막이구 뭐구 난 니 아부지 보구 싶지 않다”  

   

오빠와 내가 들어갔다. 아버지는 눈을 뜨고 우리를 보았다. 그리고 눈으로 엄마를 찾았다. 내가 물었다.

      

“아부지, 엄마 들어오라구 할까?”    

 

아버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엄마를 부르러 나갔지만 끝내 엄마는 아버지를 보러 들어오지 않았다. 얼마 후, 의사가 건조하게 아버지의 마지막을 알렸다.

     

나는 온기 없이 깡마른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무엇이든 다 미안하다. 이해는 하는 거지만 용서는 되는 거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날 아버지에게 들어가 보지 않은 엄마를 나는 이해할 수 없고 용서도 되지 않는다. 지금도 엄마를 찾던 아버지의 눈빛이 떠오를 때면 코끝이 맵고 가슴이 저릿하다. 아버지와 46년을 함께 산 엄마였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꼭 그렇게 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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