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속속들이 알아야 행복한 게 아니다 - Riomaggiore
나의 여행에 빠지지 않는 묘미가 있다. 물론 나 말고도 많은 여행자가 즐기는 기법이겠지만, 나는 이 부분을 여행의 과정 중에서도 특히나 사랑한다. 그것은 바로 길 잃기. 실제로 길을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이탈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계획에게 허용한다. 우리의 의식은 때로 너무 말이 많다. 여행의 성공- 누가 정의해주는가 -을 위해서, 가성비를 생각해서 자꾸만 참견을 한다. 어디도 가봐야 하지 않겠어? 여기는 다들 가던데?
의식이 조잘조잘 떠드는 '성공적인 여행'이라고 해봐야 손가락 몇 번 움직여 어렵지 않게 찾은 정보일 것이다. 그곳을 들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철썩 믿을 정도로 어떻게 그렇게 순진하니. 그렇게 과감하게 자율주행 모드를 켠다. 목적지 없이 갤러리를 걷듯 마을을 감상한다. 그러다가 어느 햇살이 비치는 골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거리 이름도 읽어내지 못하는 바보지만 그렇기에 여행의 신선함은 더 향긋해진다.
그러다가 허기를 느끼는 순간이 찾아오면, 레스토랑을 찾는다. 나를 부르는 곳으로. 이름 모를 골목에서 내가 자리한 식당은 분명 '가지 않으면 후회할 명소'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우연은 종종 그 골목을 '오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골목'으로 만들기도 한다. 우리 사는 모습도 그렇지 않은가. 제 딴에는 계획을 타이트하게 세워서 마음을 미리 쓸어내리지만, 지금 우리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대화를 나눠보아야 할 현인'이나 '우연히 만나면 땡잡은 유명인'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내가 던져진다면 나는 그들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골목 사이를 흘러 흘러 다니다 발견한 어느 작은 광장. 그 동네에 거주하시는 듯한 가족 분들이 소중한 저녁 시간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도 계획적으로 만나지 않았겠지. 바닥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천진하다. 나도 그랬었는데. 지금의 나는 바닥에 돌 혹은 나뭇가지로 열심히 그리거나 쓰거나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는 의미 없는 낙서로 보일지 몰라도, 그들의 한 획 한 획은 기쁨을 담고 있다. 소중하다. 많은 어른들이 잃어버리고 마는 환희의 기술.
종교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 이야기는 훌륭한 비유를 담는다.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는 열매를 먹고는 낙원에서 추방당하는 두 남녀. 억울했을까? 좋음과 나쁨이라는 것은 가장 간편한 판단의 척도다. 그렇기에 효과적이면서, 파괴적이고, 매혹적이다. 좋고 나쁨의 프레임을 씌우는 순간, 판단을 위해 우리의 의식을 활용하는 순간 많은 환희의 대상은 평가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아름다움이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물과 사건들이 그저 윤리적 검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를 완전히 탈피하기는 어렵다. 좋고 나쁨을 통해 우리는 위험한 것을 알아야 생명과 건강을 지킬 수 있다. 또 그런 구분을 통하여 함께 모여사는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합의하고 약속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에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의식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을 뿐, 이를 매 순간 모든 대상에 활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축복은 저주로 돌변한다.
나에게는 여행도 인생도 그렇다. 판단할 대상과 그 근거는 너무나도 많지만, 돋보기를 의식적으로 내려놓는다. 돋보기를 드는 순간 추해지는, 아니 추하게 보이는 것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그런 추함을 들여다보고서도 사랑할 용기가 있는 넓은 가슴의 소유자가 아니기에 나는 이를 내려놓는다. 내가 무언가를 힘껏 찰 튼튼한 다리를 지녔다고 해서 길거리에 있는 모든 것을 뻥뻥 찰 필요는 없다. 아이들과 놀아 줄 축구공이면 충분하다. 오늘도 다시 생각해본다. 내가 남용하고 있는 나의 힘은 무엇인가. 혹은 충분히 활용하고 있지 않은 축복은 무엇인가. 그렇게 나와 세상을 배워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