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향한 일상의 고군분투를 그리며
힘껏 포물선을 그린다. 몸과 마음을 다해 노력한다. 이 분투는 매일의 일상에서 쉽게 반복된다. 무언가를 잡으려 땀을 뻘뻘 흘린다. 한껏 긴장해서는 다음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나의 채집 활동을 방해하는 이가 있으면 당연하게도 성가시게 느껴진다. 행복을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우리의 애씀은 때론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마음은 항상 힘을 쓰고 있다.
우리는 행복의 모양을 모른다. 그 색깔도, 소리도, 그 냄새도 모른다. 누구도 정의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는 매일 낚는다. 결과를 내기 위해 스스로를, 그리고 남을 보챈다. 행복은 도파민에 불과할까? 그저 뇌 속에서 일어나는 보상적 체계에 의한 화학작용에 그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행복을 규명한다고 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순 없다. 누군가는 행복의 생김새가 반짝이는 황금빛이며, 누군가는 행복의 냄새가 커피 향이 난다고 한다. 사실 무언가가 행복인 것이 아니라, 행복은 무엇에든 스며들어 있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잠자리채로 사냥에 나선다. 작은 움직임도 힘껏 손을 휘두른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뭐라도 걸리겠지. 실제로 어느 날은 무언가가 망 안에 들어있기도 하고, 어느 날은 허탕을 친다. 그렇게 무더위와 풀독 오른 통증을 참아가며 기를 쓴다. 이게 맞나 싶은 마음을 '버티기'리는 이름으로 애써 잊는다. 아니 잊기도 전에 귀를 막아버린다. 그런 회의감에도 무뎌지고, 익숙해지고, 어느 순간 감각할 수조차 없다.
다 같이 채를 휘두르고 있으면 적어도 바보 같아 보이는 사람은 없다. 또 모두가 고통 속에 작대기를 휘두르고 있으니 왠지 마음에 위안이 찾아온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그들의 뒤편으로는 맑은 개울이 흐르지만, 누구도 그 찬물에 발을 담글 여유는 없다. 그늘 및 흐르는 물에 몸을 식히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볼 시간도, 의지도 없다. 그런 '쉬운' 방법으로 고귀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고 믿음을 다시 다진다.
처음에는 행복을 위해서였던 나의 행동, 소비, 그리고 고통에 대한 인내가 어느 순간 목적 그 자체로 둔갑한다. 기쁨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기쁨의 대체품이 되어 버린다. 그 자체에 중독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의 고통과 행복의 대체품을 저울질하며 그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다. 나는 이만큼 힘들었으니 그만큼 누릴 자격이 있어. 내가 바라는 그것이 사실은 모조품이라는, 그리고 더 가벼운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계산의 과정에서 까맣게 잊힌다.
채를 멈추면 무리에서 바보가 되기에 그만둘 수 없다. 다른 모습을 취한다는 것은 쉽게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험이 찾아왔을 때 무리에서 보호받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일으킨다. 하지만 반대로 의무감에 채를 휘두른다고 해서 누군가 나의 손에 행복을 쥐어 주는 것은 아니다. 한편 또 하나의 공포는, 그들과 같이 채를 서두르지 않으면 팔이 허전하다는 사실이다.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 버린 그 막대기를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되어버린 내가 공허하다. 채가 부러지고 낡아서야 이를 멈출까. 지친 팔과 흙 묻은 얼굴만 남기고서 말이다.
지금 바로는 어렵겠지만, 조금씩 그 연습을 해본다. 지금 나에게 진정 필요한 게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한 가장 현명한 방법은 무엇인지. 무작정 팔을 휘두르며 에너지를 소진하기보다는 나의 직관을 믿고 결정할 시간을 준다. 또 내가 무언가를 갖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또한 검토한다. 이미 내 앞 주머니에 담긴 열쇠를 풀밭에서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