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학교에는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있다. 어린 친구들도 있고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도 있고, 한국어 수업을 듣는 학생 중 한 명은 이 학교의 선생님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이 펼쳐지곤 하는데 오늘은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몇 명의 학생들이 조별 과제(뭐, 비슷한 것)를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아주 아주 어린아이가 한 명이 껴있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학생은 아니었을 것이고, 학생 중 한 명이 데려온 자신의 아이 혹은 가족 혹은 모종의 이유로 돌보고 있는 아이였을 것이다. 그 장면이 나에게는 아주 깊이 와서 박혔는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면 아마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상상도 못 했던 풍경이어서 그랬겠지. 음, 만약 한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에타나 네이트판이나 그런 곳에 글이 올라오고 맘충이라고 욕을 먹었겠지. 이런 상상을 하니 숨이 막혔다.
이런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건 두 가지 전제가 된다는 뜻일 거다. 첫 번째는 어떤 직업을 가진 어떤 연령대의 사람도 자신이 배우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면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조별과제에 자신의 아이를 데려오는 상황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고 불편하지 않는 상황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아이슬란드에 살면서 좋은 자연환경과 높은 임금보다도 부러운 것이 바로 이러한 인식이다.
며칠 전에는 독일을 다녀왔는데 거기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역 근처의 푸드코트 같은 곳이었고 아주 어린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그 안의 어떠한 사람도 불편한 내색을 비추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아이들 바로 맞은편에 앉아있는 테이블에는 세명의 할아버지가 앉아있었는데 정말 눈하나 깜빡하지도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받아들여지는 풍경이 낯설었다. 그 자리에서 아이들을 계속 의식하는 사람은 나와 내 친구뿐이었다.
조별과제에 아이를 데려오는 것, 식당에서 아이들에게 눈치를 주지 않는 것. 단지 이 두 개의 상황만으로도 그 사회가 가지는 표용력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나도 아이였던 적이 있고 언젠가는 노인이 될 텐데.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장애인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아이가 퀴어일 수도 있는데. 나는 정말 사회의 눈초리로부터 영원히 안전한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겠지. 나도 언젠가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날이 오겠지. 그런 생각이 들고는 꽤나 슬퍼졌다. 나는 얼마나 포용력이 낮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