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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강 Aug 23. 2024

깜지

세상의 모든 신입들에게

 솨아아아

 대로변을 달리는 차들의 바퀴가 빗물을 흩뿌리며 내는 시원한 소리를 들으며 인석은 넌지시 창 밖을 보고 있다. 

인석은 비 오는 날의 공기가 좋다. 

오는 둥 마는 둥 하는 안개비 말고 진한 부슬비가, 오롯이 들리는 딱 오늘 같은 날씨를 좋아했다. 


"스읍ㅡ, 후우"


반가운 비 소식에, 기분 전환을 할 겸 즐겨 찾는 프랜차이즈 카페의 통유리 편 자리에 앉았으나 도통 마음이 풀리지 않아 크게 한숨을 내뱉어 본다. 오후 내내 윗년차 선배들에게 받았던 벌과 꾸지람에 여전히 분이 가시질 않는다. 


"아니, 그 별 것 아닌 것으로 이렇게 까지 할 일이야? 이 나이에 깜지라니."


 성형외과 전공의 1년 차인 그는 환자 명부 정리부터 수술방 준비까지 모든 잡다한 일들을 도맡아 하고 있었고, 환자 명부의 사소한 오탈자나 띄어쓰기가 잘 못 표기 되어 있을 때면 으레 불호령이 떨어졌다. 꼼꼼하고 세심한 성형외과 전문의가 되기 위한 기본 소양이라나. 인석은 선배들이 신입 기강을 잡고 부러 혼을 내기 위한 똥군기라고 보았다. 

 엉덩이를 걸터앉아 비스듬히 등을 기댄 인석은 통유리를 타고 흐르는 빗방울들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반성문 깜지를 쓰느라 고생한 오른손을 연신 주무른다. 테이블 위에는 읽다 만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엎어져 있다. 인석은 소설을 좋아했다. 고전문학부터 현대소설까지 다양하게. 고3 때는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이 나오는 SF 시리즈 소설로 입시를 버텨냈고 의대생 때는 알랭 드 보통의 말랑말랑한 연애소설을 탐독했다. 

 특히 의사가 나오는 줄거리를 좋아했는데, 개중에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을 가장 좋아하여 책장에 손때가 타도록 읽었다. 주인공인 외과 의사 토마시가 여성 편력이 심하여 여자친구 테레자의 질책에도 수없이 외도를 일삼는 대목에서 책을 내려놓은 인석은 상념에 빠진 채 창 밖을 보았다. 보수적인 의사 집단에서 상대적으로 연애를 많이 해본 그는 토마시에게 캐릭터에 대한 애정을 넘어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과거의 여자친구들을 하나 둘 떠올리며 묘한 즐거움에 빠지려던 찰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그를 깨운다. 


'R3 김 OO'


 전공의(레지던트) 3년 차를 뜻하는 R3 표시에 가슴이 짓눌리는 것을 느꼈지만, 전화벨이 두 번이 채 울리기 전에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ㅡ. 선생님!"


 한껏 밝고 당당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인석은 자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전화를 받은 사실에 당황하여, 주변 시선을 살피며 멋쩍게 의자에 앉았다. 


"응. 너 병원 근처지? 내일 첫 수술 환자 입원했을 텐데 네가 가서 수술 동의서 좀 받아줘. 구체적인 설명은 내가 외래 진료 때 다 해놓았으니 간단할 거야."


 불과 두 시간 전만 해도 명부 정리를 이따위로 하냐며 바득바득 소리 지르던 일은 잊어버린 듯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부탁을 가장한 지시를 내린다. 저녁 내내 깜지를 써서 제출하래 놓고 본인은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  본인도 자신이 해야 할 수술 설명을 나한테 맡기는 것이 미안했던지 혼낼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에 인석은 더 얄밉다.

그치만 어떡해. 앞으로 몇 년은 같이 일해야 하는 걸. 주섬주섬 책과 우산을 챙겨들며 인석은 세상의 모든 신입들이 해봤을 다짐을 했다.


"두고 봐. 내가 윗 연차가 되는 날엔 책임지고 불합리한 모든 것들을 없애 버릴 거야. 아랫년차 후배들도 자상하게 챙기고 잘 모르면 친절하게 가르쳐 줘야지."


 병원에 도착하여 바짓단의 빗물을 털어내고 가운을 챙겨 입은 후 병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정형외과 같은 연차 전공의인 진성이 병실 복도 끝에서 걸어온다. 유쾌한 성격의 진성은 능글맞은 입담으로 같이 일하는 병원 직원들과 사이가 좋았다. 다만 가끔 그 특유의 넉살이 짓궂을 때도 있다. 


"야. 인석! 너 오늘 엄청 깨졌다며, 괜찮냐? 캬하하. 깜지 쓰느라 펜 하나를 다 썼다던데?"


 인석은 대꾸도 하기 귀찮다는 듯 일부러 게슴츠레한 눈으로 진성을 쳐다보며 오른손 중지를 추켜올려 소리 없는 욕설을 날려 보냈다.


"낄낄. 야 됐어. 그거만 설명하고 병원 앞 치킨집으로 와. 윤정이하고 맥주 한잔 하기로 했어."

"오 정말요? 맥주 엄청 당긴다 오늘. 나 줘 터진 거 알면 형이 한잔 사요."

"알았어. 알았어. 얼른 내려와"


 동기들에 비에 나이가 많은 진성은 같은 일 년 차임에도 힘든 기색을 잘 내비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교수님들이나 타과 윗년차들 사이에서도 사회생활 잘한다며 평이 좋았지만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큰 형 같은 무게감이 있었다. 조금 전에도 축 쳐진 인석의 어깨를 보고 기운을 내주려 짓궂은 소릴 했다는 것을, 일부러 자리를 만들어 맥주 한 잔에 털어 낼 수 있게 했다는 것을 인석도 알고 있다. 미워할 수 없는 형이다. 


<이미지 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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