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중요한 사람이고 싶다.
웃지 않으면 진중함이 돋보이는 턱과 날 선 눈매 덕에 인석의 인상은 호감 가는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또 그 덕분에 환하게 웃을 때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경계를 풀고 편안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가지런한 윗니가 시원하게 다 드러나고도 양 옆에 입동굴이 생길 만큼 큰 미소와 언제 날을 세웠냐는 듯이 잔뜩 꼬리 내리는 눈웃음은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인석 자신도 귀가 닳도록 들은 엄마 잔소리에 익히 알고 있었다.
"인석이 니는 좀 웃어야 된데이. 느그 아빠 닮아갖고 인상이 험해가 안 웃으면 영 몬 쓴데이."
"아아따, 우리 아들 웃으믄 참 이쁘네."
감정적으로 조금 미성숙하고, 푼수 같은 인석의 어머니는 눈치 없이 하고 싶은 말 [예를 들면 아들의 인상 지적] 은 해야 하는 편이었기에 가까운 친구가 많이 없었다. 그래서 줄곧 당신의 첫째 아들에게 이런저런 하소연과 남편에게 하지 못한 '뒷담'을 실컷 하는 편이었고 그렇게 인석은 어려서부터 여자의 말에 대해 공감하고 경청하는 법에 대해 조기 교육을 받았다. 대개 부부사이가 소원하고 아들만 있는 집에 딸 노릇을 하는 아들이 꼭 하나 있다 하듯이, 인석이 그랬다.
"느그 아빠는 매앤 그런 소리만 한다이가. 현상을 보지 말고 본질을 보라카질 않나. 책 읽고 교양을 갖추라카질 않나. 교양? 웃기고 자빠짓네. 지는 교양이 있어가 맨날천날 술 묵고 돌아 댕기나?"
"하하. 그래 맞다. 아빠가 좀 꼰대 스타일이긴 해. 엄마만 고생이지 뭐."
"쯧. 아이다 그래도 아빠만 한 사람 읎다. 혼자 저리 벌어가 애 셋을 키웠제, 또 의대 등록금이 어디 쫌 비싸나? 엄마는 또 아빠 덕에 이래 좋은 집 산다 아이가. 안 글나?"
"으응 그래. 나도 등록금 걱정 한번 안 하게 해 줘서 엄마 아빠한테 감사하게 해. 훌륭하지. 우리 아빠"
"엄마는 이래 니랑 카페도 오고 하니까 아들이랑 연애하는 거 같고 진짜 좋네. 딴 집 애들은 이래 안한데이. 엄마 옆에서 손도 안 잡는다 카드라. 아이고오 우리 아들 언제 커 갖고 여자친구 손 따악 잡고 이런 카페 데리고 다니겠노. 니 여자들 취향도 잘 알아야 된데이. 이런 거 주문할 때도 뭐어를 좋아하는지 잘 봐봐 놓고, 알겠나 니"
인석의 어머니는 자신이 해보지 못한 연애, 가져보지 못한 남자에 대한 환상을 아들에게 주입시키곤 했다. 학원 사업 특성상 남편은 오후에 출근하여 밤늦게 돌아왔으므로 이십 년간 저녁을 함께 한 날이 거의 없었고, 신중하고 무거운 입은 사업을 일구는 데는 훌륭했지만 부부 사이의 애정을 표현하는 데는 서툴렀다. 요즘 남자는 아버지 같아서는 안된다며 일찍이 살아있는 현장 교육을 받은 인석은 저도 모르는 사이 여자의 호감을 얻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인석은 미소라는 무기와 함께 이름의 힘을 잘 이용했다. 대학병원에서는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운송 기사 등 대부분의 직원이 교대 근무이기에 십수 년간 근무한 교수와 간호사조차도 다른 부서의 직원 이름을 잘 알지 못한다. [규모 있는 여느 회사에서 마찬가지리라.]
"OS샘 [정형외과 전공의 선생님]. 선생님 환자 방금 입원했어요."
"저희 과 환자들은 보호자 면회 어렵다고 전해주세요. B파트 [병동] 파트장님."
조직의 일원으로서 효율적인 업무와 의사소통을 위한 호칭이겠지만, 아무래도 '나'라는 개인에 대한 특수성은 잃어버린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식으로 일을 하고, 어떤 성품인지는 차치하더라도 가장 중요한 '나는 누구인가'의 기본인 이름조차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8번 베드 담당 간호사 누구예요? 급해요. 오더 [처방] 빨리 받아주세요."
당장 응급실 8번 베드의 급성 신우신염 환자를 입원시키기 위해서, 내과 의사에게 필요한 8번 담당 간호사는 혜지든, 수미든, 소현이든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이름과 함께 개인의 유일성, 특수성은 잃어버렸지만 직장을 잃을 수는 없기에 다들 아무렇지 않게 이러한 폭압에 순종했다. 처방을 내린 내과의사도, 후다닥 처방을 받는 소현도 아무런 잘못됨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반대로, 인석은 간단한 방법으로 유일성을 느끼게 해 주었다.
"소현선생님! 나이트 [3교대 근무는 데이, 나이트, 이브닝으로 나뉜다] 신 가봐요. 바쁘네요 오늘도"
"바쁘죠 그럼. PS [성형외과] 오늘 여유롭나 봐요, 웃고 다니시는 거 보니."
응급실은 모든 과를 망라하여 환자들과 직원들이 북적북적한 곳이었고 업무의 효율성을 위해 서로 다른 부서의 직원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가 더욱 어려웠기에, 인석이 이름을 부를 때면 상대방은 잠시 갸우뚱하곤 했다가 보다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시인 김춘수는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했던가. 직장에서 꽃이 될 수는 없었지만, 상대방은 이런 인석에게 꽃처럼 잘 대해주었다.
인석은 지위고하, 남녀를 막론하고 될 수 있다면 이름을 외우려 노력했다. 담당 간호사를 부르기 전엔 컴퓨터 처방창을 통해 간호사 이름을 확인했고, 병동에 갈 때면 화이트보드의 교대 근무표를 봐 뒀다 출근하는 조무사 여사님들께 이름을 부르며 인사했다.
"장형 기사님. 요 며칠 안보이시던데요. 덩치 큰 기사님 없어서 응급실이 허전했어요, 하하."
"아이 왜 그렇게 날 찾아. 이놈의 인기는. 허리가 아파서 좀 쉬었어, 인제 나이 드니깐 하루하루 힘들어."
"인석쌤. 결혼하기 전에 돈 많이 쓰고 즐겨. 결혼하면 나처럼 용돈 받고 살아야 해."
"하하. 전 그래서 비혼주의예요. 석훈샘은 그래도 결혼 잘했다고 소문이 자자한데요, 뭘."
몇 차례 인석이 작은 세심함을 보이고 나면, 병원의 남자 직원들도 인석을 어려워하지 않고 대했고 멀리서 인석이 나타날 때면 그와 친분이 있음을 과시라도 하듯 먼저 인사를 했다. 이름의 힘은 강력했고 그 힘은 인석의 미소와 함께 할 때면 배가 되었다. 다만, 몇 감성 충만한 신규 간호사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한다.
"슬비선생님. 방금 접수된 환자 처치실로 넣어줘요."
"어? 네."
당황한 기색에 괜히 샐쭉하게 대답하는 경우 '뭐야. 내 이름을 알고 있네? 눈여겨보고 있었나.' 라거나 '플러팅 [Flirting;희롱하다, 추파를 던지다] 인가? 여자관계가 복잡한 선생님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백 년 전, '인간관계론'의 데일 카네기가 했던 중요한 말이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중요한 사람인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 실제로 인류 역사에 남을 일이나 세대를 넘어 기릴 업적을 이루지 않았더라도,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이 우주에서 대체 불가능한 한 사람이길 바란다.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단 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의미 있는 중요한 사람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다. 물론 이름의 힘 또한 이 욕구에서 비롯된다.
인석은 데일 카네기를 잘 알지 못했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를 경험으로부터 알고 있었고 지나간 많은 연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수 있었다.
"우와. 너 눈동자 색 되게 이쁘다. 연한 고동색이야!"
"넌 손이 조그맣고 손가락들이 가늘어서 손 잡기 편해. 내 손이랑 딱 잘 맞네."
"여기서 네 무릎을 베고 누워서 보잖아? 그럼 콧구멍이 귀여운 하트 모양이야. 너 코 이쁜 건 남들도 알겠지만 콧구멍이 하트 모양인 건 온 우주에서 나밖에 모를 거야."
거의 모든 한국인들은 눈동자가 갈색 [달리 말하면 연한 고동색일 수도]이고, 대부분 여자들의 손은 인석의 손보다 작았으며, 콧구멍은 다들 조금씩은 일그러진 타원형이다. 하지만 세상의 누군가가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는 이런 하찮은 특징들은 인석이 불러줌으로써 꽃이 되었다. 여자들은 연인에게만큼은 특별하고 중요한 사람이 되었고 '뭐래애. 이상한 소리 하지 마' 하며 흘려듣는 척했지만, 그날 저녁 양손을 섬섬옥수 마냥 작게 오므리고 들여다보거나 콧구멍을 보려고 목을 젖혀 손거울을 코 밑에 들이대 보며 다리를 배배 꼬았다.
인석은 어릴 적 조기 교육으로 배운 주입식 다정함으로 어렵지 않게 연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지만 그만큼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며 여자친구들을 만났지만 정작 본인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느낌을 받지 못한 것이다.
"결혼할 사람을 딱 보면 '와, 이 사람이다!' 느낌이 온다는데, 난 그런 게 없어. 그래서 비혼주의야."
여자친구들을 만나면 만날 수록 결혼에 대한 집착과 목적성만 느꼈지, 평생을 함께 하고 싶고 나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석은 비혼주의를 택했다. 아 물론, 그의 직업적 배경과 다정함을 무기로 늙어서도 화려한 여성 편력을 누리려는 의도 또한 다분했다.
관계의 무게중심에서 언제나 약간 우위에 있던 인석은 자유롭게 만남의 빈도와 연인으로서의 의무를 정할 수 있었다. 남자친구로서의 헌신과 의무를 강요당할 때면, 연인이 주는 즐거움과 그녀의 매력을 저울질하다가 이내 관계를 끝내곤 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또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봐 주는 인석에게 설레는 심장을 한껏 바치려는 새로운 이성을 만났고, 인석은 낯선 매력을 세심하게 짚어주면서 탐닉하는 즐거움에 빠졌다.
밖에서 인석은 재치 있고 매력 넘치는 사람으로 비추어졌고 그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으로 보였지만, 혼자 사는 고요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풀썩 엎어질 때면 이따금 원인 모를 외로움이 사무치게 밀려온다. 호젓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창 밖으로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인석의 눈동자에는 저녁노을에 반짝이는 양털구름과 함께 공허함이 잔뜩 들었다.
"후우. 다음 달에는 헤어져야지. 당분간 혼자 지내야겠어."
<이미지 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