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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강 Sep 10. 2024

관능적인가 얄미운가의 문제

능숙함은 연애의 역사에서 배양된다


"흐응흐응~. 나난나"


 은영은 이번 주 내내 둥실둥실 구름 속을 유영하는 기분이다. 지점장님 소개로 이틀 전 주말에 만난 남자가 꽤 마음에 들어서다. 지난달 회식 때 술이 잔뜩 취했던 지점장님은 도로 경계석에 발이 걸려 넘어지면서 얼굴을 부딪혀 광대뼈가 골절되었고, 가까운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입원 당시 주치의였던 젊은 성형외과 의사가 참 싹싹하고 인상이 좋더라며 저더러 만나보라던 것을 은영이 몇 차례 거절했었다. 술배가 볼록한 50대 아저씨의 안목을 믿을 수 없기도 했고, 그의 직업이 부담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성형외과 의사라니. 내 얼굴을 조목조목 보면서 견적 낼 것 같잖아.'


 그랬던 은영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아, 보름 전에 진작 만나볼걸. 사람은 보고 판단했어야 하는데' 하며 행복한 후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고객 신용평가 서류를 띄워 놓기만 한 모니터 한가운데를 멍하니 바라보며 손톱을 잘근잘근 뜯는다.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서 배시시 새어 나온다. 은영은 은행에서 일하는 자신의 월급으로는 부담스러운 가격대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의 낭만적 분위기를 다시금 음미하는 중이다. 



 그날, 그는 딱딱한 첫인상과는 달리 은영이 가게 직원의 안내에 따라 테이블 앞에 서자마자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보이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름이 강인석 이라던 당당하지만 차분한 그의 소개는 이름만큼이나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메뉴를 주문하는 데에도 막힘없이 자연스러웠다.


"미디엄 레어 괜찮으세요? 저는 너무 익히면 질기더라고요. 파스타 좋아하신다 하셨는데 여기 파스타 맛있어요. 골라보세요."

"아, 저는 다 괜찮아요. 여기 '베스트' 쓰여 있는 까르보나라로 할게요."

"여기 와인도 나오는데 산미 조금 있는 것도 괜찮아요? 레드 와인이라 스테이크랑은 잘 맞을 거예요."

"네, 와인 다 좋아해요 저. 호호"

"엇, 오늘 잔뜩 마시려고 작정하신 건 아니죠? 하하. [직원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며] 여기 메뉴에 피노-누아는 브루고뉴산 인가요? 두 잔 주세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맞서는 것보다 맞춰주는 것이 편했던 은영은 평소 친구들과 만나서도 '아무거나'를 주문했고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어디든 잘 따라다니는 편이었다. 본인의 성격이 유하고 까탈스럽지 않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자신의 색깔이 뚜렷한 인석 앞에서는 고리타분하고 매력 없는 사람이 된 느낌을 받았다. 반대로, 물 흐르듯 모든 것에 자신 있어 보였던 인석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뚜렷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드러내며 매력을 발산했다. 


 여러 개의 크고 작은 포크와 숟가락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은영은 바깥에서부터 하나씩 쓰라며 친절히 알려주는 인석이 고마웠고 한편으로는 이런 상식이 부족해 보일까 봐 부끄러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인석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 보였고, 긴 손가락으로 은빛 포크와 나이프를 이용해 간결한 동작으로 스테이크를 써는 모습은 관능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와, 나이프를 엄청 잘 쓰시네요. 지금 수술하는 것처럼 칼질하는 것 아니에요? 깔깔"

"아, 네. 앞으로 저랑 있으면 힘들게 고기 썰지 않아도 돼요. 하하"



 전채 요리부터 수프, 식전 빵에 이어 메인까지 음식들은 완벽했고 인석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두 사람은 공감대 형성이 쉬웠다. 와인 한 잔에 부쩍 용기가 오른 은영은 인석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서로의 취미와 취향까지 주고받는 감미로운 탐색전을 이어 갔다. 


"정말 그렇다니까요. 특히 은행 오시는 나이 든 어르신들 중에 현금이 어마어마하신 분들이 간혹 있는데 되게 명령조로 말해요. 나 줄 것도 아니면서."

"하하. 그러게요. 한 백만 원 주면 모를까."

"참, 쉬는 날엔 영화 자주 본다 그랬죠? 제일 재밌게 본 영화는 뭐예요?"

"음, 오래된 영화인데 비포 시리즈라고 알아요? 비포 선라이즈, 선셋, 미드나잇인데 그중에 1편 [비포 선라이즈]를 제일 좋아해요. 분위기도 되게 낭만적이고 그렇게 잔잔하게 설렐 수가 없어요."


 은영은 얼마 전 개봉한 [범죄도시]를 재밌게 봤으며 속편도 꼭 볼 것이라 말하려던 것을 삼키고 인석이 얘기해 주는 외국 영화 줄거리를 들으며 입술을 바라보았다. 취향에는 옳고 그름이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 취향은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랬다. 유럽 횡단 열차에서의 우연한 만남, 그리고 그들이 오스트리아 프라터의 대관람차 안에서 했던 키스처럼 아름다운 키스를 꿈꾼다는 인석은 고상한 로맨티시스트 같았고 나긋한 톤으로 '줄리 델피'를 소개하면서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가 '피'를 'F'로 발음하는 게 섹시하다 생각했다. 


"은영 씨는 재즈 좋아한댔죠? 괜찮으면 다음에 저랑 성수동에서 만나요. 핫한 재즈바가 하나 있는데 라이브 재즈 공연도 하고 괜찮은 와인도 많아요. 은영 씨가 좋아하는 음주가무 다 있네요. 재즈랑 와인이랑, 하하하"

"아닛, 와인 막 그렇게 엄청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도 라이브 공연 좋아요! 엄청 멋질 것 같아요."


 '포지티브' 니 '라운지' 니 재즈바의 이름은 기억 못 했지만 이쯤 되니 이 남자가 가는 곳, 즐기는 취미는 죄다 트렌디하고 분위기 있어 보였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조금 더 '보편적인' 은영의 취향에도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공감해 주었다. 모든 것에 능숙하고 감성적으로 리드해 줄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은 은영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렇게 낭만적인 만남을 보낸 지 한 달여가 지나고, 겨울이 되어 해가 짧아질 무렵이었다. 저녁식사를 함께 한 이른 밤이었지만 어스름이 내려 공원 곳곳에 가로등이 켜졌다. 인석과 은영은 공원을 거닐다 한강변에 보이는 벤치에 앉아 서로의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며 다음 주에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벤치는 길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어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았고 가로등의 불빛도 닿지 않기는 마찬 가지였다.


"으으, 춥다 그치? 겨울이라 날이 금세 어두워지네. 저편에서는 여기 벤치에 사람이 보이지도 않겠어"

"어어? 이것 봐. 어두워서 안 보이면 뭐 하려고, 음흉하게."


 은영은 재치 있게 농담을 던지려 했으나 눈치 없는 양 볼이 한없이 발그레지는 바람에 눈을 피하고 고개를 떨구려 했다. 인석은 그 모습이 귀여운지 씩 웃고는 살며시 손바닥을 은영의 턱에 대어 고개를 들도록 했다. 유난히 큰 그의 입은 장난기 머금은 미소를 보내다가 서서히 다물어지며 침을 한번 삼켰다. 순간 두 눈이 마주쳤지만 은영의 눈동자는 또 한 번 갈 곳을 잃고 인석의 양 눈을 번갈아 쳐다보며 떨었다. 몇 초간 지그시 쳐다보던 그는 은영의 턱을 당겨 입술로 가져왔고 그 바람에 은영의 얼굴은 비스듬히 기울었다. 인석의 가지런한 손가락은 턱에서 귀 뒤로 옮겨 가 목덜미에 놓였고 부드럽게 뒷목을 눌러 쥐었다. 앞에선 인석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얕은 숨결을 내뱉었으니 조화로운 동작은 은영의 숨을 멎게 했다. 어쩔 줄 모르고 눈을  딱 감은 채 굳어버렸으나 인석은 미세하게 입술을 놀려 은영의 굳어버린 입술을 풀어주고 천천히 벌려 키스했다. 그제야 은영은 힘을 풀고 뒷목에 놓인 인석의 손에 머리를 맡기었고 반대편 팔이 받쳐주는 대로 허리를 젖히어 키스에 응했다. 영원 같았던 그 짧은 몇 분간 은영은 프라터로 날아가 줄리 델피가 되어 인석과 첫 키스를 했다. 



 그날 공원 벤치에서의 몽환적인 분위기와 그의 손길, 그리고 입술이 입술을 훑는 움직임을 떠올리니 은영의 아랫배가 은밀하게 죄여 온다.


"야! 야! 채은영! 커피 받아왔더니 이렇게 멍 때리고 있어?"

"어? 아! 미안, 난희야. 잠시 딴생각하느라."

"키키. 그래 어디 한번 얘기해 봐. 이번에 사귄 남자친구는 어때? 막 그렇게 멍 해지도록 좋냐?"

"좋아, 엄청 좋은데. 진짜로 멍 해지는 때가 많아."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멍 해진다니."

"음, 뭐든지 다 잘하고 능숙한 것 같아. 그게 되게 멋있고 섹시하긴 한데, 가끔 내가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란 사슴' 같이 얼어붙어서 문제야."

"지금 네가 사슴 같다는 말을 하는 거지? 남자친구 사귀더니 현실 감각이 없어지네, 얘가"

"아니, 농담 말고. 정말 항상 자신감 넘치고 다 잘해. 나이는 내가 윈데 훨씬 오빠 같아."

"오, 그럼 키스도 잘해? 그런 거면 연애 경험이 엄청 많거나 선수인거지, 맞네 그거네."


 얄미운 년. 난희는 꼭 그렇게 환상을 깨트리는 데 재주가 있더라.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충분히 일리 있다. 관계를 잘 리드하고 연애의 행위에 능숙한 이성은 분명 관능적이지만 그 능숙함은 '연애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사람이 뭐든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고 처음부터 다 알고 있지는 못한다. 불과 30분 전까지 인석과의 키스를 떠올리며 연신 입술에 침을 바르던 은영은 불현듯 그의 과거가 궁금해지며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말도 잘하고 자신감 있고 능숙했던 것 보면 여자를 엄청 만났던 거야.' 

'아니 뭐 그게 어때서. 나도 첫 연애는 아니잖아? 멀끔하게 생겼고 직업도 좋고 센스도 있는데 모쏠인 게 더 이상하지. 엉뚱한 생각말자, 괜히 과거사 꼬치꼬치 캐물었다가 그가 나한테 질려버리면 어떡해.'

'그런데 여기저기 핫플레이스는 어쩜 그렇게 잘 알지? 성수동 재즈바도 누군가랑 왔던 곳일까?'


 경험적으로 추론해 볼 때 지금껏 연애를 많이 해 본 사람은 높은 확률로 앞으로도 이성을 많이 만날 가능성이 높기에, 은영은 자신이 고작 인석의 연애 역사서에 중간 페이지 두어 장만을 장식할까 봐 겁이 났다. 너무 편집증적으로 비추어질까 봐 인석의 능숙함이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인석은 여자를 만날 때마다 매 순간 최선을 다 하는 편이었고 연인이 감탄하는 남자친구가 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시행착오와 경험들이 층층이 쌓여 그의 능숙함을 이루었다. 어쩌면 부모님의 영향 아래 성장했던 10대의 가치관을 제외하고 그 위에 쌓아 올린 대부분은, 심지어 취향과 말투, 습관 까지도 이성들을 만나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대학 신입생 때 만났던 세 살 터울의 선배 보영이 가장 좋아하던 영화가 [비포 선라이즈] 시리즈였다. 완연한 봄날, 침대에 엎드려 나란히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봄꽃향 짙은 애틋한 기억으로 남아있었으나 이를 혼동한 인석은 영화에 낭만적인 감상을 부여하였다. 

 바텐더로 일하며 소믈리에 자격증이 있던 한별 덕분에 잘 알지도 못하는 와인을 실컷 먹어보았고 그 이후로 그저 오묘한 루비색 때문에 피노 누아만 마셨다. 대표 원산지인 프랑스 지방 '브루고뉴'는 단지 섹시한 발음이 좋아 그의 허영심을 숙성시켰을 뿐 와인 숙성에 대한 그의 취향과는 관련이 없었다.

 키스할 때 뒷목을 받쳐 주니 기분이 좋다던 민지가 있었고, 위아래 입술을 번갈아 가며 입 맞추며 입술을 살며시 벌리면서 혀끝이 입술을 스치는 느낌이 야릇하다고 했던 승연도 영향을 주었다. 


 이렇듯 능숙함은 '연애의 역사'에서 배양되고 그렇기에 능숙함은 이성과의 관계가 나아감에 따라 관능적인 향수에서 씻을 수 없는 악취로 변하기 마련이다. 연애 초기에는 분명 연애 솜씨가 현란하고 세련된 인석이 섹시해 보였고 은영을 무방비하게 만드는 위협이었다. 하지만 연인으로서 가까워질수록, 인석의 지극히 개인적인 특성 (예를 들면 삼겹살을 먹을 때면 첫 쌈은 꼭 여자친구를 주는 습관이나 잠자리에서의 성적 취향) 이 만인의 것이 아닌 나만의 것이길 바라게 되면서 '능숙함'은 얄미운 악취가 된다. 익숙하고 잘 가꾸어진 이성의 매력에 흠뻑 빠져 나만의 것으로 만드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매력은 이전의 누군가에 의해 다듬어진 매력인 이상 나만의 것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능숙함과 완전함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능숙하지만 불완전한 인석은 이러한 악취를 완전히 씻어 낼 수 없었고 은연중에 말과 행동으로 배어 나오곤 했다. 


"오예, 오늘 웬일로 이렇게 여유로워? 아침 일찍 데리러 오기도 하고."

"요즘 입원 환자가 얼마 없어. 이전부터 너랑 봄 나들이 가고 싶어서 내가 일부러 환자 줄인 거야, 크크. 팔당댐 따라 벚꽃길이 이쁘다 그래서 오랜만에 차 가지고 왔어. 봄 냄새 실컷 맡고 분위기 맛집으로 가 보자."

"너무 좋아! 그럼 'DJ 채'의 봄봄봄 플레이리스트 갑니다~"


 자신의 아이폰을 차량 블루투스에 연결하려던 은영은 멈칫한다. 당황하면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놀란 사슴'이 되어버리는 은영의 버릇이 또 나타났다.


"어? '승연의 Iphone...?' 승연이 누구야?"


 말을 뱉어 놓자마자 은영은 속으로 탄식했다. '아, 그냥 무시하고 내 휴대폰만 연결하면 될 것을, 모처럼 기분 내서 데이트하러 나가는데 이게 뭐람' 하고.


"아아, 그거. 사실 이전에 잠깐 사귀었던 사람인데 내가 미처 블루투스 목록을 정리 못했네. 되게 오래전인데 차를 별로 안 써서 몰랐어. 미안해, 신경 쓰이게 해서"


 인석도 사슴이 될 만큼은 아니었지만 한 박자 쉬고 대답하는 속도에서, 또 평소와 달리 또박또박 말하는 톤에서 당황한 기색은 역력했다. 팔당댐으로 향하는 내내 차 내부의 공기는 도로 위 여느 차보다 무거웠고 유독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의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그저 그런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은영은 잘 들어갔냐는 인석의 연락에 답장하지 않고 휴대폰을 침대로 던졌다. 미처 지우지 못한 그의 과거가, 아니 어쩌면 지울 수 없는 그 냄새가 너무 얄밉다. 밉살스럽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나를 만났어야지 괘씸하게.

나는 왜 더 일찍 그를 만나지 못한 거야. 


 인석의 섹시한 분위기들이 씻을 수 없는 악취가 된 날이었다.


<이미지 출처;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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