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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강 Sep 17. 2024

내로남불

외설과 예술

 바쁜 서울 생활 와중에도 계절은 흘러 봄볕이 들기 시작했고, 인석에게도 봄이 찾아왔다. 올해 들어온 신규 전공의 한 명까지 해서 어느덧 세 명의 후배들이 생겼다. 이제는 제법 선임 전공의로서 자신감 같은 것이 생겨 당당한 어깨와 곳곳 한 허리로 다닐 수 있었고 노련하게 일을 하면서 후배 전공의들을 챙겼다. 이번 주말은 이틀 동안 부산에 다녀올 예정이라 그동안 병원을 지키고 입원 환자들을 잘 관리하도록 아랫 연차 선생님들을 주의시켰다. 은영에게도 주말은 남자친구와 온전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기에 인석은 남자친구로서가 아니라 가족으로서 주말을 보낼 수 있도록 어렵사리 양해를 구해 놓았다. 인석은 행여 부산에 내려 가 있는 동안 당직 선생님들이 자신을 찾는 전화를 할 세라 금요일임에도 업무를 인수 인계 하는데 여념이 없다.


"제가 말해 준 내용 잘 숙지했죠? 오늘 진즉 알려 준 내용 묻거나 당연히 해야 할 업무를 해야 하니 말아야 하니 등등 뻔한 전화 하지 마세요."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고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을 잊게 마련이다. 갓 신입 시절 윗 연차 선생님들께 호되게 당하며 했던 다짐을 잊은 것일까. 아직은 어리바리한 후임들의 모습에 인석은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


"선생님은 왜 안 받아 썼어요? 인계 사항 다 기억해요? 이제 2년 차라고 이거지. 신규 선생님 다 시키려고? 진짜 주말 오밤중에 어떻게 해야 하냐고 콜 하기만 해요. 한 주 내내 벌당 세울 거예요."


 이구동성으로 '네. 선생님-.' 하는 것을 등 뒤로 들으며 인석은 고개만큼이나 빳빳한 가운을 펄럭이며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위압감과 권위가 선임들의 필수 요건이라도 한 걸까. 어느새 인석은 과거 자신의 선임과 같은 고년차 전공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생명을 다루고 타인의 신체를 치료하는 일이라면 이 정도 엄격함은 필요하지.'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옷을 갈아입은 인석은 이내 주차장으로 향한다. 한 달여 전부터 동생 인호와 만나기로 약속해 형제의 회포를 풀기로 한 날이다. 인호는 인석의 막내 동생이다. 연년생인 인석인철 아래로 일곱 살 터울의 늦둥이 인호는 기질이 형들과는 달랐다. 자녀가 둘 이상 있는 집이면 종종 애물단지 같은 자식이 있게 마련이었는데 인호가 그랬다. 나이 터울이 비슷한 두 형들에게 부모님이 공을 들여 입시를 치르는 동안 아무래도 막내에겐 신경을 못 써 주었기도 했고, 늦둥이 막내였기에 이뻐라 하며 재간둥이로만 키운 점도 있었다. 형들과의 비교 열위에서 인정받지 못한 설움과 감정적 결핍 아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인호는 성적에 맞추어 간 대학을 한 학기만에 그만두고 날름 부산으로 떠났다.


"여어. 인호 브라더. 큰형 지금 막 서울 벗어났으니까 네 시간 정도 뒤에 부산에 떨어져"

"알았어. 나 일하고 있는데 그럼 여기로 올래?"

"너 호프집 같은 데서 일한다며?"

"응. 서면에 번화가 사거리에 제일 큰 별맥이야. 내가 여기 일하는 사람들 중엔 에이스야."


 별맥이 뭐냐는 인석의 물음에 인호는 술집 브랜드인데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고는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술집이라며 마치 자신이 사장이라도 되는 양 맛있는 것으로 대접해 줄 테니 어서 오라는 말만 반복한다. 잔뜩 들뜬 목소리에 신난 막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귀여운 녀석, 형한테 일하는 모습 보여 줄 생각에 신이 났구먼.'


 십 대를 보내는 내내 부모님이 공부 잘하는 형들과 비교하는 탓에 이골이 났을 텐데, 그래도 형들을 곧잘 따르는 녀석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서울에서 바쁜 직장 생활을 하느라 대구의 부모님도 자주 못 찾아뵈었기에 부산은 인호가 정착하고 일 년 반이 지나서야 찾아가는 길이다. 인호가 대구를 떠난 해에 엄마와 했던 통화가 떠오른다.


"가는 뭐한다꼬 부산에 가서 그라노"

"아, 엄마. 인호도 생각이 있겠지. 너무 집에서 공부 가지고 스트레스 주니까 그런 거 아니야."

"차암 내. 형들 둘이가 의사제, 엄마가 따신 밥주제, 능력 있는 아빠가 용돈도 줄낀데 와 집을 나가노 말이다. 생각이 없어도 이래 없다, 가가"

"혹시 또 몰라. 인호가 사업기질이 있어서 호프집 아르바이트하다가 사장이 되었다가 프랜차이즈 차릴 수도 있잖아. 이제 스무 살인데 경험하고 부딪혀 보는 거지."

"하이고. 가가 께을러 가지고 잘도 그러겠다. 얘기해보믄 생각하는 꼬라지에 속이 뒤집어진다. 공부가 제일 쉬운 기다. 어데 사업이 쉬운 줄 아나"



 인석은 오랜만에 동생을 볼 생각에 반가움과 어엿한 성인이 되었을까 하는 기대로 입꼬리가 길게 번지며 미소를 짓는다. 쭉 뻗은 경부고속도로 위로 기울어진 해가 산등성이 사이에서 부드럽게 이글거린다. 봄을 알리는 노래가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자, 흥얼거리는 콧소리 리듬에 따라 인석의 손가락이 운전대 위에서 까딱거리고 자동차도 흥겹게 부산으로 내달린다.




"큰형! 여기야 여기. 우리 가게가 근방에서 제일 사람이 많아. 앞에 줄 보이지? 벌써 대기 명단이 있는데 미리 형 자리 하나 빼놨어."

"어어. 고마워. 얼굴이 좋네. 표정은 더 좋고, 하하. 잘 지냈구나 너. 어디 여기서 제일 맛있는 것 추천해줘 봐."


 인호는 자신의 영역이자 직장에 형이 찾아온 것에 의기양양해서는, 특별할 것 없는 호프집 메뉴들 사이에서 이건 양이 적어 가성비가 별로고, 저건 맛이 형편없다며 이리저리 손가락으로 빠르게 훑는다. 그렇게 메인 안주와 생맥주 두 잔을 시키고는 음식 나올 때 같이 오겠다며 자리를 뜬다. 인석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스물 초반의 젊은 손님들이 많고 저마다 즐겁게 목소리를 키우는 것에 위화감이 들어 움츠러드는 어깨를 애써 폈다. 대여섯 명의 인호 또래 아르바이트생들이 바삐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오고는 했는데 하나 같이 작은 키에 외모도 형편없고 일머리도 없어 보였다. 인호는 세 형제 중 키도 가장 크고 가슴이 넓어 눈에 띄는 훤칠한 체격이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 하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 했는데 인석도 그런 편이었다.


'진짜 인호가 에이스 맞겠네. 아무렴 우리 강 씨 형제들이 어디 가서 꿀리지는 않지.'


 인석은 동생이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로 테이블 사이를 누비는 것을 물끄러미 본다.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는 것이 즐거웠던 것일까. 의대를 간 형들처럼 입시를 위한 링 위에서 다투자니 꼬리조차 안될 것 같았던지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 틈으로 들어간 인호는 한층 빛나 보였다. 보아하니 이곳 술집에서는 모두가 인호를 반기고 좋아했으며 무엇보다 그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인석은 동생에게서 전에 없던 당당함과 자신감, 그리고 밝은 표정을 보았다.


"인호야. 7번 손님들 나간다. 형이 계산받을 테니 정리하고 다음 손님 받아줘."

"오빠, 여기서 뭐가 제일 맛있어요? 맛없으면 오빠가 사야 해요, 까르르."

"주방에 새우 거의 다 떨어졌어. 인호야, 새우튀김 다른 걸로 좀 유도해 줘라."


 두 형들보다 유독 키가 크고 체력이 좋았던 인호는 지치는 기색 없이 사람들에게 곰살맞게 대하며 여기저기 맡은 임무를 완수했다.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던 인호는 앞치마를 벗은 채 형 앞에 나타나 풀썩 자리에 앉았다.


"형, 어때? 사람 되게 많지? 주말에는 더해 줄이 쩌어기 밖에 까지 선다니까."

"그러네. 되게 번화가에 인기도 많은가 보다, 여기."

"응. 저기 걸어가는 형이 매니저고 나머지는 아르바이트생인데 다 나랑 친해. 사실 내가 여기 에이스라 나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지, 후후. 매니저 형도 나 이뻐해서 내 재량으로 친한 친구들 테이블도 잡아주고 할 수 있어. 형 부산 내려올 일 있으면 여기 들를 때 꼭 연락하셔."


 인석은 귀여운 듯 인호가 늘어놓는 자랑을 듣고 있는다. 대학 다니고 회사 다니는 친구들과 비교당하고 주눅 들지 않아 다행스레 여기면서도 2년째 몸담고 있는 아르바이트직이 십 년이 될까 걱정되는 마음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도 졸업하고 부산 와서 자존감이 많이 올랐구나, 녀석.


"너 여자 손님들 중에서도 안면 튼 사람들이 있는 거 같던데? 친구들이야?"

"나 일하면서 만나기도 하고 부산에서 놀다가 알기도 한 사람들이지. 형, 나 인기 되게 많아. 여자들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 후후. 저기 코너 끝 테이블에 앉은 아까 인사했던 머리띠 한 여자애도 같이 몇 번 잤던 사이야."


 인석은 동생이 영웅담을 풀 듯 자기 침대에 뉘었던 여자들의 내력을 조잘거리며 늘어놓는 모습을 피식거리며 지켜보았다. 걔는 가슴이 어쨌냐는 둥, 그 누나는 관록에서 우러나는 몸짓이 장난 아니었다는 둥 하는 소리가 약간 저질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샌님 같이 점잔 떠는 병원 동기들이 아닌 동생이어서 마음이 편했다. 인석은 본인도 여색을 즐기는 마당에 동생을 나무랄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스스로의 성생활은 보다 고상하게 여겨 외설보다는 예술의 영역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같은 테이블에 인호와 마주 앉아 음담패설에 동조하고 있는 지금도, 내적 경계선을 둘 사이에 그어 가련한 눈빛으로 들어주는 것이었다.


 인석은 자신의 추구하는 성적 쾌락은 예술의 한 가닥으로, 하루키적 또는 쿤데라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3부작 장편소설* 초반에서 탄탄한 몸매의 관능적인 여성 킬러의 성적 취향을 대머리 중년 남자로 설정하여 섹스하는 상황을 그려낸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매력적인 여성의 유혹에 잠시 당황했던 중년 남자가 머뭇거리다가 성적 초대에 응답하는 전개를 거쳐 절정에 이르기까지 선정성은 완벽했다. [인석은 필시 이 소설가가 대머리에 배 나온 중년이며 본인의 성적 환상을 주입했을 거라 믿었으나 작가의 풍성한 머리와 마른 몸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외에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극적인 표현들과 이야기 전개로 악명 높았으나 여전히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라는 점에서, 인석은 예술을 당당하게 외설적인 행위와 표현을 하기 위한 면죄부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체코의 문호 밀란 쿤데라는 그의 대표작들 중 무려 두 권에서 여성을 나체로 거울 앞에 세운다. 옷을 완전히 갖춰 입은 남자와 중산모자를 쓴 채 속옷만 입은 반라의 여인이 거울 앞에 서 있다가 수치심을 못 이겨 섹스를 하기도 하고**, 거울에 비친 연인의 나체를 친구와 함께 보는 기괴한 줄거리도 서슴지 않는다. *** [분명 밀란 쿤데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정사를 보는 성적 취향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인석은 이제는 고인이 된 작가의 취향이 실제로 어떠한 지는 알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호텔 로비에서 친구 M과 함께 그녀를 기다리는 일이 불가피했다. 그들은 그녀와 함께 방으로 올라갔고, 마시고 떠들다가 그녀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녀의 브래지어를 걷어 내자 그녀는 손을 가슴께로 가져가 두 젖가슴을 가리려고 했다. 그들은 그녀를 큰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두 사내 사이에 서서, 두 손바닥을 젖가슴에 얹은 채, 매혹된 표정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불멸, 밀란 쿤데라. 민음사. 482p.


 고향을 침략한 적에게 거짓 투항한 후 적장이 만취한 상태를 노려 목을 베었다는 유대계의 논개, 유디트. 인석은 당대에서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여성 이미지의 유디트를 퇴폐적이고 몽환적으로 그려낸 클림트도 좋아했다. 관능적인 눈빛과 보드라운 살결로 표현된 유디트의 여성적 도발은 분명 남성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폭발시켰지만 황금빛 화가 클림트는 상징적 의미 아래 예술로서 이를 승화시켰다. 맹목적으로 성을 추구하는 외설이 아닌 그 너머의 의미를 추구하는 예술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인석은 관대했다. 오히려 플로베르 같은 경우도 보다 적나라하게 성적 묘사를 통해 보바리 부인을 더 향락적으로 묘사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직업적 동질감에서 인석은 남편 샤를 보바리 편이었다.]



 하지만 외설이냐 예술이냐의 논쟁에서 고상한 편에 서기 위해서는 성 이면의 어떤 의미를 필요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오묘한 줄거리를 섞어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를 완성했고 밀란 쿤데라는 죽음과 불멸,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등에 대한 철학적 질문에 섹스를 이용해 답변하곤 했다.


 인석의 경우엔 사실 여태 그런 것이 없다. 결혼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는 여자들에 질렸다는 핑계로 인석은 취미처럼 여자친구를 사귀었고, 성적 쾌감과 정복감을 주는 섹스는 일종의 스포츠이자 아편이었다. 그럼에도 향락의 세월 끝에 깨달음 같은 것이 있을 것이며 감정 소모적인 만남들이 지나면 진정한 감정을 마주할 것이라 믿었다.


'인호야, 섹스 너머의 의미가 분명 있을 텐데. 너랑 달리 형은 그런 고결한 목표를 위해 예술로서의 성생활을 그리는 거야.'


내로남불도 이런 내로남불이 없다.




* 1Q84, 무라카미 하루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 불멸, 밀란 쿤데라


<이미지 출처; Pixabay>

<Sitting woman with legs drawn up, Egon Schiele, 1917 (Wikipedia)>

<Judith and the Head of Holofernes, Gustav Klimt, 1901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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