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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강 Sep 24. 2024

호모 루덴스

Homo Ludense Sexualis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성적 쾌락을 추구했다. 

이제 와서야 인간 종을 호모 루덴스 [유희하는 인간]로 논하게 된 것이 늦은 감이 있다고 할 만큼, 인류의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섹스를 종족 번식의 목적뿐 아니라 재미가 탁월한 놀이로도 즐겼던 것이다. 

 이 어른들의 놀이를 더 극적으로 즐겁게 하는 방법들로 야외에서 하기, 여럿이 즐기기 등등은 이미 우리 선조들도 익히 알았던 모양이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같은 작가들의 풍속화들에서 고스란히 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운우도첩, 비구름이 뒤엉켜 하나가 되었다니. 외설적인 유희를 이처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우리 민족은 참 운치 있는 호모 루덴스가 아닐 수 없다. 운우도첩을 실제로 단원이 그렸는가 하는 진위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우리 조상들 중에 에곤 실레 부럽지 않은 화가가 있었음은 확실해 보인다.



 이러한 유희의 재미를 극대화시키는 많은 방법들은 일종의 현수교 효과와 비슷하다. 두근대는 긴장감과 공포 속에 위태로운 흔들 다리를 함께 건넌 이성에게 연대감, 애정, 호감 등이 더 생기게 된다는 이 효과는 각성상태의 두근거림이 함께 있는 이성의 매력에 의한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발생한다. 또한, 위기 상황을 함께 이겨 냈다는 점에서 유대감과 뒤섞인 호감을 느끼기도 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둘만 남겨진 새벽녘 공원, 익숙한 연인 사이에 낯선 이성을 초대한 경우에도 이를 즐기는 호모 루덴스들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으로 숨 막히는 긴장감을 성적 흥분과 분간할 수 없게 된다. 해가 밝을 때는 여러 사람들이 오가던 공공장소에서 행여나 보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약간의 걱정과 두근거림에 심장은 터질 듯 부풀어 오르게 마련이고,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인류는 줄곧 발가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기에 낯선 이성 앞에서 서로 발가벗겨진 상황은 태곳적 에덴에서의 야릇한 수치심에 떨게 만든다. 현수교라는 배경 대신 조금 더 은밀한 다른 상황을 설정하는 것뿐이다. 


 십여 년 전,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의대 생활 속에서 인석이 처음 성에 눈을 뜨게 해 준 것은 두 학번 위의 선배였다. 학번 차이가 있었지만 대학 봉사 동아리에서 선배를 처음 알게 되었고 동아리 활동이나 개강, 종강 총회 때 얘기를 나누며 조금 친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해가 넘어갈 무렵, 그 선배가 오랜 남자 친구와 헤어져서 한동안 술에 절어 지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단과대학 특성상 누가 누구랑 그랬대~ 식의 자잘한 소문들도 안줏거리가 되었고 또 그걸 핑계 삼아 밥 먹자느니, 술 사주겠다느니 하는 것들이 많을 때였다. 


 동아리 행사 뒤풀이가 있던 날, 인석이 선배에게 인사치레로 안부를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마냥 덥석 대답이 돌아왔다. 선배는 이별의 후유증이 덮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하루의 시간을 바쁘게 메우는 타입이었고 때마침 비어 있던 어느 날의 저녁 시간에 인석을 냉큼 집어넣었다.


"잘 지내세요? 헤어졌다고 들었어요 누나. 술자리 조금만 하고 몸 잘 챙기셔요."

"됐고, 생각하니 짜증 나. 다음 주에 나랑 술 한잔 하자."


 그렇게 만나게 된 날 저녁, 인석은 건네는 술을 덥석덥석 마시면서 선배의 전 남자친구에 대한 욕과 넋두리를 들어주며 위로도 하고 웃고 떠들고 했다. 선배가 본인의 매력적인 구석구석들을 늘어놓으며 그것들을 놓친 전 남자친구의 부족한 안목과 멍청함을 한 시간 넘게 토해냈을 때는 이미 둘 다 취기가 오른 뒤였다. 학교 부근으로 향하는 택시에 같이 오르면서 인석은 취기 덕분에 평소 같으면 절대로 못했을 용감한 소릴 했다. 


“조금 아쉽죠? 누나 방 가서 캔 맥주 더 마시면 안 돼요??”


 수능을 재수 없이 입학한 인석보다 나이가 셋은 많았던 데다, 학번 내에서 활달하고 소위 ‘인싸’ 였던 선배였기에 취기가 아니었다면 정말 분수를 모르는 헛소리였던 것이다. 


“얘 봐라, 너 어떻게 여자 혼자 사는 집에 올 생각을 해” 


웃어넘기는 선배에게 인석은 서너 차례 더 졸랐다. 연하의 남자는 여자 쪽에서 경계를 느슨하게 하기 마련이라 관계의 역학에 있어 조르기에 유리하다. 그대로 거절당했다면 거부당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분수도 모르고 치근덕 대던 사실이 소문날까 두려움에 방에서 이불을 걷어차며 후회했겠지만, 인석이 포기할 무렵 선배가 생각을 바꿨는지 태연하게 말했다.


“우리 집 냉장고에 맥주캔만 가득한 걸 어떻게 알고, 나 참. 먹을 건 딸기 밖에 없어”



그렇게 도착한 선배네 집. 

 선배 또한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모르나, 넓은 거실을 뒤로하고 이어진 작은 방으로 인석을 안내했다. 그곳의 침대 옆에 앉아 간소하게 상을 차린 선배는 아직 가시지 않은 늦여름의 더위에 집에서나 입을 법한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갈아입고 왔다.

 도란도란 대화 속에 둘의 맥주캔이 몇 번 맞부딪혔지만 그보다 나란히 앉은 둘의 무릎이 더 자주 부딪히는 통에 인석은 신경이 온통 무릎의 감각에 쏠려 있었다. 탁상 다리 사이에서 자신의 무릎과 선배의 무릎이 닿을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살을 계속 맞대고 싶은 마음과 예의상으로 짐짓 놀라며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그의 무릎은 갈팡질팡 했다. 


선배는 매끈한 연갈색 피부톤에 작지만 기다란 눈매 탓에 퇴폐미가 있었다. 

웃을 때면 길게 얇아지는 입술과 비음 섞인 웃음소리가 그 매력을 더하여 남자 선배들의 음담패설에 자주 오르내리곤 했다. 그날 선배가 오른편에 앉아 여유롭게 한쪽 무릎을 인석에게 맞대고 반대편 무릎을 가슴팍에 끌어안은 자태는 과연 고혹적이었다. 감싸 안은 한쪽 무릎에 눌린 가슴이 보드랍게 위로 봉긋 솟았다. 

갈 길 잃은 인석의 눈길이 퍽 귀여웠나 보다. 어느새 선배는 무릎이 아니라 허벅지를 인석 옆에 맞대어 앉았고 나란히 맥주캔을 기울이고 있었으니.


숫기가 없던 당시엔 과하게 망설인 탓에 엉거주춤 더딘 전개를 거쳐 인석의 한쪽 손을 선배 뺨에 올릴 수 있었고 그렇게 격정적인 키스를 하며 옷을 하나씩 벗기게 되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선배는 그 첫날밤 인석이 형편없었다 말해주었다. 어설픈 전희와 무엇보다 짧은 러닝 타임으로 진지하게 비뇨기과 추천을 해주려 했다나.


“나 진짜 예의상 그때는 말 못 했는데 너 진짜 남자 구실에 문제 있나 했어, 깔깔”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쉽다 그랬다. 이튿날 서로의 강의가 끝나고 멋쩍게 웃으며 만난 뒤로 둘은 거의 매일같이 정사를 나누었다. 군살 없는 매끈한 피부와 훌륭한 골반 곡선이 매력이었던 선배는 연하는 처음이라며, 원래는 덩치 큰 마초 연상이 이상형이었는데 왜 너랑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면서도 이젠 굉장히 즐기는 듯했다. 그 말에 인석은 나이 차이를 지우려 선배를 누나로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매일같은 성적 유희를 통해 경험이 없던 인석도 단련되어 어느 정도 즐길 수 있게 되어 여유를 부렸고 완급조절을 하면서 길게는 몇 시간씩 몸을 섞게 되었다. 인석은 그렇게 스물 후반을 향해 무르익어 가던 선배를 만나 이른바 ‘레벨링’을 가열차게 해냈고 전에 없던 자신감도 생겨났다. 

내가 이성의 욕정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 또한 성적 쾌락에 대한 결을 같이 하면 굉장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 뒤로 해줘. 이 자세가 더 이상한 곳을 찔러.”


 정말 별 것 아닌 한 마디였지만, 여자의 성적 요구를 처음 들었던 인석에게는 색다른 짜릿함이 있었다. 선배는 관계 중에 '좋다'라는 말이 노골적이고 민망해서 인지, '기분이 이상하다'거나 '거기 이상해'라는 표현을 곧잘 썼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날 때면 인석의 콧대와 턱에서는 어김없이 땀이 흐르기 시작했고, 격한 흔들림 속에 땀방울이 선배의 등 위로 떨어질 때면 선배는 숨이 끊어질 듯한 비성을 내뱉었다. 자극적인 음성효과에 더불어 눈앞에 펼쳐지는 완벽한 등허리 곡선은 훌륭한 손잡이 구실을 했고 심미적인 효과도 뛰어났다. 

 이보다 오감이 즐거운 놀이가 또 있을까.


 선배의 성적 기호를 어느 정도 알게 된 후, 인석은 침대 머리맡에 얼음컵을 가져다 두었다. 

절정의 무렵, 선배의 등에 입을 맞추고 입 안의 얼음을 굴려 등 가운데를 쓸어내릴 때면 선배는 몸을 떨며 자지러지곤 했다. 그 반응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선배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관능적인 분위기를 뽐내던 선배는 인상만큼이나 몸매도 야했기에 이 성적 유희가 매너리즘에 빠질 일은 없었으나, 둘은 꾸준히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 


 언젠가 같이 괌에 놀러 가기 위해 선배와 비행기를 탄 적이 있었다. 시간을 아끼려 밤 비행기를 탄 탓에 이륙 후에는 소등이 되었다. 대부분 승객들이 잠든 그 시각, 인석의 오른손 중지는 그녀의 음부 속을 헤집고 있었다. 둘은 기내에서 나눠 준 담요를 허리춤에 펴 외부의 시선을 가렸고, 선배는 그 속에서 허벅지를 살짝 벌려 인석의 손 움직임을 편하게 해 주었다. 


 세계적인 휴양지 중 하나로 떠난다는 기대감과, 이 시각 어쩌면 유일하게 태평양 상공에서 전희를 즐기는 한쌍이라는 황홀감, 그리고 이따금씩 통로 쪽을 다니는 승무원이 주는 짜릿함에 창 측 좌석 시트가 슬며시 젖어 갔다. 현수교 효과에 버금가는 비행기 효과였다. 

 이제 웬만큼 대담해졌던 인석은, 악동 같은 미소와 함께 선배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보영아, 지금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 잠그고 있어. 그리고 오분 뒤에 내가 문 앞에서 ‘똑똑똑똑똑똑’ 하고 여섯 번을 두드리면 문 잠금을 풀어. 나도 들어갈 수 있게.”

“잘 들어. ‘똑똑똑똑똑똑’ 여섯 번이야”


대부분이 잠든 시간이라 화장실을 잘 쓰지 않을 것이고, 오분 내내 화장실을 지켜보면서 사람이 둘 들어간 것을 눈치챌 사람은 없을 것이다. 




“꺄아아. 여기 진짜 좁아. 뭐야 이거 우리 진짜 여기서 하는 거야? 미쳤나 봐 정말”

“쉿. 조용해. 너 속옷 다 젖었네. 그거 벗고 선반 위에 엉덩이 올리고 다리 벌려봐”


 반평 남짓한 공간이라 굉장히 불편했지만, 4만 피트 고도의 구름 속에서 한다는 생각에 이미 인석의 심장은 부풀 대로 부풀어 있었다. 이미 좌석에서 충분히 젖어든 그곳은 손가락 보다 굵고 단단한 것을 기다리는 듯했고, 바라는 대로 빈틈없이 가득 메워 주었다. 세면대 옆으로 이어진 작은 선반에 걸터앉아 다리를 쭈그려 벌린 채 선배는 인석을 꼬옥 안았고 인석도 그녀를 가득 채운 채로 가만히 느꼈다. 기체의 움직임에 따라 바닥이 오르내리는 진동이 있다 보니 둘은 하나가 된 채 움직이지 않아도 움직였다. 


 두둥실두둥실 움직이는 바닥에 둘은 자연스레 하나가 되어 리드미컬하게 미끄러져 움직이길 반복했고 선배는 양 볼이 상기된 채 잔뜩 숨을 몰아쉬었다. 작은 공간은 둘의 농밀한 입김에 더운 수증기로 가득 찼고 거울에도 김이 서려 더 이상 거울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둘의 은밀한 놀이가 끝났다. 인석과 보영은 시간차를 두어 아무렇지 않은 듯 나왔고 아무도 눈치챈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슬며시 웃었고, 둘만의 위기를 헤쳐온 그들은 묘한 연대감에 젖어 목적지로 향했다.


 함박눈이 내리던 그 해 겨울이었다. 선배가 살던 오피스텔 옥상에 출입이 가능한 걸 알고, 인석이 선배를 이끌고 담요를 덮은 듯 새하얗게 눈 내린 도심을 보러 옥상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발칙한 장난기가 발동한 인석은 상의를 벗었고 선배도 알몸으로 만들었다.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무인도의 사람 마냥 맨 피부로 눈송이를 맞아가며 둘은 킥킥대었고 선배와 인석은 가슴을 맞댄 채 가만히 눈 내리는 거리를 내려다보며 문명화된 의복을 입은 사람들은 관찰하기도 했다. 


“꺄아아. 등이 자꾸 차가워. 내 엉덩이에도 눈 떨어진다, 깔깔."

"너 어깨에서 김 나와. 되게 섹시해 지금"




 인호가 지내는 방으로 걸어가는 길에 인석은 옛 생각에 잠겨 쿡쿡 웃음이 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더 많은 여자들을 사귀었지만 아무래도 대학 시절 선배가 생각나는 것은 언제나 처음이 더 설레기 때문일 것이다. 옆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동생이 본인의 영웅담으로 연신 떠들어 대는 통에 인석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응. 전화했었네, 보영아. 얘기하느라 못 들었어."

"뭐? 보영?"


 '아뿔싸' 


 순식간에 등골이 서늘해지며 술기운이 싹 달아난다. 인석은 잽싸게 머리를 굴려 보지만 맥주 몇 잔에 절여진 뇌는 눅진해져 달리 변명거리를 내놓지 못했다.


"야, 강인석! 보영이 누구냐고. 너 혹시 지금 여자랑 있어? 동생 만나러 간다는 거 거짓말이었구나."

"아냐, 야냐. 동생 지금 내 옆에 있어. 정말이야. 바꿔 줄 수도 있어. 은영이 네 이름을 잘못 부른 거야."

"말이 되는 소릴 해. 아니면 또 전에 만났던 여자친구 이름이니? 지난번에 차 블루투스에 등록되어 있던 애는 전 여자친구라며. 보영은 그럼 뭐 전전 여자친구야? 아직 못 잊고 미련이라도 남아있는 거야? 어떻게 여자친구 이름을 헷갈릴 수가 있어. 드라마에서나 바람둥이 남자가 양다리, 문어다리 걸치다가 이름 실수하는 줄 알았더니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네. 정말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와. 너 지금 욕 들어도 할 말 없는 거 알지?"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은영의 공세에 인석은 눈을 질끈 감고 아랫입술을 꽉 물고는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앞서가던 인호도 심상치 않은 인석의 분위기에 걸음을 세운 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너, 나 사랑하기는 해?"


 가슴을 쿡 찌르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인석은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고 찡그렸던 미간과 얼굴이 풀어졌다. 무엇이라 변명하여 순간의 위기를 어떻게 벗어날까 하던 지독한 고민이 사라지고 난데없이 차분해졌다.

 그래. 아무래도 사랑은 아니었다. 은영과 시공간을 넘어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거나, 온 마음을 은영으로 가득 채워 그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려는 그런 숭고한 마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인석은 더 이상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사랑하지 않았기에,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기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습관을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사랑하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절절한 노력을 해본 적도,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무릎을 꿇을 생각도 없었다. 


"아니"

"..."


 '그럼 그만하자'는 것이 휴대전화 너머 마지막 은영의 목소리였다. 전화가 꺼지면서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인석의 오른팔은 허벅지 옆으로 툭 떨어졌다. 인석은 눈을 감고 고개를 높이 들어 숨을 가슴 가득히 들이쉬었다. 새벽녘 도심의 찬 공기가 허파 구석구석 들어와 과거의 공기를 씻어 내주었고 이어서 인석은 같은 공간에서 은영과 공유했던 마지막 공기 한 줌까지도 내뱉으려는 듯 긴 날숨을 천천히 뱉어냈다. 


'괜찮아. 사랑한 것도 아니었고 마음도 내가 덜 주었으니.'


 동생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다시금 걷기 시작한 인석은 왠지 가슴이 조그맣게 뚫린 느낌이 들어 꽃샘추위인가가보다 하고 옷깃을 여미어 본다. 





<운우도첩 3 (출처=한국데이터베이스산업진흥원)>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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