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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강 Oct 08. 2024

간잽이

앞뒤 재지 않는 뜨거운 연애


"수쳐(봉합) 마무리하고, 환자 회복실 나와서 병실 올라가면 연락해"

"예, 교수님. 수술 끝나고 회진 대기 하겠습니다."


 연차가 올라가면서 인석은 외과의사로서의 역량과 술기도 조금씩 향상되었고, 그에 따라 교수님들의 신뢰를 얻어 간단한 수술을 직접 집도하기도 했다. 물론 많은 경우, 오늘처럼 수술이 끝나갈 즈음 마무리 정도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파란 수술복을 돌돌 말아 폐기물통에 던지면서 수술방을 나서는 교수님이 들리도록 인석과 1년 차 선생님, 그리고 수술방 간호사들이 일제히 대답한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한두 번 합을 맞춘 수술팀이 아니었기에 교수님의 퇴장 인사까지도 요령껏 [수술실 자동문이 열리는 타이밍에] 하나의 화음으로 가능하다. 그렇게 교수님이 나가시면 수술실은 한결 편한 분위기가 된다. 인석은 책임자로서 남은 수술 과정을 문제없이 잘 마무리하기 위해 집중하면서도 동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꽤 재미가 쏠쏠했기에 이 시간을 좋아했다. 대개 대학 병원이나 종합 병원급에서는 여러 부서 중 마취과 팀이 직장 내 뉴스에 가장 밝았고 가십거리 따위도 많이 알았다. 아마 수술실 여러 곳곳에서 모든 외과팀들과 오랜 기간 수술을 하며 가까워지기도 쉽고 직장 내 소식들을 여기저기서 접하기 쉬워서일 것이다.


"아싸, 오늘 점심 삼계탕~ 이 방 환자 깨우고 얼른 내려가야지. 준호 선생님도 다음 수술 전에 얼른 먹어요."

"아, 오늘 복날이구나. 새미 선생님은 병원 식단표를 다 꿰고 계신 거 같아요."

"아무렴요, 먹고살자고 일하는 건데. 안 그래요, 인석 샘?"


 커다란 마취기 뒤에 쭈그려 앉아 휴대전화를 보던 마취과 고새미 간호사가 고개만 옆으로 삐죽 내밀며 인석에게도 대화의 손길을 건넸다. 수술하면서 일적인 대화 밖에 안 해본 사이인데 참 붙임성이 좋다. 아무래도 마취과는 직원을 뽑을 때도 향적이고 말재간이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이 틀림없다.


"하하, 그럼요. 저희 교수님들은 큰 수술 있어도 전공의들 밥은 웬만큼 돌아가면서 먹이는데요."


 인석은 잠깐 고개를 들어 예의상의 눈웃음을 보내고는 이내 봉합부위에 집중했다. 수술모와 마스크를 동여맨 수술복장에서는 눈밖에 보이지 않아 눈의 표정만 신경 쓰면 되어 참 편하다. 눈은 웃고 있지만 입꼬리가 내려가 있는지, 또는 윗입술을 한껏 들어 올려 경멸의 입모양인지 상대는 알 수 없으니까.

마취과 전공의 준호 선생님과 새미 간호사의 대화 화제는 어느새 병원 사람들의 개인사로 넘어갔다.


"아참, 준호 선생님! NS 4년 차 경호 샘이랑 사귀던 7층 수진 샘 퇴사했대요, 들었어요?"

"아 맞아, 경호형 헤어졌대. 얼마 안 됐을걸?"

"와, 이것 봐. 경호 샘은 이제 몇 달 뒤면 4년 차 끝나고 병원 나가니까 괜찮은 거고, 수진 샘만 피해보네."

"에이. 그게 어떻게 그 선생님만 피해예요. 그냥 남녀가 헤어진 거고 마침 경호형은 수련이 끝나가니 퇴사하는 거지. 그리고 경호형 곧 졸국[수련이 끝나고 의국을 나가는 것을 말한다]하니까 그 간호사 선생님은 계속 회사 다니면 되잖아요. 마주칠 일도 없고 좋네."

"간호사는 절대 그렇게 안 돼요. 병원이 어떤 곳인데. 평생 꼬리표 라구요. 만약에 병원 안에서 내가 의사랑 사귀잖아요? 그럼 결혼해서 퇴사하거나 헤어져서 퇴사하거나 둘 중 하나예요. 퇴사 안 하고 병원에 남아 있으면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듣는 다구요. 끝까지 잘 만나서 결혼하면 '쟤는 몇 년 전에 전공의였던 누구 꼬셔서 결혼 잘했다'는 둥, 아니면 중간에 헤어져도 '쟤는 병원에서 일은 안 하고 남자 만나러 온 거 같더니 저렇게 됐다'는 둥. 웬만큼 낯 두꺼운 사람 아니면 못 버텨요. 어머, 난 절대 안 돼."


 인석은 병원 소식통이 촉새 같이 두두두 내뱉는 뉴스를 흥미롭게 들으며 어느 정도 수긍했다. 마침 수술 중이던 안와골절 환자의 수술부위 봉합이 다 끝났고 거즈를 대고 붕대를 동여매던 중이었다. 인석은 새미의 말에 동의하면서 앞서 말을 걸어주었던 호의에 보답했다.


"새미 선생님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일적인 업무를 실수했으면 일 적으로만 질책해야지, 꼭 그런 개인적인 일로 트집 잡는 배배 꼬인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요. 그러니 괜히 병원 구설수에 오르면 그만큼 책 잡힐 일도 많고요. 심지어는 교수님들 중에도 전공의가 병원 안에서 연애하는 거 알면 혼낼 때 '병원에서 연애하느라 정신이 팔렸냐' 면서 소리 지르는 분도 있는걸요."

"그것 봐요. 그렇다니까요. 준호 선생님, 환자 깨웁시다."



 수술이 완전히 끝나고, 준호는 전신마취를 깨우기 위해 환자 머리맡으로 왔고 새미는 환자의 발 밑으로 와 양 발목을 붙잡았다. 마취에서 깨면서 흐릿한 의식과 수술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위험하게 몸부림치는 환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인석은 늘 하듯 환자의 허벅지 위에 엎드려 몸무게를 실었다.


"어? 이 환자 발목에 타투했네. 영어 이니셜이 본인이 아닌데, 여자친구인가?"

"이 환자 차트에 미혼이던데. 나 참, 헤어지면 어쩌려고 몸에 이니셜을 새겼대."


 인석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향한 끝에는 환자의 안쪽 복숭아뼈 윗 경계쯤에 이름 이니셜일 법한 영어 대문자 세 개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우리는 남녀 관계에 있어서 리스크(위험도) 관리를 한다. 이것은 감정의 위험도뿐 아니라 개인의 생활과 인생계획 전반에 이르는 충격을 줄 수 있음을 미리 감지하고 적정선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 사람이 너무 좋은데, 상대는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떡하지? 마음을 접을까?'

'헤어질 수도 있으니 가족들한테는 알리지 말아야지. 결혼할 사람만 소개해 줄 거야.'

'친한 친구가 6년을 사귄 남자친구랑 헤어졌대. 너무 공허해서 생활이 피폐해졌다던데. 무엇보다 나이가 벌써 서른다섯이야. 언제 또 새로 몇 년을 사귀고 결혼해. 그러게 한 일이 년 사귀면 결혼 얘기부터 꺼냈어야지, 시간낭비만 했어.'


 연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배우자를 신뢰하지 못하고 결혼 관계의 영원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아지랑이 같지만 끊기지 않는 이혼에 대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부부싸움이 날 때면 곧잘 이혼얘기를 꺼낸다. 혹시라도 있을 이혼을 대비하여 부동산이나 자동차의 명의를 쉽게 공유하지 않으며 가계에 공여한 정도에 따라 니돈 내 돈 지분을 따진다. 이렇게 이혼하거나 헤어지는 연인들도 과거 어느 날에는 사랑에 눈이 멀었던 때가 있었을 테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리스크를 셈하는 걸 잊곤 한다.


 7층 병동의 수진 간호사는 신경외과 의사 경호와의 연애가 5년간 일했던 일터의 분위기를 바꿀 가능성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고 서라도 경호와 한강변을 거닐거나 품에 안기고 싶었을 것이다.

인석의 몸 아래에 깔려 조금씩 발버둥 치는 이 남자 또한 지금의 여자친구[혹은 과거 여자친구였지만 타투를 미처 지우지 못한 경우일 수도]와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 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녀 이름을 몸에 새겼을 것이다.

이러한 리스크를 셈하는 데 있어 공격적인 사랑꾼과 방어적인 사랑꾼 중 어느 한쪽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연인 사이에 서로의 셈법이 극단적으로 다를 경우 발생한다.


 너 없이 못 살겠다며 직업도 가족도 팽개치고 여행가방 하나 달랑 짊어진 채 온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을 갈구하는 여성은 아무리 아름답고 매력적이라 할지라도 보통 남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반대로, 헤어질 것이 두려워서 결혼할 이에게만 몸과 마음을 허락하겠다며 서른이 넘도록 혼전순결[종교적인 이유는 배제하고]을 고집하는 여성 또한 혈기왕성한 젊은 남자를 고통스럽게 한다.


 인석은 버둥거리는 환자의 무릎을 애써 누르면서 환자의 타투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과연 이 남자는 이니셜의 주인공이 평생 함께 할 반려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긴 했을까? 과연 그 여자친구는 똑같은 위험을 감수하고 이 환자의 이름을 몸에 새기며 사랑에 답했을까?



 전신마취가 깬 환자는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기 위하여 회복실로 안내되었고 인석은 이런저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수술실 복도를 걸었다. 순간, 뒷목에 두꺼운 팔이 둘러지면서 고개가 앞으로 쑥 쏠렸다. 진성이다.


"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멍하게 하냐. 아직 헤어진 전 여자 친구 생각하냐? 그러게 어떻게 이름을 헷갈리냐, 이 한심아."

"아 무슨 소리야, 형. 나 미련 가지고 그런 타입 아닌 거 알잖아. 그리고 그게 언제 적 일이야."

"하긴, 인석이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지. 그래, 몇 달이나 지났는데 요즘은 썸 타는 사람 없어? 너라면 있을 텐데, 분명."


 진성은 어깨동무를 한 팔로 인석의 목을 흔들면서 얄미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능글능글하다 정말.


"말이 왜 그런 식이야, 내가 무슨 여자만 좇아 다니는 놈 마냥 말하네. 딱히 썸이 있는 건 아냐. 자꾸 눈에 밟히는 사람이 있긴 한데.... 여기 응급실 간호사라 별생각 없어."

"오, 누군데? 이혜지? 김소현? 흠. 응급실에 이쁜 사람이 누가 있더라."

"아, 됐어. 나 병원에서 연애 안 하는 거 알잖아."

"그런 게 어딨냐. 너 또 이것저것 재고 간 보고 있구만, 이 간잽이* 자식."

"내가 재긴 뭘 재. 간잽이는 또 무슨 단어야."

"무슨 단어긴, 너처럼 맨날 얘랑 사귀면 어떨까, 쟤랑 헤어지면 괜찮을까 간 보는 놈들을 간잽이라 그러지. 키키. 인마, 형처럼 가슴 뛰는 연애를 하란 말이야. 그럼, 사랑꾼은 수술 들어간다."


 주먹으로 인석의 오른 가슴 편을 툭 치고 탁탁탁 뛰어가는 진성을 바라보면서 인석은 맞은 부위를 긁적인다. 주먹보다 '간잽이'라는 단어가 더 깊게 박힌 듯했다.


 확실히 인석은 연애의 위험도 관리에서 방어적이고 셈이 빠른 편이었다. 감정의 줄다리기에서 상처받지 않기 '이 사람이 나에게 마음을 더 주는지'를 보며 마음을 줬고 헤어질 것을 감안하여 가족들을 보여주거나 공개적인 SNS에 사진을 올리는 경우도 없었다. 정리할 것이 많아지는 동거는 당연히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대학 때 사귀었던 선배와 헤어지는 바람에 졸업 후에 그 선배가 일하던 대학병원은 피해서 이력서를 썼던 기억이 있었기에 사내 연애는 기필코 하지 않겠다며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성의 말이 약 오르긴 했지만, 일리는 있었다. 부모님의 관계와 같은 결혼은 절대 하지 않겠다며, 애틋하고 진심 어린 사랑의 연인을 찾겠다면서 늘 자극적인 이성을 좇으며 이별이 어렵지 않도록 감정을 재는 그는 위선자이자 간잽이가 맞았다.



'그래, 까짓것. 마음이 가는 대로 한번 가보면 되지.'


<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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