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도 가르침이 필요해
이튿날, 일요일. 인석은 동생에게 광안리에서 유명하다는 국밥을 먹이고 서울로 향할 채비를 했다.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한 아이스 카페라테를 주문해서 차량용 컵홀더에 담은 후, 인석은 조수석 차창 너머로 보이는 인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큰 형 간다, 밥 잘 챙겨 먹고."
"어, 재밌었어. 형도 조심히 올라가."
"그래. 건강하게 지내고 또 보자. 엄마, 아빠한테 전화 한 번 드리고."
".... 엄마한테는 한 번씩 해."
녀석이 뜸을 들이다 대답한다. 두 형제 사이에는 말없이 겸연쩍은 미소가 오갔다. 인석도 더 이상 잔소리가 될까 시선은 정면으로 돌리면서 애꿎은 손만 열심히 흔들었다. 백미러로 후드 집업을 눌러쓰고 터덜터덜 크록스 슬리퍼를 끌며 걸어가는 인호의 넓은 등이 보이자 괜스레 마음이 착잡하다.
꽤 많은 아들들이 아버지에 대한 반감 또는 적대감이랄 것들을 느낀다. 단순히 세대차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심오한, 삶에 대한 가치관이 다른 이유에서 마찰이 발생하곤 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제시하여 정신 발달의 중요한 부분으로 논한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테베의 왕자였던 오이디푸스는 출생의 비밀에 의해 자신의 신분을 모른 채 장성하여, 훗날 테베의 왕이자 아버지인 라이오스와 외길에서 시비가 붙어 아버지를 죽이고 만다.
인석은 부유한 가정에서 사랑으로 자신을 키워준 부모님을 사랑했고 감사하게 여겼지만, 그와 별개로 정신발달에 있어 부정적인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각자의 생에서 부모 역할이 처음이기에 익숙지 않은 게 당연하고 일부 부족한 면도 있게 마련이다. 인석의 보무님 경우엔, 감정 교육에 있어 서툴렀다.
인석이 열 살 하고도 서넛은 되었을 때였다. 대구 외곽에 위치한 한 요양병원에 할아버지를 뵈러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즈음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좌측 편마비가 온 이후로 요양병원에서 지내게 되어 아버지는 아들들을 데리고 종종 할아버지를 뵈러 가곤 했다. 그런데 당시 어렸던 인석의 눈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는 부자의 정 같은 것은 없어 보였고 데면데면해 보여 물어보았다.
"아빠는 할아버지랑 함께 한 좋은 기억들이 없어요? 그럼 왜 매주 할아버지를 보러 병원에 가요?"
"낳아주신 부모님이니 응당 효를 다해야지."
아버지는 세 아들들을 바르게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항상 말을 근엄하고 교육적으로 하려 애썼다. 어찌 보면, 유교 문화권의 덕목들을 가르치려 했던 아버지로서의 당연한 자세였겠지만 당시 인석에게는 진심이 없는 껍데기뿐인 행동이 좀처럼 와닿지 않아 갸우뚱했다. 게다가 다음날 이어진 어머니의 푸념은 인석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느그 아빠는 저래 조상들한테 열심이다. 제사도 꼬박꼬박 일년 열두달을 지내제. 그 많은 자식들 중에 아빠 혼자 할아버지 병원비 내고 챙긴다이가."
"아빠가 장남이니까 그런거 아니야? 아빠는 맨날 나 보고도 장남이니 가족 잘 챙겨야 한다 그러잖아."
"왜 저기 창원인가 어데 자식들 더 있다이가. 그놈 자식들을 연락 싹 끊고 아버지 취급도 안한다 안하나."
"창원? 웬 창원?"
"느그 할머니 시골서 힘들게 농사 해갖고 아빠랑 삼촌, 고모들 싹 다 혼자 키운거 알제. 그기 다 할아버지가 사업한다꼬 경남 어데로 내려가가 딴 여자랑 눈 맞아가 두 집 살림해서 그런거 아이가. 결국엔 사업도 말아먹고 눈 맞은 여자한테 빌붙어 살다가 그마저도 쫓기나가 다시 대구로 올라왔다 아이가."
"헐, 진짜? 그럼 할아버지 바람피운 거네? 아이도 낳고?"
"그랬다니까. 근데 인자 창원집 사람들은 처음에 할아버지가 총각인 줄 알았던 거제. 난중에 처자식 있는데 두 집 살림 차린 거 알고는 그 집 자식들이 할아버지 쳐다도 안본다이가. 옛날에 니 갓난쟁이 때 엄마도 느그 할아버지 뵈러 갔다가 함 봤다 그 집 식구들. 엄마는 느그 할아버지 뵈러 가도 가까이 가기 싫어가 멀찌감치 서 있다이가. 아빠는 뭐한다꼬 그리 지극정성인지 모르겄다."
세월이 흐른 후에야 어머니의 치기 어린 하소연들이 예민한 감성의 십 대 성장기 소년에게 부적절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당시엔 아버지의 생각과 당신의 부자지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보게끔 하던 살아있는 교육 현장이었다.
'아빠는 할아버지를 어떻게 바라볼까?'
'할머니를 힘들게 한 것을 줄곧 봐 왔으니 할아버지가 내심 미웠겠지?'
'그럼 아빠는 어떤 아버지가 되고 싶었을까?'
'아빠는 형제자매들도, 할머니도 힘들게 한 할아버지를 왜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이 인석의 머리를 맴돌았다. 그러면서 이건 잘못되었고, 저건 바르다 정도의 가치관이 생기기 시작했고 앞으로 '나는 어떤 어른이 되어야지'하는 다짐이 조금씩 서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 모습에서 경제적인 무능력함을 최우선 과제로 보았던 모양이다. 아내와 가정에는 조금 소홀할지언정 학원사업에 매진하여 서서히 학원들의 지점이 늘어나고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인석이 보기에도 집안의 형편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 아버지도 그것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또한 아버지는 사회적인 성공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집안의 규율과 가치관을 결정하셨다. 시골의 할머니 댁을 새로 지어 드렸고 그곳에서 추석, 설날 차례와 4대 봉사를 모두 지냈다. 아버지는 유교적 덕목 중 유달리 효와 조상을 중요시했다.
이러한 가부장 집안의 저편에는 명절과 제사가 끝날 때마다 삭신이 쑤신다며 반나절을 누워 골골거렸던 어머니가 있었다. 동년배들 사이에서도 약간 더 옛날 분이셨던 아버지는 집안의 대소사를 맏며느리의 당연한 소임으로 여겼고 한 번도 어머니의 수고로움을 보듬어 주거나 고맙다는 따듯한 말 한마디 하신 적이 없었다. 인석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으신 할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전혀 책임을 다하지 않았음에도 그를 봉양하려는 아버지의 사상이 이해가 가지 않았으며 조상이 중요하다면 왜 어머니의 부모님은 그 중요도가 떨어지는지 아버지의 의견이 궁금했다.
인석은 아무래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버지의 유교적 가치관을 답습한다면 그 누구도 자신과 결혼할 여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인석은 부모님이 서로에게 더 충실했으면 하고 바랐고 자신에게 감정에 대한 가정교육이 있기를 바랐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은 어떻게 표현할 것이며 화가 날 때는 어떻게 지혜롭게 행동해야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는지 알려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부러 엄숙하고 추상적인 말을 통해 원대한 꿈과 남자로서의 책임감을 논하기만 했고, 분별없는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없는 데서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인석의 형제들은 부모님의 관계를 받아들이고 어머니, 아버지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굉장히 곤란한, 소극적 가정폭력 아래서 그렇게 자랐다. 아마 많은 대한민국의 가부장 집안의 자녀들이 그렇게 자랐을 것이다.
인석이 스물다섯이었던 해 가을이었다. 6년간의 의학부 생활에 마침표를 찍어갈 무렵, 연말에 시행되는 의사 국가고시를 대비하기 위해 기숙사에서 몇 가지 전공 서적을 챙겨 집으로 갔다. 앞으로 딱 한 달하고 보름을 집에만 틀어박혀 국가고시 공부만 할 생각이었다. 미리 어머니께 말해 놓았고, 집중해서 치열하게 공부할 당찬 포부로 가득 차 발걸음에도 힘이 들어갔다. 오랜만에 만나는 어머니의 환영을 기대하며 집에 들어섰지만 웬걸, 들어가니 집안의 불이 온통 꺼져 어두컴컴했다. 조금 있자, 안방에서 인기척이 나며 어머니가 낮은 목소리로 반겼다.
"응, 인석아 왔어?"
평소 답지 않은 어색한 표준어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살짝 젖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불길함을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들, 할 얘기가 있는데 니 이리 함 와바라."
두터운 전공서적들을 쿵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어머니는 인석을 거실 식탁으로 불러내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휴대전화를 인석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휴대전화에는 웬 여자의 사진이 떠 있었다. 하얀 두 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오른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이며 카메라를 향해 웃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자세히 보니 아는 얼굴이다. 십 년 전 인석이 중학생이었던 때, 아버지 학원에서 과학을 가르쳐 주던 신입 선생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어머니의 힐난이 경상도 사투리에 한껏 버무려 쏟아진다.
"내 진즉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래 학원에 이상하게 젊은 여선생들이 많아가 수상하다 했지, 내가. 또 너희 아빠가 유독 야유회다 뭐다 시무식, 종무식이다 해갖고 선생들을 따로 을매나 챙기는지. 엄마랑은 안 가면서 여선생들하고는 그르케 영화도 보고 문화생활도 하고 밥도 먹이고 한다이가. 엄마는 진짜 딱 그런 줄로만 알았제. 근데 어느날 있제, 밤에 아빠 샤워하는데 폰이 지잉 울리는기라. 엄마가 딱 촉이 와가지고 몰래 아빠 폰을 함 드다 봤는데 와, 말도 마라 인석아. 이년이랑 서로 '쥬'니 '뷰'니 애칭으로 막 그래 불러 쌓는기라. 이 사진 꼬라지 봐라 이거 미친거 아니가. 느그 아빠 서류 가방에 보니까 비아그라도 잔뜩 챙기 다니드라. 내 참, 인자는 힘도 없는갑제. 남자는 숟가락 들 힘만 있으믄 할 수 있다 카드만은 니 아빠 꼬라지가 딱 그르타."
인석은 어지러웠다. 숨이 가빠지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했지만 그것이 배신감인지 분노인지 부끄러움인지 알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당신의 아버지가 두 집 살림을 하는 바람에 혹독한 유년기를 보내야 했음에도 같은 길을 걸으려는 것일까. 어머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버지의 상간녀 알몸을 제 아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들이미는 것일까. 세상에 자기 아버지의 상간녀 알몸을 본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어머니는 분노와 울음이 반반씩 섞여 벌게진 눈으로 다른 증거물들을 쏟아냈다. 마치 큰아들이 가정법원 판사라도 되는 양 아버지가 유책 배우자임을 한껏 주장했다. 각기 다른 장소와 시간에서 다른 여성분들에게 문자로 추파를 던지거나 약속을 잡는 내역들이 있었고 이따금 반듯한 여성들이 정중하게 거절의사를 밝히며 가정이 있는 남자로서 충실하게 행동하라는 질타의 문자도 있었다. 아,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이런 사람이 아버지라니! 인석의 어린 시절 바른 성품과 인의예지의 덕목을 가르쳤다니!
어쨌든 찬찬히 보아하니 알몸의 그녀가 주요 상간녀였다. 인석은 엄연히 부부 사이의 일이지만 아들로서 이를 사이에서 중재하는 것이 마땅한가, 아니 그보다 아들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한 여자의 울분은 아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야, 인석이 니 아빠가 이해 되는 부분이 좀 있나 보제. 딸이었으면 절때 아빠 안본데이. 니가 아들이라서 그렇다. 딸들은 이런 일 있으면 두번 다시 아빠 안본다 카드라."
감정적인 미성숙함으로 인석의 어머니는 원체 단어 선택에 절제가 없었고 묘하게 아들을 가스라이팅 하는 면이 있었다. 인석은 어머니의 다그침에 아버지를 독대하여 생애 처음으로 아버지께 눈을 부릅뜨고 잘잘못을 따져 보았으나 돌아온 것은 자욱한 담배연기와 붉으락푸르락 분개한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위엄과 체면을 구긴 것에 대해 자식들에게 일을 떠벌린 어머니에게 화살을 돌릴 뿐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그 해 겨울이 찾아오는 내내 인석은 의학 서적을 펴 볼 수 조차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 명씩 만나며 다그치고 설득하고 달랬고 고모와 삼촌들까지 연락을 해 보고서야 알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애초에 큰 교통사고 현장에서 옆에 있다가 피해를 입은 보행자일 뿐,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거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여차 저차 국가고시는 무난하게 통과하여 수년이 흘렀고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장성한 아들 셋이 출가한 큰 집에 홀로 생활하고, 아버지는 그 여자와 대구의 다른 지역에 아파트를 장만하셨다. 여전히 어머니는 아버지와 서류상 부부이고 그가 주는 넉넉한 생활비로 지내며, 명절과 4대 봉사에는 시골 큰집에서 팔을 걷어붙이신다. 굉장히 이질적인 현대의 처첩제도이지만 다들 그렇게 그럭저럭 삭이고 사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는 오로지 젊은 사람들에게나 문젯거리다. 인석은 할아버지, 아버지까지 대를 이어 내려오는 여색과 바람기가 자신과 형제들에게도 이어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인석은 정상적이고 건설적인 부부관계를 알지 못했으며, 마음을 표현하고 감정을 공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감정 불구자였다. 그래서 본인도 남들 하는 식으로 결혼을 때맞추어하게 되면, 아버지와 같은 우를 범하리라 지레 걱정을 했다. 인석은 악의 순환고리가 자신의 대에서 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석은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반복해서 산 정상으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 신화의 무의미하고 영원한 형벌이 불편했다. 불교의 업보와 윤회사상이, 니체의 영원회귀가 불편했으며 한편으로는 항상 뇌리에 새겨두려 했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한편으로는 간절히 염원했다.
자신을 새사람으로 변모시켜 줄 한 사람, 함께 새 삶을 일구어 나가게 할 그 한 사람을.
<Oedipus at Colonus (출처=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