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떨고 있나요
소현은 입사한 지 8개월 차인 신규 간호사로, 응급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속눈썹이 유난히 짙은 눈 덕에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고, 종종 맞닥뜨리는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신규 간호사답지 않은 야무진 일처리로 유독 눈에 띄는 편이었다. 당직 때만 가끔 응급실을 찾던 인석은 소현이 항상 의료용 마스크를 하고 있던 탓에 얼굴을 반 밖에 볼 수 없었지만 깨끗한 피부 위의 깊은 눈동자와 마스크 위로 드러난 오똑한 콧대로만 보아도 이쁠 것이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인석은 응급실에서도 늘 자신의 환자를 담당하는 신규 간호사의 이름을 불러주며 자신감을 북돋아주었으며 그렇게 소현의 이름도 알게 되었다. 수년 째 일하면서도 수십 명의 간호사들과 일을 해 본 인석이었지만 소현에게 더 눈길이 가고 관심을 갖게 했던 것은 그녀의 이국적인 외모뿐 아니라 그녀의 '인사'에 있었다. 응급실의 공기는 결코 밝은 편이 아니다. 내 자식 배 아프다는데 의사는 언제 오는 거냐며 따져대는 소아 환자 보호자들과 술에 절어 타박상을 입은 주취 환자 등으로 정신없는 북새통이거나, 심정지가 온 환자의 심장을 뛰게 하기 위해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의사 아래로 삐그덕거리는 침대 소리가 크게 울리는 무거운 적막함으로 가득 찬 공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너저분하게 가벼운 분위기와 심오하게 무거운 분위기 사이의 응급실에서 소현이 보내는 인사는 인석의 귀를 울리는 밝은 기운의 메아리였다.
"안녕하세요. 인석 선생님. PS [성형외과] 환자 많이 밀렸어요. 선생님 인기 많던걸요."
"하하, 어디서 여기 명의가 있다고 소문이 났나 보네요. 정말, 숨기고 싶었는데 이렇게들 찾아오더라고요."
크지 않지만 맑은 목소리의 인사와 함께 신규 간호사의 쭈뼛거림 대신 말재간을 부린 농담으로 인석은 괜히 심장이 간질거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당직근무날에 소현도 근무 중이길 바랐고 주임/선임간호사들이 주로 자리 잡고 있는 스테이션을 향하는 정문 대신 신규간호사들이 담당하는 경증환자들 병상이 있는 후문 쪽으로 응급실을 드나들며 소현과 마주치길 기대했다.
응급실은 이처럼 경증 환자부터 응급환자나 도착 시 사망 환자까지 다양한 환자들이 많기에 내, 외과를 망라한 모든 의료진이 들락거렸다. 그러다 보니 응급실을 드나드는 다양한 과의 많은 젊은 남자 의사들도 눈이 깊고 예쁜 신규 간호사를 한 번쯤 돌아보곤 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영상의학과의 모 선생님이 친한 직원들 사이에서 소현을 좋아한다고, 사귈 수 있게끔 잘 밀어달라고 도와달라며 부탁하더라는 소문이 들렸다. 몇 소극적인 의사들이 커피나 초콜릿 같은 것들을 사다가 무심한 듯 소현에게 주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인석이 소현에게 마음을 표현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데에는 진성이 얄궂게 비꼬아 말한 것도 있었지만 소현 주위에서 여러 남자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작용했다. 이것저것 재고 간 보다가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쓰린 속을 달래며 '그래, 인연이 아니었던 거야'하고 합리화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경쟁자들 또한 영상의학과, 응급의학과 등등의 의사들이었고 개중에는 큰 키에 출중한 외모의 정형외과 2년 차 선생님과 병원장인 재력가 아버지를 둔 신경외과 3년 차 선생님도 있었다. 일반적인 '결혼시장'에서 우위를 점했던 인석이 오히려 비교 열위인 상황인지라 직업과 배경을 내려놓고 날것의 '나 다움'으로 마음을 끌어야 했다.
인석은 마침 내일이 공휴일이었기에 소현도 근무를 쉬는지 확인하면서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을 요량으로 응급실로 향했다. 마음속으로 '소현 샘, 안녕하세요. 이브닝이에요? 내일 한글날인데도 근무해요?'를 자연스러우면서 장난스러운 톤으로 네 번째 되뇌는 중이다. 수천번도 더 다닌 병원 복도를 걷는데 새삼스레 발걸음이 어색하고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껏 스스로의 이성적 매력[직업과 배경 및 여타의 모든 것들을 포함한]에 대한 자신감으로 여자들의 관심을 끄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 정도로 오만하기까지 했던 그였다. 하지만, 동일선상의 쟁쟁한 경쟁자들 사이에 있자니 처음으로 드는 헐벗은 느낌과 거절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인석은 떨고 있었다.
'남자친구가 있으면 어떡하지?', '그저 직장 동료라 인사 몇 번 잘해 준 걸로 착각하는 걸까?' 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빠르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털어버리고는 응급실 자동문 앞에 섰다.
'어라?'
경증환자 병상들을 담당하는 이동식 간이 데스크 앞이 비어 있었다. 예의 그 자리에 앉아 이쪽으로 고개를 돌릴 소현을 기대하며 잔뜩 힘주었던 미소가 풀리면서 당황했지만 응급실의 수많은 눈들을 의식한 인석은 자연스럽게 응급실로 들어갔다. 인석이 슬쩍슬쩍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파란 간호사복 틈에 소현이 없는지 살피는 데 누가 앞을 막아서며 어깨를 툭 쳤다. 치료실에서 주로 봉합과 드레싱을 도와주는 응급구조사 혜진이다.
"어? 인석 샘. 응급실엔 웬일이야? 오늘 윤정선생님 당직이던데."
"아. 혜진 선생님. 저, 퇴근길에 응급수술 들어갈 저희 과 환자 있는지 확인하고 가려고요. 나가는 길이에요, 하하."
인석이 얼버무리면서 멋쩍은 웃음으로 가볍게 목례를 하며 스쳐 지나가려는데 수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충분히 의아해할 만한 하찮은 변명이었다. 근무 외 시간까지 할애하면서 일에 열심인 사람이 드물기도 했거니와 인석의 동기인 윤정 또한 3년 차 전공의로 웬만한 난이도의 수술과 교수님과의 기민한 연락이 가능할 터였다.
'그냥 잊어버린 가위 찾으러 왔다고나 할걸. 내가 언제부터 세심하게 응급실 환자 챙기는 참의사였다고...'
자연스러운 척하는 뚝딱거리는 발걸음으로 응급실 정문을 나온 인석은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빙 둘러 다시 병원 로비로 들어가 응급실 후문으로 향했다. 이대로 돌아가기엔 아쉬웠지만 이미 응급실 내 직원들이 어슬렁거리는 인석을 봤을 터라 당차게 들어가지 못하고 자동문 앞에서 서성였다. '인석 선생님이 응급실 누구를 쫓아다니더라, 작업을 걸었다더라' 하는 소문이 나는 상황은 소현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하겠지만 인석의 자존심이 허락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찰나, 수액 주머니를 잔뜩 실은 수레를 끌고 나오는 이송 기사님 덕에 열린 자동문 너머로 이동식 간호 데스크 앞에 소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인석은 얼굴에 드리워졌던 그림자를 말끔히 씻어내고 반가운 마음에 자동문을 열어준 기사님께 냅다 감사를 전하면서 소현에게 걸어갔다.
"고마워요, 장형 기사님! 오늘 하루도 파이팅 하세요!"
인석의 기대에 부푼 발걸음은 소현이 다가오는 인석 쪽을 돌아보기도 전에 인석을 소현 옆에 데려다 놓았다.
"소현 샘, 어디 갔었어요? 선생님이 데스크 안 지키고 농땡이 치러 가셔서 한참 찾았잖아요."
"농땡이라뇨, 무슨 소리예요. 채혈하느라 바빴죠. 곧 퇴근하는데 칼퇴하려고 빨리빨리 오더[처방] 받고 있거든요. 그보다 저를 왜 찾았어요?"
"아, 이브닝이구나. 내일도 근무하나 물어보려 했어요. 차라리 이브닝이면 오늘 퇴근하고 나랑 늦은 저녁 먹을래요?"
"네? 하, 참... 그래요, 그럼. 여기 선생님 번호 써 줘요."
항상 꼼꼼한 일처리와 당당한 목소리의 소현이었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던지 고개를 아래로 살짝 기울인 채 정면의 모니터만 바라 본채 옆으로 종이를 건넸다. 번호를 써 달라며 내미는 종이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인석은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그녀 또한 떨고 있다는 확신에 행복감이 북받쳐 어금니를 한번 꽉 물었다가 대답했다.
"풋, 뭘 번호를 써요, 아날로그 시대도 아니고. EMR [병원 행정 프로그램] 직원 명단에 내 이름 치면 번호 나오잖아요. 퇴근하고 연락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우물쭈물하며 '아, 그렇지 참' 하는 소현에게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보내고 걸어서 정문으로 나오는 인석은 날아갈 듯 가슴이 부풀었다. 기쁜 마음에 폴짝 뛰어 허공에서 양 발을 부딪히고 싶었으나 꾹 참으며 혹여나 소현에게 수작 걸었다고 소문 낼 사람이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확인했다.
아마 조물주는 세상을 조금 더 귀엽고 따듯하게 만들기 위해 설레는 순간, 심장과 팔다리의 근육을 덜덜 떨 수 있게 만들었지 싶다.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 갈 곳 잃은 두 눈의 흔들리는 초점, 움찔거리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대한 기억은 가늠할 수 없던 마음의 크기를 확인시켜 주고 덕분에 그날의 감정은 길이길이 기억된다.
인석은 집으로 향하는 길 어두컴컴한 저녁, 장밋빛 하늘 위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작은 손과 흰 종이를 떠올리고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려 애쓴다. 배배 꼬이는 손가락들을 어쩌지 못하여 깍지를 끼고 짧은 탄식과 함께 머리 위로 기지개를 쭉 켜 본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유난히 밝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