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살과 열한 살, 그리고 서른넷. 아빠가 간암으로 떠날 때 이승에 남긴 가족들의 나이였다. 초등학교 학부모 참관 수업 때면 항상 다른 엄마들 사이에서 제일 어리고 이뻤던 엄마는 남다른 생활력으로 보험 영업일을 하면서 악착같이 두 딸을 키워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은 꼭 두 딸을 데리고 쇼핑몰에 가서는 각자 십만 원씩 새 옷을 골라 사 입을 수 있게 했고 아토피성 피부염을 보일 때면 그 비싼 피부과도 데려다주었다. 그러면서 딸들에게 습관처럼, 나긋이 하던 말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렇게 세 가족이 똘똘 뭉쳐야 한다고. 그렇게 셋이 쭉 잘 살면 된다고. 그리고 남자는, 첫째도 책임감, 둘째도 책임감, 셋째도 책임감 있는 게 최고라고.
우리나라의 K-장녀들이 으레 그렇듯, 또 고생하는 부모를 가까이서 보며 자란 아이들이 그렇듯 소현은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다달이 엄마가 주는 용돈을 아껴뒀다가 용돈을 더 달라고 조르던 동생에게 주곤 했고 그럼에도 갖고 싶은 게 많던 동생이 떼를 쓰는 때에는, 지갑에서 지폐들을 세어보며 머뭇거리는 엄마의 손에서 만 원짜리 낱장을 낚아채는 모습을 볼 때에는 그 철없는 뒤통수에 딱밤을 쥐어박았다. 똑 부러지는 성격 못지않은 야무진 말주변으로 학교 선생님이나 어른들에게도 말에서 지는 법이 없었고 친척들이 모이는 명절날에는 수문장처럼 제 엄마를 지키는 소현의 기세에 아무도 엄마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못 했다. 세상을 떠난 아빠나 홀로 된 엄마에 대해 누구든 입을 잘못 놀렸다간 으르렁대는 조카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차례상을 엎어버릴 듯한 손아귀를 볼 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정 많고 구수한 삼촌 이모들로 북적였던 시골집에서 그럴 일은 없었다. 순천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할머니, 할아버지와 막내 이모를 도와 방학 때면 소현도 농사일을 거들었고 학기 중엔 키즈 카페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며 소소하게 용돈을 벌었다.
일용직 공사 현장일을 하며 고된 노동에 일주일에 일곱 날을 소주로 달래던 아빠의 배가 볼록하게 나오기 시작한 것은 소현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남들처럼 오목하게 들어가 있지 않고 튀어나온 배꼽이 이상하다며 병원 진료를 보라던 아내의 말을 무시하며 건강을 자신하던 아빠는 자신이 밭아 낸 선홍색 피 덩어리를 본 다음에야 대학병원을 찾았다.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기 간암'이라는 진단이 자신더러 한 말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 아빠가 기차 화통 삶아 먹은 듯한 괄괄한 목소리로 검사를 똑바로 하라고 소리치던 모습에서 제발 암을 고쳐달라는, 어린 두 딸이 있다며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보름이 채 흐르지 않았다. 당시 중환자실의 제한된 면회시간 때문에 아빠를 자주 못 보던 게 속상하던 소현은, 이제 면회시간이 끝났으니 나가야 된다며 타성에 젖은 건조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너무 미웠다. 자신과 달리 하루종일 아빠 옆에서 간호를 할 수 있음에,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그 시간을 전혀 소중해하지 않던 그 태도에, 아빠 이전에도 죽어가는 환자를 수없이 봐 왔고 아빠 이후로도 비슷한 환자를 계속 볼 것이라는 그 일상적인 목소리에, 치가 떨리도록 미웠다. 초등학생 소현은 그렇게 아픈 아빠를 가슴에 묻었고, 간호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아빠를 닮아 깡이 좋고 당당했던 소현은, 성인이 되기까지 친구들에게 아빠가 없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 싫었고, 무엇보다 친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끔찍이 싫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소현은 평범한 맞벌이 부모님 아래서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이쁘장한 친구였고 간호사라는 꿈을 위해 학교생활을 잘 챙기는 학생이었다. 꼼꼼하고 밝은 성격에 친구들의 고민 상담도 곧잘 해주고 또렷한 외모에 인기도 좋은 편이었지만, 아빠가 요절하고 여자들끼리 사는 집 특유의 분위기에 깊은 마음속 저편에는 항상 걱정과 불안함이 웅크리고 있었다. 사십 초반의 이른 나이에 자궁경부암이 발견된 엄마가 막내 이모와 함께 수술을 위해 서울로 향할 때는 낯익은 어둠의 기운이 집안을 덮치지 않게 하기 위해 동생과 애써 울음을 삼키며 다독였고, 갓 성인이 된 철없는 동생이 절제하지 못한 카드값으로 연체 고지서가 집으로 날아들었을 때는 소현과 엄마는 동생의 미성숙함을 심히 염려하며 연체액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일주일을 꼬박 고심했다. 자궁경부암은 초기였기에 무난하게 수술이 되었고, 동생의 카드 연체액은 소량이었지만 이러한 크고 작은 집안의 사건들에 소현네 가족은 매번 야단스러울 정도로 호들갑을 떨고 과한 걱정을 하는 편이었다. 그럴 때마다 소현은 아빠가 그리웠다가, 그것이 나약해지려는 감정일까 봐 애써 고개를 흔들고는 다짐했다. 셋이서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사는 중이라고. 앞으로도 능력껏 엄마와 동생을 부양하며 지키겠다고.
짙은 속눈썹과 그 아래서 형형한 빛을 내는 소현의 눈망울은 똑 부러진 인상을 주는 편이었고 실제로도 깔끔했던 면접을 통해 웨이팅 없이 동기들보다 일찍 서울의 I 대학병원 응급실에 취직했다. 삼교대로 바삐 돌아가는 응급실 근무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고된 편이었지만 스물셋의 나이에 사백만 원에 가까운 많은 월급 덕분에 엄마와 동생에게 넉넉히 용돈을 줄 수 있었고 이는 소현에게도 큰 위안이었다. I 대학병원은 서울 시내에서도 간호사 태움으로 악명이 높아 신규간호사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는 곳일 만큼 힘들었지만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순천으로 다시 내려온 큰 딸을 마주할 걱정 가득한 엄마의 눈이 떠올라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나마 소현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이틀 이상의 오프가 있을 때면 퇴근 후 쏜살같이 서울역으로 달려가 KTX를 잡아 타고 엄마와 동생이 있는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과 생각보다 간호사 일이 잘 맞아 동기들 사이에서 두각이 나타났다는 사실, 그리고 어엿한 성인이 되면서 외모가 한층 더 성숙하여 심심찮게 많은 의사들이 관심을 표했다는 점이었다.
소현은 학창 시절 여자 친구들과 분식집과 카페를 다니며 노닥거리길 좋아했고, 간호대학에서도 여자인 친구들 밖에 없었던 터라 남자에게 매력을 발산한다거나 불편한 고백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법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까칠하다는 인상도 없고 거절의 의사도 건네받지 못한 각 과의 남자직원들 [대부분은 젊은 전공의였다]이 각자의 방법으로 소현을 마음에 품거나 추근대고는 했다. 개중에는 영상의학과 공 선생님처럼 꾸준히 말을 걸고 주위를 서성대는 의사도 있어서 이러한 사실과 함께 소현의 이쁘장한 외모로 늦게까지 결혼하지 못한 몇 선임 간호사들에게 미움을 사는 일도 있었지만, 소현의 동생은 이런 언니를 부러워하며 집에 갈 때마다 새로운 뉴스거리가 없는지 물으며 성가시게 했다.
"아, 언니 너무 부럽다 정말. 내가 언니 얼굴이었으면 이 의사 저 의사 다 만나고 다녔을 거야."
"뭐래, 얘가."
"언니. 그러지 말고 한 번 만나보고 생각해. 그중에 제일 괜찮은 선생님 있을 거 아냐."
소현과 달리 고등학생 때부터 거리낌 없이 연애를 해 왔던 동생의 말에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얼굴이 하나 있긴 했다. 성형외과 3년 차 선생님인 강 선생님. 특별히 제일 잘 생겼다거나 잘 나서라기보다는 그 주변의 항상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인 공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치료실에서 집중할 때의 매서운 눈매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웃을 때의 그 큰 입과 눈웃음은 어딘가 소현을 편안하게 해주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지만 치료실 조무사 선생님들 사이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항상 여자친구가 있다고 들었다. 그것도 종종, 꽤 자주 바뀌는 것 같다고. 게다가 아버지가 대구에서 꽤나 큰 사업을 하셔서 의대 다닐 때도 부유한 집안으로 꽤 유명했다던데, 아무렴 어울리는 짝이 있으시겠지.
그렇게만 생각했던 강 선생님이 지금 소현의 남자친구가 된 것이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인석의 데이트 신청으로 소현은 반가움과 설렘, 당혹스러움과 걱정 사이의 복잡한 감정으로 뭐라고 답했던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기억은 낭만적으로 꾸며졌다. 처음 하는 연애 같은 연애에, 인석과 함께 하는 모든 것이 설레고 좋았지만 무엇보다 '별일 없어. 아무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식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그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고 앞으로도 기대가 되었다.
"오빠, 난 우리 가족과 내 인생에 큰 사고가 있지 않고 불행한 일이 없으면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요즘은 진짜 행복하다. 정말 좋다. 하는 생각이 자주 들어. 그래서 불안해. 이 행복한 마음이, 지금이 꼭대기 일까 봐. 그 뒤에 내리막길이고 불행할까 봐."
일진이 나빠 직장에서 안 좋은 소릴 듣고, 가족들의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도 번번이 잘 털어버리는 오빠는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넉넉한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인석은 웬만큼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견고한 정신력으로 어두운 면보다는 밝은 면을 보려는 편이었다. 소현에게 인석은 실패, 걱정, 역경 같은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나면서였다. 가끔, 뜻밖의 상황에서 무결해 보이던 인석의 삶에서, 완벽한 긍정주의에서 작은 틈들이 보이곤 했는데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조금 큰 균열 같은 걸 보았던 날.
"오빠, 치료실 현영 조무사님이 그러는데. 어머님이 극심하게 반대해서 헤어졌던 여자친구가 있었다며."
"휴, 그 선생님은 또 왜 그런 이야길 너한테 했대. 아, 물론 그땐 너랑 사귀게 될 줄 몰랐으니 한 말이셨겠지만."
"깔깔. 근데 의사 아들 둔 어머님들은 기가 엄청 세다던데. 나도 싫어하시고 헤어지라고 하면 어떡해. 잉."
"걱정하지 마, 그럴 일 없어. 그보다 다른 이유로 우리 집 엄청 어려울 거야. 부모님 볼 생각 안 하는 게 좋을 걸."
아직 소현은 아빠와 관련된 이야기를 진지하게 밝히지 못했을 때인데, 여자친구의 아빠가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시는 줄로 아는 인석은 그렇게 자기 가정사를 덤덤한 목소리로 풀어냈다. 몇 년 전부터 두 집 살림을 하며 뱃심 부리는 아버지와 남편에 대한 책망을 아들에게 해대시는 어머니. 가족 대소사와 명절 때 각자의 의무를 위해 마주하는 형식상의 부부. 데면데면한 그 분위기와 속에서 그만큼 말이 없는 세 아들들.
여성이 깔깔 웃어주며 관심을 보이면 의기양양해하고, '나는 정말 신경 안 쓰니까 얘기해줘 봐'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는 지금껏 만나온 모든 여자친구들의 얘기를 술술 풀어내는 게 남자의 단순함인지라 인석은 귀여운 표정으로 호기심 가득한 소현의 채근에 유년기부터의 가정사에 대해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소현은 인석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왜 그가 사랑한다는 표현에, 그리고 그가 낯간지러워하는 여러 마음 표현들에 그렇게 인색한 지. 왜 퇴근하면 홀로 집에서 싸구려 위스키를 홀짝이는지. 소현의 질투심을 불타오르게 했던 지난날의 연애들이 왜 그토록 짧고 많았는지. 그러면서도 소현에게 위안이 되었던 그들과의 특별할 것 없는, 보잘것없는 인연들. 왜 그것들이 만남 어플, 즉흥적인 술자리, 가벼운 친구 소개 등등으로 기회가 닥치는 대로 무언가를 해소하기 위한 것 혹은 무언가를 채우기 위한 것처럼 보였는지.
어릴 적 순천 할머니 시골집 대청마루의 오른편 기둥에 박힌 대못에 항상 걸려 있던 손전등이 생각났다. 해가 지고 어스름이 되면 땅거미가 빨리 내리는 시골에서는 저녁에 집을 나설 때 꼭 필요한 것이었다.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손잡이 끝에 엄지에 닿는 스위치가 있어 그걸 켜면 온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듯 환한 빛줄기를 뿜었었다. 그런데 종종, 낮에 텔레비전 리모컨의 건전지가 다 닳거나 벽시계가 멈춰 서 있을 때면 어른들이 임시방편으로 손전등의 건전지 두 개 중 하나를 빼가서 쓸 때가 있었다. 그렇게 낮에는 필요를 못 느끼다가, 어둠이 내리고 나면 그것을 물리칠 실용적이고 요긴한 손전등을 집어드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어둠을 몰아내고 환하게 길을 밝혀주리라 기대하면서. 스위치를 켜기 전까지는 고 놈 속이 한 마디 비어있다는 것을 모른 채. 그제야 욕지거리를 하며 사놓은 건전지 없냐며 요란을 떠는 어른들과는 달리, 소현은 조용히 우체통 옆에 있던 폐건지 통으로 가서는 까치발을 들고 폐건전지 통 입구에서 손목을 꺾어 바닥을 뒤졌다. 크기가 알맞은 폐건전지를 하나 건져서 손전등에 방향 맞춰 끼우기만 하면 아직 전력이 남아있는 예의 건전지 하나 덕분에 손전등은 하자 없이 잘 작동했고 스스로의 명석함에 방방거리며 뛰어 나가던 소현이었다.
겉으론 완벽하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이는 인석도 그랬다. 어둠이 오기 전까지는 마음 한 구석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건전지가 하나 없는 손전등처럼. 크기와 방향이 잘 맞는 건전지 하나만을 기다리는 손전등처럼. 소현은 자신이 꼭 들어맞을 것 같았다. 아니 분명 잘 들어맞아 그를 보듬어 줄 수 있었다.
세상에서 자신만 알고 있는 듯한 한 마디 남짓한 빈 공간. 그것이 조금은 안쓰럽게도, 그를 더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