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남녀의 연애가 대개 그렇듯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첫 만남의 새콤한 공기는 옅어지고 때론 권태도 찾아오는 법이다. 연애의 속사정은 당사자들만 아는 법이라 시샘과 부러움의 눈총을 받던 소현의 연애에도 남모를 고통이 있었다. 함께 한 시간이 많아질수록 생기는 이러한 마찰은 전에 없던 단점이 남자친구에게 생겨났다기보다는, 친밀감이 늘어남에 수반되는 단점의 시각화였다. 상대방의 눈짓, 접촉 하나에도 연신 두근거리던 심장이 그런 자극들에 적응하기 시작하고 눈꺼풀 위에 드리워졌던 장밋빛 장막이 걷힐 때면 그전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다른 점', '거슬리는 점'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현은 만남이 끝나는 지점, 인석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싫어 자꾸만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고 그렇게 둘이 함께 생활하는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꼭 맞는 완성형 남자친구인 줄 알았던 생각이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인석의 집 방문 뒤에서 굴러다니던 먼지 뭉치가 자신의 집에 생기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고 그의 방 한가운데 설치된 빨래 건조대 위에 걸레 냄새나는 구겨진 옷가지들과 덜 마른 옷들이 섞여 있어 그 사이 입을 옷을 찾아 헤매는 모습도 더는 볼 수 없었다. [양말과 팬티는 건조대의 대 사이로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곤 했다] 남자는 엄마가 반 만들어 놓으면 나머지 반은 아내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 했던가. 그래도 소현의 투정 어린 잔소리를 귀엽게 봐주는 인석이 조금씩 맞춰 주려 했고 언젠가부터 화장실 좌변기 앞에 서서 볼일을 보는 일도 없어졌다. 물론 한 번만에 고쳐지는 법은 없었지만. 천천히 사람이 되어가고는 있었다.
소현을 더 힘들게 했던 것은 인석의 바람기였다. 사귀기 전부터도 건너 건너 그의 과거 연애사를 숱하게 전해 들은 것도 있었지만 아버님의 여성 편력과 두 집 살림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의 말 한마디 시선 한 줄기까지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기도 유전이 되던가? 소현은 알고 있는 의학적 지식과 간호대학에서의 지난 교육 과정을 필사적으로 헤매며 유사한 내용을 떠올리려 했으나 그런 내용은 분명 없었다. 그러나 가족사진 속 아버님의 두드러진 와잠이 오빠의 눈 아래서도 보이면서 눈매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바람기도 닮았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인간은 보고 싶은 걸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법이다.
인석은 환자들에게 친절했고 치료 경과나 상태에 대한 설명도 자세한 편이어서 종종 병원 고객센터로 감사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다. 문제는 동료들에게도 그 사근사근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고, 더 거슬리는 문제는 직장 동료들 사이에는 이삼십 대의 여자들도 여럿 있다는 것이었다. 둘 다 일을 쉬었던 어느 토요일, 함께 데이트를 나서기 전에 의국에 있던 서류를 챙기러 잠시 병원에 가자는 인석의 말에 소현은 마지못해 따라 직장에 들어섰다. 태움과 위계로 점철된 이곳엘 쉬는 날까지 와야 하다니. 행여나 퇴근 후에도 병원 사람들과 마주칠까 부러 차로 이십여분 떨어진 위치에 오피스텔을 잡았던 소현의 마음은 아는지 모르는지 교수님 말곤 병원에서 눈치 볼 것이 없는 성형외과 4년 차 전공의는 태평하기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고 있던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지하의 직원식당에서 올라오는 듯한 여자 인턴 선생님 셋이 인석을 알아보고는 깍듯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ㅡ"
거기서 인사만 받고 멈출 수는 없었을까. 인석은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에 답하면서 엘리베이터에 탔고 오른편에 소현을 세워 둔 채 고개만 왼쪽으로 돌려 인턴 선생님들과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었다. 지금은 어느 과 돌고 있냐는 둥 성형외과 있을 때보다 얼굴이 폈냐는 둥. 소현은 온 신경이 그들의 음절 하나하나에 쏠려 있었고 겉으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으려 꼿꼿이 앞만을 주시한 채 외면했다. 성형외과 의국이 있던 5층까지 고작 4개의 층만 지나는데 유독 우리 엘리베이터만 느려터진 듯했다. 네 층 지나는 데 무슨 대화를 그리도 길게 하는지. 층 표시기의 숫자가 바뀔 때마다 소용돌이치는 감정도 답답함에서 짜증으로, 섭섭함에서 분노로 증폭되는 듯했다.
그날 병원을 나와서는 여느 커플들이 한 번은 다투어 봤을 법한 소재로 크게 싸웠고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2차전을 계속했다. 소현은 전혀 불필요해 보이는 대화와 웃음을 소모하는 인석이 전혀 이해 가지 않았고 인석은 직장 생활하면서 할 수 있는 스몰 토크가 아니냐며, 먼 미래에 개원해서도 원장은 아래 여직원들이랑 말도 못 섞는 거냐며 비약을 섞어가며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며 바락바락 우겨 댔다.
소현은 나를 더 신경 쓰고 챙겨주길 바란다며, 그저 나만 생각해 주길 바라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끔찍이 아껴주는 모습으로 왜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딱 붙어있지 못했냐며. 왜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들에게 여자친구라고 소개해주지 않았냐며. 그들보다,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임을 인정받고 싶다고 칭얼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대신에 독기 어린 눈과 비난 섞인 고함으로 치고받았고 격렬한 전투 끝에 다시는 이성과 불필요한 웃음과 대화를 나누지 않기로 협정을 맺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보면 많이 알려진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와 매혹적인 세이렌의 이야기가 나온다. 독수리의 몸에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을 한 반인반수 세이렌은 바다를 지나는 배들에 다가가 황홀한 노랫소리로 사람들을 홀리게 하여 물에 빠져 죽게 하는데 이 바다를 지나는 오디세우스는 노를 젓는 부하들로 하여금 미리 귀를 막게 하여 무사히 빠져나간다. 중요한 것은 오디세우스 자신은 그 노랫소리를 들어보고 싶은 궁금증에 귀를 막지 않은 채 부하들을 동원해 자기 몸을 돛대에 결박함으로써 죽음의 멜로디를 듣고 나간다.
일반적으로는 오디세우스의 지혜와 호기로움을 보여주는 일화로 소개되지만 소현은 오디세우스의 모험심과 호기심을 경계했다. 세상에는 세이렌이 너무나 많다. 세이렌을 맞닥뜨렸을 때 잘 대처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우선은 될 수 있으면 세이렌을 피하고 보는 것이 맞지 않나? 소현은 무릇 남자들 [성급하게 일반화하여]이 왜 위험을 불사 지르며 그런 것들에 도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돛대에 결박한 밧줄이 느슨해서 풀어져 버리면. 세이렌 중에 조금 더 발칙한 년이 가까이 날아와 날카로운 발톱으로 밧줄을 끊어버리면. 배가 여울목을 빠져나온 후에도 홀라당 넋이 나간 정신머리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땐 어쩌려고. 나는 안 그러려고 했는데 별수 없었다 이건가.
"걔랑은 한 침대에 있어도 아무 일도 안 생겨. 같이 목욕도 할 수 있어. 불알친구거든."
"그저 동창회일 뿐이야. 결혼한 애들이 태반이라니까. 걱정할 일 안 생겨."
한 번은 인석이 교수님의 부탁으로 사원증 바코드를 몇 개 더 만들어야 하는 일이 있었다. 휴대폰 케이스 뒷면에 바코드만 붙여서 수술방 출입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라나. 방법을 몰라 곤혹스러워하는 인석에게 한 수술방 간호사가 마취실 컴퓨터의 바코드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뚝딱 인쇄해 주자 화색이 오른 인석이 연거푸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러자 그 수술방 간호사는 귀찮은 일인데 해준 거라며 얄미운 생색을 내며 천연스럽게 술까지 사라고 채근했다더라. 산채로 낚아채려는 발칙한 세이렌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프가 언제냐 어디가 맛있냐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가 휴대폰에 남게 되었고 소현이 그걸 발견한 날 2차 대전이 일어났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도, 호의를 베푸는 데에도 적정 선이 있다. 그 선을 넘으면 사달이 날 수도 있는 거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일이기에 짝이 있는 세상 남녀들이 세이렌의 섬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기를.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세이렌들이 있음을 알고 있기를. 자신들이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전쟁 영웅이 아니라 말초 감각과 호르몬이 넘실대는 대로 흐느적거리는 한낱 인간에 불과함을 알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