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인다. 일반적으로는 단점으로 비추어질 행동이나 습관들조차 귀엽게 느껴지거나 관능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소현이 딱 그랬다. 크록스 슬리퍼를 신고 약간 벌어진 팔자걸음으로 병동을 누비는 남자친구의 모습이 당당하고 쾌활해 보였고, 봉합이나 드레싱을 할 때에 쓰는 의료용 가위를 습관적으로 약지에 끼운 채 위아래로 돌리면서 절그덕 절그덕 소리 내는 모습도 도발적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 그와 아무 사이가 아니었을 때도 보였던 행동들이지만 낭만적 감정에 빠진 지금 소현의 눈에 비치는 인석에게는 드라마 속 주인공이 등장할 때처럼 눈부신 조명과 말랑말랑한 배경음악이 깔리는 것이다.
이처럼 연인의 조목조목들에 빠져 낭만적 가치를 부여하다 보면, 객관성을 잃는 경우도 있고 그에 따라 주변을 의식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소현이 보기에 말재간이 좋고 큰 입이 매력적인 남자친구는 다른 이들에게도 분명 그렇게 보이리라 생각하며 조바심을 내게 되었다. 업무상 걸려오는 전화 너머로 들리는 간호사 목소리[대부분 여자였다]를 듣고는 꼭 무심한 척 몇 분이 지나고야 무슨 전화였냐며 묻는 소현에게 인석은 그때마다 귀엽다는 듯 볼을 꼬집으며 어디 병동에서 무슨 일로 전화가 왔다며 알려주었다. 그러고 나면 발신자가 상상 속의 경쟁자가 아니었음에, 또 인석의 자상한 설명에 소현의 샐그러졌던 눈빛도 졸이던 마음도 누그러지곤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 연인이 객관적으로도 매력적이고 남들이 보기에도 탐탁한 경우도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들이 보기에 인정하고 부러워할 만한 이러한 요건들이 충족된 상대를 고른다. 남일에 관심이 많고 제 먹고살 걱정보다 남들 가정사, 연애사에 더 기를 쓰고 조언하는 것이 우리 민족인지라 '내 기준'이 '남들 기준'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친구 많은 남자는 걸러야 돼. 의리는 개뿔 가정 버리고 의리 찾을 놈이야."
"남자 친구는 무슨 일 해? 아이고. 그거로 서울에서 애 낳고 살 수 있겠어?"
"여자가 가방끈 길어봐야 자기 잘 난 줄만 알아. 남편이랑 시댁 식구들 다 제 아래로 본다고."
소현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자친구의 직업을 말할 때면 종종 듣게 되던 약간의 놀람과 부러워하는 말들에 우쭐해지는 기분이 싫지는 않았지만 인석과의 운명적 만남이 조건적이고 자본주의적으로 비추어지는 것 같아 아쉬웠다. 첫 만남은 얼마나 낭만적이었으며 그가 어떤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지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던 이들이 성형외과 의사라는 말에만 유독 부러워하는 것이 보였고 어떤 이들은 아예 대놓고 '꼭 잡아서 결혼해야겠네'라거나 '돈 걱정 없어서 좋겠다'는 시기 가득한 소릴 하기도 했다. 그렇게 소현은 제 연애의 낭만성과 순수성을 침해받는 것이 싫어 남자친구가 같은 회사 직원이라며 두루뭉술하게 말하거나 직업만은 나중에야 조심스럽게 말하게 되었다.
그런 불편한 점 몇 가지만 제외하면 따듯한 봄날 같은 날들이었다. 응급실 근무가 손에 익어갈 무렵 새로운 신규 간호사들이 소현 아래로 여남은 명이 들어와 소현도 선배 태를 내기 시작했고 처음으로 엄마와 동생에게 남자친구 소식을 알렸다. 가족에 대한 넘치는 책임감에 애써 밝고 씩씩한 모습만 보이려 했던 큰 딸이 기댈 수 있는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엄마는 내심 반가워하는 기색이었다. 고된 3교대 근무와 쓸쓸했던 서울 타향살이도 이제는 남자친구에게 칭얼댈 수 있고 다독여 주길 바랄 수 있는 이유에 지나지 않았다. 인석은 종알대는 소현의 입술을 애틋하게 쳐다보면서 세심하게 들어주는 편이었고 필요할 땐 같이 욕해줄 줄도 아는 훌륭한 뒷담 동반자였다. 그러다가 귀엽다는 듯이 양팔로 힘껏 그러안아 숨 막히도록 소현을 가슴팍에 묻거나, 한 팔로 엉덩이께를 둘러 번쩍 들어 올릴 때면 소현은 제 심장이 두둥실 떠올라 턱밑에서 벅차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과 설렘이 극에 달할 때는 남자친구를 물 때였다. 소현은 언젠가부터 인석의 몸을 물었다. 팔과 어깨가 주로 그 먹잇감이었고 가끔 가슴을 물기도 했다. 고기쌈을 입에 넣을 때처럼 크게 입을 벌려 인석의 팔을 그 사이에 넣고 와앙 하고 세게 물었다.
"아야. 또또. 여기 봐 자국 남았어 네 이빨 자국. 왜 자꾸 깨무는 거야?"
"히히. 몰라. 그냥 오빠 보고 있으면 자꾸 물고 싶어 져."
인석의 살을 입 안 가득 넣고 잘근 물고 있으면 말랑한 살에서 행복이 배어 나오는 듯했고 양 턱 근육이 야릇하게 죄어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 더 크게, 더 많이 입안에 담아 물면 그 충만함이 배가될 것 같아 매번 욕심 껏 입을 벌렸고 세게 물면 물수록 행복의 즙이 더 나오는 것처럼 있는 힘껏 물었다. 가끔 지나친 욕심에 인석의 어깨나 팔에 시퍼런 멍과 함께 위아래로 가지런한 일(一) 자 자국이 4개씩 남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본인이 낸 흔적이라는 생각에 뿌듯해하곤 했다. 새삼 소현은 송곳니가 낮고 몽톡한 편이라 상처를 내지 않는 점이 다행스러웠다.
소현은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주변을 잘 챙겼다. 엄마와 통화할 때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일은 어땠는지, 기분은 어떤지 살갑게 물어보며 항상 끝으로 사랑한다 말해주는 딸이었다. 부모님 뻘 되는 기사님께 술 줄이고 건강 챙기라며 정겨운 잔소리를 하거나 조무사 여사님께 아들 학교생활 잘하고 있냐며 넉살 좋게 챙기기도 했다. 부모님께는 일주일에 한 번 전화할까 말까 하는 인석에게는 소현의 가정적인 모습과 따듯함이 퍽 인상적이었다.
"딸만 있는 집이라 그런가 보다. 우리 집은 아들만 셋이라.... 아들 낳아봤자 소용없다는 게 이래서 그런가 봐. 아님 경상도 지역색인가?"
밖에서도 가게에 들어설 때와 마찬가지로 나갈 때에도 '맛있게 잘 먹었어요, 사장님'라거나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안녕히 계세요.'등의 인사를 잊지 않았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앉아 있을 때면 정차할 때마다 출입구 쪽만을 주시하면서 어르신이 보일 때면 멀리서부터 세차게 손짓하여 자신의 자리로 안내하곤 했다. 인석은 이런 소현의 행동들이 전혀 거리낌 없고 어색하지 않음에 신기해하며 사랑스러워했고 소현은 표현하는 게 왜 어렵냐며 의아해하면서도 자기를 이뻐라 해주어 기뻤다. 소현은 인석에게도 가슴에서 차오르는 감정과 벅찬 설렘을 아낌없이 표현해 주었다.
"참 다정해 오빠는. 난 오빠가 나 이렇게 챙겨주는 게 참 좋아."
"오빠는 뭐 씹을 때 솟아오르는 턱이 섹시해."
"오빠. 사랑해. 정말 많이."
오빠는 사랑한다는 말이 어떻다는 둥 뭐라 뭐라 하며 대답을 잘 못 했고 약간 불편한 기색도 보였다. 소현은 한편으로는 서운해하면서도 그를 이해했다. 당황해하고 어색한 모습도 사랑스러웠고 그를 사랑했다. 그래서 더 자주 사랑을 표현했다. 이따금씩 내비치지 못하는 그의 마음도 헤아려 짚어주기도 했다.
"오빠 지금 나 심심해할까 봐 친구들 약속 안 가려는 거구나? 오랜만에 보는 고등학교 친구들인데 재미가 없긴 왜 없어. 나 생각해서 안 가려는 거면서 쑥스러워서 그렇게 말하는 거지?"
"공 선생님한테서 카톡 왔는데 질투 안나?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말하면 돼, 오빠. 이렇게 저렇게 해주면 마음이 풀릴 것 같아라고 표현해 줘야 해."
"말로 표현해 주지 않으면 몰라. 마음도 표현하지 않으면 그런 마음도 없는 게 돼 버려."
조곤조곤 말해 줄 때면 낯이 간지러운 듯 '물론 나도 표현하지. 할 수 있지 왜 못 해' 하며 머쓱해하면서 여전한 인석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소현이 하는 말과 표현들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어색하지 않으려 장난기를 섞어 가며. 속상하다, 서운하다, 보고 싶다부터 천천히. 함께 일렁이는 풀에 어느 틈엔가 화르르 옮겨 번지는 들불처럼. 풀 끝부터 인지 밑동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어느샌가 뜨겁게 번지는 들불처럼.
소현이 연이은 나이트 근무 후 쉬는 날 아침이었다. 출근하려는 인석의 볼에 입을 맞추며 나직하게 '오늘도 사랑해 오빠'하는 소현에게 눈을 한번 마주친 인석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입을 옹알거린다.
"응. 나도 사랑해."
소현이 화들짝 놀란 동그란 눈으로 '오빠,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하고 장난기와 행복감이 뒤섞인 목소리로 외쳐보지만 현관문이 쑥스럽게 이내 닫힌다.
잠기는 도어록 멜로디가 유난히 은은하게 마음속으로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