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석은 요즘 말 그대로 가슴 뛰는 연애를 하는 것 같다.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느낌 때문에 혀를 자꾸만 입천장에 힘주어 붙이고 가슴이 뜨끈뜨끈 해지는 이 느낌이 사랑이라고는 못 했지만, 겪어본 적 없는 설레는 연애 중인 것만은 분명했다. 인석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는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그것, 성인들의 인류에 대한 그것에 버금가는 숭고한 그것처럼 느껴져 언제나 조금은 망설여지고 오글거리는 말이었다.
인석이 전에 없는 설렘을 느끼는 데에는, 누구든 '이쁘다'는 말이 나올 법한 소현의 귀여운 외모도 단단히 한몫을 했지만 사내 연애가 주는 특별한 즐거움도 있었다. 소현과 사귀기 시작하면서부터 인석은 일과 중 여유로울 때면 줄곧 신규 전공의 업무였던 응급실 환자 진료를 선심 쓰듯 자처하여 내려가곤 했다. 좀 쉬어요 선생님, 오늘도 당직이잖아요. 마치 후임들을 세심하게 챙기는 선배 전공의인 것처럼. 절대 보고 싶은 응급실 간호사가 있어서는 아니라는 것처럼.
식탁 모서리나 자동차 문 모서리 같은 것에 찧어 찢어진 환자의 이마를 간단히 꿰매어 주고 치료실에서 나올 때면 으레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니는 소현을 볼 수 있었다. 인석은 누가 볼세라 수많은 푸른 간호사 복들 중 소현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지 않도록 부러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몰래 다가가서는 손가락으로 소현의 엉덩이나 등허리의 브래지어 끈 부위를 꾹 누르곤 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화들짝 놀라 허리를 당겨 세우던 소현은 익숙한 뒤통수와 걸음걸이를 알아보고는 인석이 자신을 보러 내려왔다는 벅찬 두근거림을 느끼는 것이었다.
규모가 큰 직장에서 사내 연애를 하게 되면 둘의 부서와 업무가 다르더라도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직장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모 간호사가 일처리를 너무 못하네, 누가 사고를 쳐서 징계위원회가 열렸네 재잘거리는 소현의 얘기들도 재미있었지만 가장 큰 묘미는 타과 의사들의 고백이었다. 대부분의 사내 연애를 하는 연인들이 그러하듯, 인석과 소현은 병원 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비밀 연애를 했고 그러다 보니 소현의 남자친구 자리를 빈자리로 생각한 뭇 젊은 의사들이 종종 마음을 표현했다. 사탕과 함께 쪽지를 받았다거나 수액 준비실에까지 숨죽이고 들어와 밥 한번 먹자하더라는 등의 사건들을 소현이 전해주기도 했고 심지어는 인석의 눈으로 직접 모 의사가 추근대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환자의 상태와 처치에 대한 업무적인 대화였을 수 있었겠지만 어쨌든 인석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재미있는 것은 인석의 조바심과 질투가 일관적이지 못했다는 것이다. 치근덕거리는 상대가 재력가 집안의 신경외과 최 선생님이었을 때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어떻게 대처했냐며 소현에게 따져 물었고 수개월 째 쭈뼛쭈뼛 마음을 보내는 영상의학과 공 선생님 이야기에는 수더분하고 순박한 그의 얼굴이 귀엽다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훤칠한 외모와 큰 키로 학부 시절 인기가 좋았던 정형외과 2년 차 김 선생님이 자신에게 고백했다는 얘기를 소현에게서 전해 들었을 때는 잘생긴 그를 이겼다는 알량한 승리감과 우월감에 도취되어 입꼬리가 우쭐거리기도 했다.
직장 건물 곳곳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창고, 비상용 승강기 같은 곳이나 인적이 드문 장소를 잘 아는 부류가 둘 있다. 임금을 받고도 응당 그에 상응하는 노동이나 생산을 하지 않고 스리슬쩍 자리를 비우는 이른바 '월급루팡'족들과 사내 연애족들이 그들이다. 이 두 부류는 각기 다른 이유로 근무 중에 직장 상사와 동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찾는다. 인석 또한 지난 몇 년간 잘 쓰지 않거나 있는 줄 조차 몰랐던 장소들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이따금씩 소현과 짧지만 그래서 더 애틋한 만남을 이루곤 했다. 아무도 없는 성형외과 의국이나 의료비품을 운송하는 비상 승강기실에서 미리 연락하고 만난 소현을 으스러지도록 꼭 끌어안거나 양 손바닥으로 소현의 얼굴을 잡고 있는 힘껏 끌어당겨 입맞춤을 오래도록 했고, 그럴 때면 소현은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작은 소리로 읍읍 거리며 오종종한 손가락들을 쥐고 인석의 어깨를 투닥거리며 떨어지려 애를 썼다. 그곳의 몽글몽글한 공기와 소리 없이 깔깔거리는 것의 즐거움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인석과 소현사이의 관계를 눈치채고도 모르는 채 한다는 것 또한 둘만 모르는 것 같았다.
과거의 많은 여자들과 달리 소현이 인석에게 유달리 특별했던 것은 그녀의 나이가 여섯 살이나 어려서 인지 혹은 그 때문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함 같은 것이 느껴져서 인지는 모르겠다. 짙은 속눈썹이 돋보이는 두 눈망울과 도시적인 느낌을 주는 고운 얼굴과는 달리 알아갈수록 시골스러운 매력에 나풀나풀 흙냄새 나는 나비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저기 식당을 데려가 본 바로는, 소현은 이국적인 파인다이닝에서는 1인분의 반도 채 못 먹고 생글거리며 포크를 내려놓는 반면 2대째 이어진 어느 주인 할머니네 김치찌개와 동부간선도로를 건너 즐겨 찾던 선지 해장국은 국물까지 싹 비워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라남도 순천의 해룡면 시골에서 자랐다는 소현은 삼겹살 집에 가면 종종 베어 문 청양 고추를 인석의 눈앞에 흔들며 어릴 적 방학 때면 할머니네 밭에서 고추 종자를 분류하고 모종을 심느라 늘 몸빼바지 차림이었던 얘기를 했다. 식당에서 무생채가 나올 때면 무는 가을 무가 제맛인디 라며 종알거렸고. 벌교에서 주먹자랑하면 안 되고, 여수에서 돈 자랑하면 안 되며 순천에서 외모자랑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면서 저를 보라며 옛 말이 딱 맞다고도 했다. 소현이 자취하던 방에 놀러 갈 때면 '안녕, 자두야'나 '마루코는 아홉 살' 같은 처음 보는 만화를 틀어주면서 오프닝곡을 따라 부르곤 했다. 광역시와 서울 도심에서만 살아왔던 인석은 수수한 그런 모습들이 사무치게 귀여웠고 문명의 발전에 관계없이 개발을 못하도록 지정하는 문화재처럼 소현의 시골스러운 면면들을 지켜주고 싶었다.
한편으론 마음 한켠에서 뭉게뭉게 피어난 불안감과 죄책감이 인석의 심장을 죄어 왔다. 이제껏 독신으로 즐겁게 즐기며 살겠다 다짐했던 삶이 한순간에 뒤집어질까 봐. 최근에 셋째를 가진 개원가의 한 선배가 우스갯소리로 그랬는데. 심장이 간질거리기 시작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딱 그 찰나가 위험하다고. 그 순간을 못 이기고 결혼하면 이렇게 하루종일 수술해서 처자식 먹여 살리는 삶을 산다고.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던 그의 마지못한 웃음을 떠올렸다. 그래서 미안함에 죄책감이 들었다. 난 비혼주의이고 연애만 하고 살 거라고 말해야 했기에. 혹시 많은 여자들처럼 너도 연애의 종착지가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면 언젠가 정리하고 각자의 길을 가야 했기에. 과거에도 많은 여자들을 만났고 앞으로도 연애만 하면서 가볍고 편하게 만나겠다는 것은 곧 너도 그 여럿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이었기에.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난 결혼 생각 없어. 결혼 안 하고 살려해서."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굉장히 속상할 말일테고, 전혀 생각이 없다면 인석 쪽에서 김칫국을 사발로 마신 꼴일 터였기에 식탁 위에 놓인 피자 조각을 보면서 말했다.
"하, 참. 뭐래. 오빠, 나도 생각 없거든요. 웃기셔, 누가 결혼하자 했냐고."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헛헛한 허파소리를 내쉬면서 소현은 평생 엄마만 모시고 살 거라고 늘 언니랑 약속했다며 말했다.
"그리고, 결혼하려면 오빠 말고도 한참 많거든요. 신경외과 최 샘, 영상 공 샘, 내과 3년 차 샘도 알지? 참, 정형외과 김우식 선생님도 있지. 오빠가 잘 생겼다던 그 샘. 다들 자기들은 결혼 준비 다 돼 있다고, 몸만 오면 된다고 어찌나 호소를 하던지. 그런데 오빠는 무슨 배짱으로 날 거부하는 거지? 나 아직 한참 어려서 오빠랑 헤어지고도 결혼할 사람들 줄 섰어, 왜 이래. 메롱이다."
소현은 조금의 당황한 기색 없이 의기양양해서는 턱을 위로 치켜들며 말했고 익살스럽게 옹졸한 혀를 내밀었다. 인석은 '그냥 그렇다고, 괜히 나만 김칫국 마신 것처럼 됐네' 하며 멋쩍게 웃었다. 진짜로 그런 듯했다. 삶이 절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죽이겠다며 협박하는 것은 무용지물인 것처럼, 자신과의 결혼이 간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너와 결혼하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런 기색을 느꼈으나 인석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허튼 생각을 하지 말자는 식의 언질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너는 왜 나를 만나는 걸까. 다양한 과의 전공의들이 앞서 구애를 했는데. 키도 크고 인물이 더 좋은 사람도 있었는데. 남은 여생 생활고라고는 없을만치 억 소리 나는 재력가도 있었는데. 환심을 사려는 뭇 남자들에게는 짐짓 쌀쌀하게 굴던 네가, 왜 그날 내 앞에서는 볼이 발그레지고 손을 떨었을까.
누군가 저를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 때문에 나와 사귀고 결혼을 하고 싶어 한다고 늘 생각했던 인석이었다. 소현이 인석을 대하는 방식은 달랐다.
"그냥, 오빠가 좋아"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굴려 인석의 얼굴을 이마에서 뺨으로, 다시 입술에서 코로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소현은 곧잘 그렇게 말했다. 그냥 좋다고. 인석의 냄새가, 웃을 때 입이 한없이 커져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입동굴이, 그리고 내 것의 두 배 크기는 되는 것 같다던 앞니들이. 음식을 씹을 때면 귀 아래로 더 도드라지던 각진 턱이. 그냥 좋다 그랬다.
인석이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나갈 적엔 차조심, 술조심하라며 배웅했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차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술자리에서 흥에 겨워 목소리가 커지고 신이 났던 다음 날이면,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항상 주량을 한병 줄여 말하라 일렀다. 그래야 실수를 안 하게 되고 남들이 오빠 흉볼 일이 없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하고 소현을 찾아가 새벽녘에 고래고래 소현을 불러 동네사람들을 깨워버린 사고를 친 다음날, 인석을 앉혀 놓고 다그치며 혼을 냈다. 한 팔로도 족히 감싸 안을 작은 체구로, 오종종한 그 손가락들로 하나씩 오빠가 잘못한 점을 꼽는 모습이 귀여워 혼이 나면서도 인석은 배실배실 웃음이 났다.
인석은 엄마가 아닌 연인이 아껴주고 신경 써 주는 느낌에 전에 없던 행복을 느꼈지만 불편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가슴이 뜨뜻하고 진득한 젤리가 된 듯한 그 느낌에 빚을 진 것 마냥 불편했지만 또 행복했다.
"오빠는 왜 사랑한다고 안 해? 보통 남자친구들은 여자친구한테 하잖아"
"... 원래 잘 안 해. 그건 정말로 가슴 북받치도록, 내 모든 걸 희생하면서까지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일 것 같은데. 난 잘 모르겠더라고, 지금껏. 그래서 해 본 적 없어"
"으응. 나는 오빠 사랑해"
이초 정도의 침묵이 흘렀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소현의 눈을 못 마주치겠던 인석이 고요의 시간이 영겁 같다고 느낄 때쯤 한번 더 들렸다.
"오빠. 사랑해애"
한번 더. 오빠를 부르고는 뜸을 한번 들이고. 마음을 잔뜩 담은 듯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누군가에게는 가장 듣고 싶을 낭만적인 한마디일 테지만 응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인석에겐 가슴을 무겁고 아프게 짓누르는 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