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뛰기

느리게 뛰면 더 빨리 뛸 수 있다

by 박정미

느리게 뛰면 멀리 갈 수 있다. 요즘 나의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는 ‘느리게 느리게’. 느려도 충분한데 자꾸만 조급해지려고 했다. 무엇을 하든 느리게 제대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급히 가다 보면 끝까지 못 갈 수가 있다.


“일요일에 A랑 셋이서 운동장 뒤로 가서 반지미길, 장수, 깔딱 고개, 운동장 코스로 돌까요?” 그저께 마라톤 동호회 고문님이 카톡을 보냈다. 좋다고 답장을 보냈고 우리는 아침 6시에 만나기로 했다.


폭염이 이어지면서 지난주와 이번 주 그러니까 오늘까지. 동호회에서는 훈련 방학 중이었다. 날씨가 너무 더울 땐 쉬자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지난주는 공식적으로는 쉬었지만 지인과 함께 개인적으로 달리기를 했었다.


오늘은 5시 30분에 집을 나와 시민운동장으로 향했다. 아침은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언제 더웠느냐는 듯이 며칠 전 입추를 지나자마자 기온이 갑자기 뚝 떨여졌다. 오늘 아침 기온은 22도까지 내려갔었다. 반팔 반바지가 쌀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러닝 조끼에 물 500ml 두 병을 넣어 입고 모자를 쓰고 그 위에 고글을 얹은 뒤에 양말을 신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파워젤도 하나 챙겼다. 지난주에 몹시 배가 고팠던 기억 때문이다.


무릎 테이핑을 하려 했지만 준비해 둔 게 다 떨어져 포기했다. 아침식사로는 어제저녁 쪄두었던 단호박을 먹었다. 지난번에는 너무 오래 쪄서 물컹해서 맛이 없더니 어제는 적당히 쪄져서 살캉거리고 단맛이 더 났다. 단호박을 한 상자 사 두었더니 요긴하게 잘 먹는다.


운동장에 도착하자 벌써 고문님이 와 있었다. 70대 러너지만 주황색 싱글렛에 짧은 바지 검은색 타이즈까지 입은 모습은 30대처럼 보였다. 작년 초 운동장에서 처음으로 뵈었을 땐 정말 그 나이인 줄 알았다.


고문님께 인사를 하자 같이 뛰기로 A가 어딜 가서 못 온다고 했다. 고문님과 둘이 뛰기로 했다. 먼저 코스를 설명해준다. 운동장 뒤편으로 가서 반지미 길로 간다음 그곳에서 오른편으로 가지 않고 왼편으로 간다는 거다. 그쪽으로 가면 장수가 나오고 그 길로 해서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오면 된다고 했다.


반지미 길까지는 많이 가봤다. 늘 오른쪽으로만 갔지 왼쪽으로는 가보지 않았다. 약간 기대되었다. 정각 6시에 우리는 출발했다. 고문님이 나의 속도에 맞춰준다고 했다. 요즘 페이스가 떨어져 부담이 있었는데, 덕분에 편안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슬슬 뛰었다. 뛰다 보니 금세 1킬로미터 알림이 울렸다. 페이스 7분대였다. 바람이 살짝 불고, 어쩐지 가을 냄새가 났다. 뛰기에 완벽한 날씨였다.


“이런 날 회원들과 같이 뛰면 좋은데 아쉽네.” 고문님이 말했다. 정말 그랬다. 한 주만 쉬고 오늘은 함께 뛸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지미 길에 도착해서 왼쪽으로 틀자,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두전 2. 넓은 들에 초록색 벼들이 넘실거렸다. 이야기를 나누며 가다 보니 어느덧 알람이 7킬로미터를 알려줬다. 우리는 멈춰서 러닝 조끼에 든 물을 꺼내 마셨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꽤 긴 거리를 뛰었는데도 지루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며 뛰었기 때문이었다.


13킬로미터 지점에서 다시 한번 쉬었다. 이번에는 물을 마시고 파워젤도 하나 뜯어먹었다. 파워젤은 너무 달아서 보통 반 정만 먹고 버린다. 오늘은 배가 고파서인지 하나를 꾹꾹 눌러 모두 짜서 다 먹었다. 배가 고프면 뭐든지 입에 잘 들어간다.


그렇게 잠시 쉬고 우리는 다시 달렸다. 길은 평지가 계속되다가 오르막이 나타났다. 그곳이 ‘깔딱 고개’라고 불리는 곳이라고 했다. 생각보다 급경사는 아니고 완만했했다. 빨리 뛴다면 숨이 깔딱깔딱 넘어갔겠지만 속도를 그리 높이지 않았기에 비교적 편안하게 뛰어 올라갔다.


오르막뒤엔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내리막길에선 몸이 가벼워져 신나게 내려왔다. 다 내려오자 익숙한 거리가 나타났다. 항상 차를 타고 다니던 장수 쪽 길이었다. 차만 타고 다니던 이쪽 방향을 내 두 발로 뛰어 왔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로웠다.


앞으로 얼마 정도 남았냐고 고문님께 물었다. “약 2.5킬로미터 정도 남았어요.” 약 3~4킬로미터를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자 갑자기 몸이 더 가벼워졌다. 웃으면서 속도를 높였다. 다리가 가볍게 앞으로 나갔다. 그동안 무리 하지 않고 느린 속도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빠르게 뛰면서 머릿속에서 생각이 뭉게뭉게 올라왔다. 달리기 하던 초창기, 반환점까지는 무조건 천천히 가라는 조언을 듣고 속도를 참 많이 늦춰서 뛰었다. 그렇게 반환점까지 가면 그때부터 마음자세와 눈빛이 달라졌다. 마음먹고 속도를 내면 더 낼 수 있었다. 도착점에 가까워질수록 속도는 더 빨라졌다. 오랜만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지막 1킬로미터는 5분 30초 페이스로 들어왔다. 다 뛰고 나자 오랜만에 희열을 느꼈다. 만족스러운 달리기였다. 에너지가 남아 넘쳤다. 고문님이 가져온 시원한 이온음료를 마셨다. 몸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운동장 트랙을 좀 더 돌까’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곧 마음을 접었다. 물을 많이 마셔 배가 빵빵했기 때문이다. 서서 쉬면서 가민 앱의 기록을 확인하고 카톡도 확인했다. 운동장을 배경으로 사진도 하나 부탁해서 찍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달리기였다. 16킬로미터를 뛰었다. 20킬로미터쯤 뛰었으면 했지만, 오늘은 오늘 뛴 것만으로 만족한다. 거의 느리게 일정한 페이스로 뛰다가 마지막에 전력으로 뛰기. 그래 바로 이거였다. 놓쳤던 감각을 되찾았다.


느리게 달리는 것이 오히려 빨리 달릴 힘을 만든다. 삶도 마찬가지다. 허둥대며 서두를 이유는 없다.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가면 결국 원하는 곳에 도착한다. 조급함을 내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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