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추월되지만, 헤리티지는 축적된다

직무로 읽는 세상이야기 03화

by 박재영


기술은 추월되지만, 헤리티지는 축적된다

-- K-패션, '시간의 주인'이 되는 법


0. 패션 브랜드로 세계시장을 확장하는 사람들

우리는 한때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OEM으로 시작해 저가의 자체 브랜드를 만들고, 기술과 디자인의 완성도를 높이고, 마케팅을 강화하다 보면 언젠가는 세계시장에서 제품력과 브랜드로 인정받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실제로 한국 산업은 그렇게 성장해 왔습니다. LG전자의 가전, 삼성전자의 갤럭시, 현대자동차의 자동차는 OEM과 하청을 거쳐 마침내 ‘자기 이름’으로 세계 시장을 제패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기대했습니다. 의류·패션 역시 같은 산업 발전의 경로를 밟을 수 있을 것이라고요. 하지만 패션은 생각보다 훨씬 높은 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 기술은 ‘추월’이 가능하지만, 헤리티지는 ‘축적’만 가능하다

LG전자, 삼성 그리고 현대차가 세계를 제패한 방식은 전형적인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이었습니다. 기술은 숫자로 증명됩니다. 화질, 연비, 내구성처럼 기능의 우위가 확보되면 후발주자라도 시장의 순서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패션은 다릅니다. 아무리 옷이 튼튼하고, 디자인이 세련되어도 그 자체만으로는 ‘샤넬’이나 ‘폴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샤넬은 코코 샤넬의 1920년대 혁신적 라이프스타일 서사를, 폴로는 랄프 로렌의 '아메리칸드림' 이미지를 통해 가격을 정당화합니다. 반면 한국 브랜드는 이런 서사를 쌓지 못해 '기능' 중심으로 머물렀습니다."


패션의 가격과 위상은 기능이 아니라 ‘누가 입었는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왔는가’라는 무형의 자산에서 결정됩니다. 기술은 '객관적 스펙(성능)'으로 추월이 가능하지만, 패션은 '주관적 헤리티지(역사)'가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100년의 시간(Heritage)은 자본으로도 단숨에 살 수 없었습니다.


패션은 100년 전 누군가가 입었던 코트의 이야기를 사기 위해 싸우는 '서사의 세계'입니다. 기술은 증명하는 것이고, 패션은 동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삼성이 성능으로 세계를 설득할 때, 패션은 오직 '매혹'으로만 국경을 넘을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스펙으로만 접근했기에, 한국 패션은 오랫동안 그 높은 벽 앞에 멈춰 서 있었습니다."


2. "30년 전 도전, 그리고 남긴 교훈”

한국 패션의 글로벌 도전은 이미 199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대한민국 대표 패션의류기업들이 급성장하던 중국 시장에 내수 브랜드를 직접 들고 진출했습니다. ‘한국에서 만든 합리적인 브랜드’를 중국에서는 고급 브랜드로 포지셔닝하는 전략이었고, 결과는 단기간에 화려했습니다. 수천 개 매장이 빠르게 열리며 눈에 띄는 성장을 이뤘습니다.


그 정점에 있었던 사례가 이랜드의 중국 사업입니다. 1994년 상하이 법인을 설립한 이랜드는 백화점 중심의 고급화 전략으로 티니위니, 로엠, 스코필드 등 40여 개 브랜드를 확장했고, 한때 매장 수는 8,000개에 달했습니다. 이랜드는 분명, 한국 패션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해외 진출 사례였습니다. 그러나 2017년, 중국 매출의 핵심이던 티니위니를 약 8,700억 원에 매각하면서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재무적으로는 성공적인 선택이었지만, 산업적으로는 중요한 질문을 남겼습니다.


이 브랜드는‘세계가 공통으로 인식하는 브랜드 자산’이었을까, 아니면 ‘중국 시장에서 강력하게 작동한 비즈니스 모델’이었을까. 시간이 지나며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이 성장의 본질은 브랜드 헤리티지의 축적이라기보다, 한국식 기획·유통·운영 역량을 중국에 가장 먼저 이식한 결과에 가까웠습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K-컬처라는 글로벌 문화 인프라가 강력하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성공한 브랜드’와 ‘세계가 인정하는 브랜드’ 사이에는 끝내 좁히지 못한 간극이 남았습니다. 이 경험은 실패가 아니라, K-패션이 다음 전략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실험이었습니다.


3. 브랜드 빌더가 아닌, ‘플랫폼 아키텍트’의 시대

이 시행착오 끝에 K-패션은 냉정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무한정 자본을 투입해 새로운 이름을 키우는 대신, 이미 100년의 시간을 가진 해외 IP(Intellectual Property:지식재산권)의 주인 혹은 설계자가 되는 편이 훨씬 빠르고 확실하다는 판단입니다. 그래서 전략은 분명하게 바뀌었습니다.


"과거 이랜드의 전략이 중국인이 좋아하는 색상과 디자인을 맞추는 ‘로컬라이징(현지화)’이었다면, 지금의 성공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제 K-패션은 한국인이 입는 방식 그대로가 세계적인 기준이 되는 ‘글로벌 스탠더드화’를 지향합니다. 현지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공통으로 열광할 만한 K-Vibe의 규격을 만들고 이를 이식하는 것. 이것이 30년 전 선배들과 지금의 아키텍트(Architect :구조와 전체 틀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사람)들이 가진 결정적인 시선의 차이입니다."


라이선스에서 소유로: K-패션 글로벌 전략의 출발점

K-패션의 글로벌 전략은 라이선스 운영 → 브랜드 소유 → 시스템 확장 → 팬덤 기반 IP 창출이라는 네 단계의 진화를 거쳐왔습니다.


첫 단계는 라이선스 운영입니다. 영원무역이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 라이선스를 받아 한국 시장 내에서만 성공시키는 구조였습니다. 이는 ‘제조·운영 역량’을 증명한 단계였지만, 글로벌 확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다음 단계는 소유와 확장이었습니다. 휠라(FILA)를 인수해 브랜드 자체의 주인이 되고, 타이틀리스트 (Titleist)를 품은 휠라홀딩스는 단일 국가가 아닌 전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라이선스를 ‘빌리는 단계’를 넘어, 헤리티지를 직접 관리·운영하는 단계로의 도약이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F&F는 MLB 본사와의 계약을 통해 아시아 판권을 확보한 뒤, 모자와 유니폼 중심의 스포츠 상품을 패션 의류 전반으로 확장하며 완전히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냈습니다. IP는 그대로 두되, 기획·MD·유통·데이터라는 ‘한국식 운영 시스템’을 입힌 사례입니다.


운영 완성도와 팬덤으로 만드는 자체 브랜드 전략

한편, 모든 전략이 인수만을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성통상의 톱텐(TOPTEN)은 유니클로(UNIQLO) 모델을 벤치마킹한 자체 SPA 브랜드로 국내에서 성공을 만든 뒤, 이를 기반으로 아시아 시장으로 확장하는 경로를 택했습니다. 이는 IP 인수가 아닌, 운영 완성도를 무기로 한 확장 모델입니다.


그리고 최근 가장 뜨거운 흐름은 이른바 ‘3M’이라 불리는 마틴킴 (Matin Kim), 마르디 메크르디 (Mardi Mercredi),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Marithé François Girbaud)가 보여주는 ‘감도와 팬덤’의 확장 모델입니다.


"마틴킴과 마르디 메크르디는 100년의 역사가 없는 대신, 실시간으로 쌓이는 ‘디지털 데이터와 커뮤니티의 결속력’을 새로운 형태의 헤리티지로 치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전통적인 명품의 문법을 파괴하고 디지털 원주민들의 팬덤을 동력 삼아 한국 고유의 미감만으로 글로벌 영토를 넓힙니다. 이는 시간이 아닌 '속도와 연결'로 헤리티지를 창조하는 한국적 혁신입니다."


반면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는 잠자던 프랑스의 오래된 브랜드를 한국적 감각으로 완전히 새롭게 코딩하여 역수출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해외 헤리티지를 단순히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기획력이 어떻게 죽어가는 브랜드를 살려내고(Re-branding), 무명의 브랜드(Native Brand: 아직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특정 문화와 세대의 감각을 가장 ‘자연스럽게’ 담고 있는 브랜드)를 세계적인 열풍으로 만드는지(K-Vibe)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이 모든 사례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하나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가 브랜드를 처음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누가 그 브랜드의 시간을 설계하고 확장할 수 있는가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패션 기업의 JD는 더 이상 단순한 ‘디자이너’만을 찾지 않습니다. 남의 유산이든, 새로 만든 IP든 그 위에 운영·유통·데이터라는 시스템을 얹어 전 세계로 확장할 수 있는 사람, 즉 비즈니스 아키텍트(Business Architect: 비즈니스 구조·전략 설계자) 이자 플랫폼 아키텍트(Platform Architect: 플랫폼/시스템 전체를 설계하는 역할)를 찾고 있습니다.


65년의 OEM 역사를 거쳐 K-패션이 도달한 결론은 분명합니다. 기술은 추월될 수 있지만, 헤리티지는 관리되고 설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시간을 직접 쌓는 사람을 넘어 시간의 방향을 설계하는 사람들의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4. JD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세 개의 포지션, 하나의 흐름


해외영업이라는 이름의 세 가지 다른 얼굴

이번 시리즈에서 다룬 세 개의 포지션은 겉으로 보면 모두 ‘해외영업’입니다. 그러나 JD의 행간을 읽어보면, 이 직무들이 요구하는 역할과 접근 방식은 분명히 다릅니다.

패션은 경험세계 산업입니다. 같은 티셔츠라도 소비자는 소재보다 상징(브랜드, 로고, 팬덤)을 삽니다. 그래서 글로벌 확장은 단순한 수출이 아니라, 그 상징이 각 나라에서 ‘현지의 매출 구조’로 번역되게 만드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이 세 개의 JD는 바로 그 번역을 서로 다른 지점에서 담당합니다.


F&F의 MLB 해외사업 커머셜 담당은
미국 라이선스 브랜드를 한국식 기획·MD·데이터 운영으로 재해석해, 이를 해외 파트너의 리테일 구조 안에 이식하고 설득하는 역할입니다. 홀세일 영업이지만, 실제로는 파트너사의 리테일 P&L을 함께 설계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신성통상의 TOPTEN 해외영업 담당은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베트남 같은 신흥 시장을 대상으로 시장 규모, 관세, 유통 구조를 분석해 ‘어떻게 들어갈 것인가’를 먼저 설계하는 역할입니다. 언어는 패션이지만, 사고방식은 철저히 SCM와 시장 진입 전략에 기반합니다.


레이어의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해외사업 부서장은
이미 성장한 브랜드를 어떻게 글로벌 표준으로 관리하고 확장할 것인가를 책임집니다. 수출, 라이선스, 현지 파트너, 디자인 승인까지 아우르는 해외사업의 총괄 설계자이자 브랜드 가디언입니다.


역할과 위치는 서로 다르지만, 이 세 포지션이 향하는 방향은 하나로 수렴합니다. 이들은 더 이상 ‘파는 사람’이 아니라, 글로벌 리테일 비즈니스를 함께 설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입니다.


5.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사유한다는 것

이 포지션들을 개별 브랜드의 채용으로 읽으면, 우리는 또다시 익숙한 방식으로 준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이 직무들은 공통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디에 팔 것인가”에서 “어떻게 작동하게 할 것인가”로

한국 패션이 처음으로 ‘전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놓고 비즈니스를 설계하려는 시도라는 점입니다. 그동안 한국 패션은 OEM과 수출, 중국·동남아·일본처럼 특정 국가 단위의 확장에는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며 하나의 구조로 전략을 짜본 경험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질문이 바뀝니다. ‘어느 나라에 팔 것인가’가 아니라, “이 브랜드의 비즈니스 구조를 전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게 만들 것인가”입니다.


이는 더 좋은 옷을 만드는 문제도 아니고, 더 영어를 잘하는 문제도 아니며, 더 많은 국가에 진출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핵심은 각 나라에서 벌어진 부분적인 성공을 연결해, 하나의 글로벌 구조로 사유할 수 있느냐입니다. 그래서 이 직무들이 요구하는 준비도 달라집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어느 국가를 담당했는지가 아니라, 그 시장이 어떤 유통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지, 누가 가격 결정권을 쥐고 있었는지, 브랜드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었는지를 읽어본 경험입니다. 매출, 셀스루, 재고회전 같은 숫자 역시 성과의 결과가 아니라, 이 비즈니스 모델이 이 시장에서 통하는지 알려주는 신호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략은 보고서로 끝나지 않습니다. 관세, 물류, 파트너, 계약, 운영까지 실제로 굴러가게 만들어본 전략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직무들은 컨설턴트보다 비즈니스를 직접 만져본 사람을 요구합니다. 영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영어는 소통의 기술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다른 파트너들과 합의를 만들고 책임을 나누는 의사결정의 언어입니다.


실행 가능한 전략가

그래서 한국 패션의 글로벌 직무는 더 이상 “얼마나 많이 팔았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묻습니다. “이 브랜드의 시간이, 전 세계에서 어떻게 흐르게 할 것인가.”

이 포지션들은 기존의 해외영업도, 전통적인 MD도, 단순한 기획 직무도 아닙니다. 전 세계를 상대로 이전에 없던 판을 설계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필요한 사람은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전체를 사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중진국은 선진국이 만든 전략을 수행하지만, 선도국은 스스로 전략을 세운다”
─ 『탁월한 사유의 시선』


그동안 한국 의류패션은 남이 만든 브랜드와 시스템 속에서 ‘성실한 수행자’였다면, 지금의 직무들은 전 세계라는 거대한 판 위에 스스로 장르를 만들고 규칙을 세우는 전략가의 시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JD들이 요구하는 준비는 기술의 축적이 아니라, 시선의 격상에 가깝습니다.

6. 스타일의 영토에는 국경이 없다

해외영업, K-패션의 필수 핵심 직무

1960년대부터 한국 패션 산업은 봉제 공장을 중심으로 제조 역량을 쌓으며 성장했습니다. 당시 경쟁력은 ‘얼마나 잘, 싸게, 빠르게 만들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러나 2025년, 경쟁의 기준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이제 패션의 무기는 더 이상 봉제 기술이 아니라, 데이터·IP·전 세계 라이프스타일을 설계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아직 샤넬이나 폴로처럼 단일 브랜드로 세계를 지배하는 단계는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헤리티지든 새로 만든 IP든, 그 위에 한국식 운영·유통·데이터 시스템을 얹어 전 세계에서 작동하게 만드는 역량만큼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해외영업 직무가 본격적으로 필요해졌습니다. 오늘날 해외영업은 단순히 브랜드를 해외에 소개하거나 파는 역할이 아닙니다. 브랜드의 시간과 구조를 이해하고, 각 나라의 유통·가격·채널 위에서 실제로 굴러가도록 설계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해외영업은 이제 ‘있으면 좋은’ 직무가 아니라, K-패션이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핵심 기능이 되었습니다. IP 인수든 자체 브랜드 빌딩이든, 모든 전략의 끝에는 같은 질문이 남습니다.


“이 브랜드는 해외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한, 한국 패션의 해외영업은 계속 고도화될 것입니다.


65년 전 우리는 타인의 브랜드를 위해 ‘바느질’을 팔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전 세계를 상대로 브랜드의 시간이 흐르는 방향을 설계하고 있습니다. 기술을 더 쌓는 것이 아니라, 시선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순간— 당신의 커리어도 국경을 넘기 시작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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