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일을 바꾸고, 사람은 방향을 지킨다

직무로 읽는 세상이야기 04화

by 박재영

AI는 일을 바꾸고, 사람은 방향을 지킨다

― 유한킴벌리의 두 개의 채용으로 읽는 AI 시대의 풍경


0. AI Specialist & Senior Product Manager 포지션 이야기

한 회사, 같은 시기, 전혀 다른 성격의 두 포지션이 열렸습니다.

하나는 AI Creative Specialist, 또 하나는 Senior Product Manager(스킨케어 마케팅).

이 두 직무를 나란히 놓고 보면, 단순한 채용 공고가 아니라 유한킴벌리가 AI 시대를 통과하는 방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AI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것과 끝까지 사람이 쥐고 있어야 할 것을 구분하겠다’는 메시지입니다.


1. ‘신뢰’를 팔아온 기업의 딜레마

― 유한킴벌리는 어떤 회사인가


유한킴벌리는 국내 생활·위생용품 산업에서 독보적인 Top-tier 포지션을 차지해 온 소비재 기업입니다. 화장지, 기저귀, 여성용품, 성인용품까지. 이 회사의 핵심 사업군은 모두 공통된 속성을 지닙니다. 반복 구매, 높은 신뢰 요구도, 안전성과 윤리성, 그리고 장기적인 브랜드 자산 관리. 이런 FMCG(Fast-Moving Consumer Goods : 일용소비재) 산업의 대기업은 필연적으로 아주 많은 제품군과 SKU(Stock Keeping Unit: 재고 관리 단위), 그리고 수 많은 채널을 동시에 관리해야 합니다.


TV, 오프라인 매장, 온라인 커머스, 글로벌 플랫폼, 소셜 미디어까지. 동일한 브랜드 전략을 유지하면서도, 각 채널에 맞게 세부를 조정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그동안 이 구조는 수많은 사람과 외주 파트너, 반복 작업과 중복 업무로 유지되어 왔습니다.


효율이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하나의 단일 기준으로 통합 관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던 구조였습니다.


2. 잘 돌아가던 시스템이 더는 지속되지 않을 때
― 대기업 마케팅의 구조적 한계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광고·홍보·마케팅 산업을 가장 먼저 흔들고 있습니다. 특히 FMCG처럼 제품 수가 많고 캠페인이 끊이지 않는 산업에서는, 기존의 대규모 인력 중심 구조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신호가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유한킴벌리의 마케팅 조직도 예외는 아닙니다. 많은 브랜드와 캠페인이 각자 잘 작동하고 있었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중복된 작업과 비효율이 구조적으로 누적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구조였습니다.

지금 이 회사가 마주한 상황은 일시적인 혼란이 아니라, 기존 방식을 유지한 채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전환의 압박에 가깝습니다.


3. AI 파도는 낮은 곳부터, 그러나 가장 확실하게 잠식한다

AI 기술이 모든 직무를 한꺼번에 집어삼키는 것은 아닙니다. 전문가들의 예측에 따르면, 자동화는 반복적이고 규칙 기반인 작업부터 가장 먼저 영향을 받습니다. 데이터 입력, 기본 분석, 단순 고객 응대, 영상 편집, 카피라이팅, 2D 그래픽 제작 같은 영역이 우선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동안 숙련된 노동으로 여겨졌던 이러한 작업들이 이제 프롬프트 한 줄로 대체되거나 크게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고·영상 대행업계는 이미 이 파도의 직격탄을 맞아 구조조정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유한킴벌리의 AI Creative Specialist 포지션은 바로 이 ‘노동이 증발한 자리’를 기업 내부 시스템으로 흡수하겠다는 선언입니다.


4. 그래서 기업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을 바꾸기 시작했다
― AI Creative Specialist의 등장


이 변화의 한가운데에 AI Creative Specialist 포지션이 있습니다. 이 역할의 본질은 ‘콘텐츠를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AI를 활용해 마케팅 생산 방식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고, 중복되고 시간이 많이 들던 작업을 단순화하며, 빠르게 만든 결과물이 다시 피드백되어 자동으로 개선되는 구조를 만드는 일입니다. 대량 콘텐츠 생산, 빠른 A/B 테스트, 실시간 성과 분석, 반복 가능한 템플릿과 워크플로우. 이는 크리에이티브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 혁신의 문제입니다.


유한킴벌리는 이 영역을 '지금 당장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하는 영역'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더 뽑는 대신, AI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자 합니다.


5. AI가 침범하지 않는 영역을 남겨두는 선택
― Senior Product Manager라는 직무


반면 Senior Product Manager(스킨케어 마케팅)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킵니다.

스킨케어는 유한킴벌리가 전통적으로 강점을 가져온 위생용품과는 결이 다릅니다. 트렌드는 빠르게 변하고, 국가별 규제와 소비자 인식은 복잡하며, 브랜드 포지셔닝의 미세한 차이가 사업 성패를 가릅니다.


이 포지션에서 중요한 것은 ‘효율’이 아닙니다. 스킨케어 사업은 실패 비용이 크고, 브랜드 전체의 신뢰 자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역만큼은 AI가 아니라, 경험 많은 사람의 판단과 책임에 맡기겠다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6. JD 깊이 읽기: 기술의 효율 vs 전략의 깊이

이 기업이 동시에 내건 두 장의 JD를 살펴보면, 회사가 기대하는 인재의 상이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AI Creative Specialist: 마케팅 공장의 ‘라인 설계자’

이 포지션은 '전략기획부문' 내 신설된 조직으로, 마케팅의 생산 체계 자체를 혁신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핵심 직무: GPT, Midjourney 등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 및 대량 생산 워크플로우 설계.

필수/우대 요건의 함의:

A/B 테스트 및 데이터 기반 개선: '감'이 아니라 '숫자'로 증명되는 크리에이티브를 요구합니다.

대량 생산 템플릿 설계: 단순 제작자가 아니라, AI가 스스로 일하게 만드는 시스템 아키텍트를 찾습니다.

Figma, Adobe 툴 숙련도: AI라는 엔진을 다루기 위한 최소한의 정교한 핸들링 능력을 필수 조건으로 봅니다.


Senior Product Manager: 브랜드의 ‘최종 책임자’

글로벌 스킨케어 시장이라는 전장에서 브랜드의 방향을 설계하고, 실행의 결과에 책임지는 역할입니다.

핵심 직무는 글로벌 IMC 전략 수립과 아마존·쇼피 등 글로벌 플랫폼 진출 전략 설계입니다. 단순한 캠페인 실행이 아니라, 어느 시장에 어떤 방식으로 들어갈 것인지 결정하는 포지션입니다.


첫째, 글로벌 스킨케어 브랜드를 실제로 키워본 경험.

둘째, 여러 에이전시와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실행을 이끌어본 매니지먼트 능력.

셋째, 언어를 넘어 시장의 맥락을 직접 읽을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역량.


이 직무는 자동화의 대상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최종 책임을 지는 자리입니다.


7. 이것이 바로 ‘AI 시대의 풍경’

AI 시대가 모든 직무를 AI로 대체하는 방향으로만 흘러갈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흐름은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자동화 가능한 영역과 인간의 판단이 필수적인 영역 사이의 구분이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제조 기업 안에서도 AI 도입 속도는 부서마다 크게 다릅니다.


생산과 물류 부문은 이미 수요 예측과 재고 최적화를 통해 효율의 ‘신대륙’에 도달해 있습니다. 반면 영업 부문은 대리점주나 유통 담당자와의 대면 관계, 신뢰 구축이라는 ‘구대륙’의 문법을 여전히 따르고 있습니다. 마케팅은 바로 이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영역입니다.


이 흐름을 설명하는 개념이 바로 ‘Human in the Loop(AI가 일을 하되, 결정은 사람이 하는 구조).’입니다.

AI가 대부분의 연산과 실행을 담당하되, 최종 판단과 책임의 고리는 인간이 쥐고 있는 구조를 의미합니다. AI는 빠르고 많은 선택지를 만들어내지만, 그중 무엇이 우리 브랜드에 맞는지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주체는 결국 사람입니다.


유한킴벌리는 AI Creative Specialist를 통해 흩어진 제작 리소스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하고(효율), Senior Product Manager를 통해 브랜드의 본질적인 매력과 장기 방향을 수호하려 합니다(감성). 이 기업은 지금, AI를 어디까지 쓸 것인가 보다 어디까지 쓰지 않을 것인가를 더 분명히 정의하고 있습니다.


8. AI 시대에 커리어를 설계한다는 것

이 두 포지션을 함께 읽을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AI 시대의 본질을 상당히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AI를 배워야 할까? 물론입니다. 하지만 AI가 전부일까? 절대 아닙니다. 결국 남는 것은 ‘경험을 구조로 바꿀 수 있는 사람’과 ‘방향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AI는 강력한 도구가 되지만, 그 도구를 언제, 어디에, 왜 쓸지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 유한킴벌리는 지금 이 두 역할을 동시에 채용하고 있습니다. AI Creative Specialist로 흩어진 제작 과정을 하나의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정리하고, Senior Product Manager로 브랜드의 장기적인 방향과 정체성을 수호하려는 것입니다. 이 균형 감각이 바로 이 회사가 보여주는 AI 시대의 성숙한 태도입니다.


결국 AI 시대의 진짜 실력은 ‘무엇을 AI에게 넘기고, 무엇을 끝까지 사람이 쥐고 있을지’를 결정하는 판단력에 달려 있습니다. AI는 수만 가지 답을 순식간에 내놓지만, 그중 브랜드의 본질에 맞는 단 하나의 답을 선택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은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제 AI라는 거대한 엔진을 다루면서도,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과 책임감을 동시에 발휘해야 하는 ‘이중 설계자’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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