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고 계속 연습해봐. 노력하면 언젠가는 된다.
아들이지만 늘 딸처럼 엄마에게 살갑게 굴었던 나는 사실 지금도 보통의 딸들이 하는 애교와 깜짝 이벤트로 엄마를 즐겁게 하는 취미(?)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엄마가 다니는 직장에 참이 땡기는 오후 시간 피자나 햄버거를 한 턱 쏜다던지 엄마랑 단 둘이 영화관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을 찾아다니며 데이트를 한다던지 하는 등의 소박한 일상이다.
돌이켜보니 엄마는 늘 나를 오랜 친구나 딸처럼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였을까?
엄마는 어릴 적부터 내가 마치 오랜 친구인 양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해준 적이 많은데 하도 듣다 보니 이제는 내가 더 기억을 또렷이 하는 요즘이 되었다.
그래서 이번엔 엄마에게 들었던 엄마의 어린 시절과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보려 한다.
엄마는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칠 남매 중 일곱째 막내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어릴 적 엄마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 전교에서 키도 제일 크고 보폭도 넓은 데다 몸도 날렵해서 육상선수를 하셨다는데 그 시절을 기억하면 늘 엄마의 얼굴엔 은은한 미소가 지어지고,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참고로 엄마는 “그때 키가 더 안 커서.. 운동을 그만뒀지.. 아.. 조금만 더 컸으면..” 하는 아쉬움을 내뱉곤 하신다.
엄마 키는 그때 키에서 성장이 멈추었고, 지금은 150센티미터를 조금 넘는다.
그래서 60년째 달고 사는 말 중 하나가 바로
“내 키가 키가!”이다.
육상선수의 꿈을 꾸었을 당시에 엄마가 기억하는 건, 자기는 그냥 남들보다 빨리 뛰는 게 제일 기분 좋았고, 운동회날 달리기 시합으로 1등을 하면 각종 학용품을 손에 거머쥐는 일상이 그렇게 행복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그냥 동네에서 잘 뛰는 정도를 넘어서게 되었고, 아마추어 육상선수로 활동을 하면서 중학교에 올라갈 땐 도 대표 선수로 소년소녀 체전에도 출전했던 기록도 있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는 막내라서 어른들께 사랑도 많이 받으며 컸고, 나이 터울이 많은 언니와 오빠 아래에서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랐다고 하신다.
그 덕분인지 엄마의 웃음엔 늘 티가 없이 해맑다.
남녀차별이 심했던 그 시절 어린 여자아이가 어떻게 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은데 엄마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으리라.. 나는 짐작이 간다.
그런데 참 세상이란 게 재밌는 게 그 당시 잠시라도 운동을 했던 사람들에게 보통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한마디 씩 하는데..
“악바리 근성이기 때문에 운동을 잘한다.”
“성격이 독하니까 저렇게 행동한다.”
“고집스럽고 우악스러운(거칠고 미련할) 성격이라 저렇게 이를 악물고 뛰는 거다.”
등등 뭐 이런 말들이 운동하는 이를 향한 바람이자 고정관념이고, 그렇게 해야 마치 성공을 할 수 있다는 투로 독한 마음과 행동이 성공을 위한 필수조건인 양 떠드는 시절이 있었다.
실제 그런 사람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엄마를 그렇게 독한 사람으로 오해를 많이 했고, 또 그런 시절에 살았던 엄마였기에 엄마는 그런 독한 이미지 뒤에 여린 마음을 숨기며 살아왔다고 한다.
내가 아는 엄마는 확실히 강인한 면모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뭐랄까.. 떨림 가득한 소녀감성도 있다.
엄마도 그냥 수줍어하고 부끄럼 많은 여자일 뿐이다.
나는 어릴 적 어디서든 혼자 있는 것을 꽤나 무서워했는데 시간이 흘러 내가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아이들은 어쩜 나와 저리도 닮았는지 외모부터 성격까지 정말 많이 닮았다.
이래서 다들 피는 못 속이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특히, 나의 아이들은 뭔가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공포심과 불안함에 몸을 움츠려 들고 하지 않으려 하는 탓에 아이들을 타이르려고 할 때면 나 역시도 옛 생각이 나곤 한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어려워했던 것이 줄넘기와 자전거를 타는 일이었는데 나의 아이들도 똑같이 어려워하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앞서 말했지만 운동신경이 좋은 엄마는 늘 FM대로 줄넘기를 제대로 가르쳐 주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나는 늘 그게 힘들고 어려웠다.
하루 온종일 할머니와 밭에서 깻잎 따고 고추 따고 잡초 뽑고 지칠 만도 한데 땅거미가 내리는 저녁시간 내내 줄넘기를 가르치다 힘이 빠진 엄마는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했는데 그건 바로 줄넘기를 연속으로 스무 번 하면 맛있는 햄 소시지 반찬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늘 어른들 취향이 우선이었던 그 시절, 된장찌개에 상추쌈이나 싸 먹는 식탁에 햄 소시지는 그야말로 센세이션 한 제안이었고, 엄마는 이런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준아! 이제는 혼자 연습해봐!
포기하지 말고 계속 연습해보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된다.
한 번 해봐!”
그렇게 몇 날 며칠 뛰다 보니 감이 생겼고,
약속한 스무 번의 줄넘기도 어느새 성공을 했다.
그 일 이후로 나는 결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야 하는 것이라는 세상사는 진리를 아주 작은 행위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노하우를 나의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알려주어 30년 전의 나 보다는 훨씬 어린 나이에 아이들은 줄넘기와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30년이 지나 아이들에게 줄넘기와 자전거를 직접 가르쳐주면서 느낀 건 참.. 부모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두 발 자전거가 혹여 쓰러져 다칠까 노심초사하는 마음과 아이는 잘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돼서 안타까워하는 마음, 조금만 더 용기를 내면 해낼 텐데 그 조금이 부족해 답답한 마음까지 이런 무수한 감정과 애간장 끓는 시간들을 우리 엄마도 똑같이 느꼈으리라.
부모가 된다는 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고 나 역시도 부모가 되는 건 처음인지라 늘 시행착오를 하며 살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엄마와 전화통화를 하며,
나는 이따금 질문을 던져본다.
“엄마는 어째 그래 우리를 키웠대?”
그런 질문에 엄마는 늘 같은 대답을 하신다.
“그때는 다 그래 살았지 뭐..”
“그리고 너희가 알아서 컸지. 나는 진짜 해준 게 없다!”
속으로는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엄마는 진짜 엄마의 시간과 노력, 피땀 흘려 번 돈을 다 갈아서 우리에게 줬어! 엄마의 사랑이 있어서 내가엇나가지 않았어요!”
엄마! 감사해요!
나는 엄마를 만나기 한참 전, 아주 어릴 적 생모가 자주 외딴곳에 가서 홀로 두고 버렸던 경험이 많아 주변 가족들의 근심과 걱정을 많이 끼치면서 컸다고 한다.
정확하진 않지만, 들리는 이야기로는 나의 생모는 결혼 전에 만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벌써 결혼을 해 아이도 있고 해서 그 집안에서는 그 남자와의 만남을 반대했고, 그 후 선을 보다가 아버지를 만나 결혼해 살다가 결국 그 남자를 잊지 못하고 여러 번 헤어지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우연히 아이가 생겼고, 아이 때문이라도 이혼은 제발 하지 말자는 말에도 기어코 낙태 시술을 받고 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을까? 진심 궁금하다.
그 후 할아버지의 중재로 이혼은 잠시 미뤄졌고, 그 사람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피아노 학원을 차렸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사는 동안에도 그 남자를 잊지 못하다 그 남자가 이혼을 했다는 소식에 한 줄기 희망을 봤을 것이다.
나는 졸지에 생모의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 것이다.
네 살 다섯 살의 기억은 없다.
하지만 여섯 살 일곱 살의 기억은 또렷하다.
어디에서 나를 버렸고,
어디에서 내가 그 험한 길을 헤매었는지 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린 나이에 집 전화번호와 주소를 외우며 살기 위해 발악했다.
파출소에서 왕단팥빵을 얻어먹으며, 갓 시집 온 숙모의 손을 잡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간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 나는 그렇게 세상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았다.
지금은 정말 희한하게도 미워하는 감정이나 화가 나는 감정이 없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아마도 그건 내 인생에서 그저 중요하지 않은 하나의 이벤트였을 뿐이고, 그 덕분에 진짜 엄마를 만났기 때문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짜 엄마는 붙잡지 말고,
그냥 그렇게 물 흐르듯 흘려보내주어야 한다.
To. 엄마
엄마가 해주는 엄마의 옛날이야기는 늘 재밌어요. 소꼴 베러 갔다가 산에서 소꼬리를 잃어버려 할아버지께 혼났다던 얘기도 너무 재밌었어요.
엄마! 다음에 또 재밌는 얘기 해줄거죠?
다음 생에는 내가 엄마의 엄마 해드릴게요. 그리고 그땐 내가 엄마한테 재미난 이야기 더 많이 들려드릴게요.
From.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