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부모 된 마음으로 너를 바라본다. 누가 뭐래도 너는 내 동생이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 내 동생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더 어렵다.
왜 인지는 몰라도 며칠을 고민해도 글은 써지지 않았고 부담감은 나날이 커졌다.
생각건대 지금 내가 동생을 생각하는 복잡한 마음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어린 시절 나에게 동생과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를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에 느꼈던 사소한 감정까지 기록하는 정도로 말이다.
엄마가 내가 만난 지 1년쯤 되었을까?
만삭이었던 엄마가 친정에 갔다가 한 달 만에 돌아오신 어느 날, 나는 천사처럼 맑고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아기를 처음 만났다.
아기는 늘 노오란 이불에 둘러싸여 엄마와 함께였고,
그 노오란 아기 이불은 푹신했고, 뽀송뽀송했다.
나는 늘 그 푹신한 이불이 탐이 났고,
종종 이불에 뺨을 갖다 대며 아기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기는 어떤 날엔 버둥거리며 나를 보며 웃어주었고,
또 어떤 날엔 동네가 떠나가라고 울어댔다.
아기는 우는데 일가견이 있다. 당연한 일이다. 아기는 의사소통을 우는 것으로 하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 되었고, 겨우 이해를 하지만 어린 시절 나에게 이 아기의 울음은 도저히 참지 못하는 스트레스이자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내 자식이 밤낮으로 울어댈 때에도 그때처럼
미칠 것 같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꼈다.
이런 게 트라우마가 아닐까 핑계를 대 보지만, 결국
부모 되는 일이 이렇게 힘들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나는 어렸었고 두려웠고 혼란스러웠다.
동생이 태어나면서 세상의 엄마들이 다 그렇듯이
엄마는 항상 지쳐있었고, 바빴다.
하지만 엄마는 어린 동생을 안고 가슴을 열고 젖을 주면서도 내 눈치를 보셨다.
혹시라도 스스로 동생을 편애한다는 생각을 가질까 봐
어떨 땐 안고 있는 모습도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셨다.
그래도 나는 엄마의 모든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엄마가 다른 일을 해야 할 땐 자리를 지키고
아이를 지켰다.
그래서 였을까?
나는 지금도 내 동생이 아기 같고,
돌봐주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늘 걱정되고, 늘 염려되는 마음은
이때 어깨너머로 배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아버지는 동생을 참 아끼셨다.
어딜 가든 아버지는 동생을 꼭 데리고 다니셨고,
학교를 갔다 오면 아버지와 함께 늘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쥐고 있는 동생을 보면 나는 괜스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런 게 샘이 많이 났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버지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졸라댄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생모와의 일이 있은 후 매일같이 담배와 술을 마시며 자살까지도 생각하며 괴로워했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고 나는 본능적으로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에게 짐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고, 애 앞에선 말을 조심해야 한다.)
적어도 내 기억엔 그렇다.
그저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자기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융통성도 없는 아이..
그게 어린 시절의 나였고,
주눅이 들어 늘 움츠린 나였다.
하지만 동생은 달랐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장소를 불문하고 떼를 쓰며 사람이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까지 울어댔다.
올림픽공원에서 7시간을 울어댄 일화는 아직도 고개를 절레 절레하게 만든다.
동생은 그런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냥 참아내는 아이였다.
원하는 것을 말도 제대로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는..
그런 아이에게 안타깝게도 움츠린 어깨를 펼 때까지
지그시 참고 나를 기다려준 이는 없었다.
내가 들은 가장 비수가 꽂혔던 말은 내가 잠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부모님이 나누신 대화였다.
“준이는 자기주장이 없어 융통성도 없고 자기가 원하면 떼를 써야 하는데 쟤는 그런 게 없어..”
어린아이가 과연 욕심이 없었을까?
나는 떼를 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를 버리지 않고 키워주는 부모를 감사히 여기며 뭔가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생각했고, 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이미 어른이었다.
나는 늘 외로웠고 홀로 일어서야 할 운명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늘 어른들이 주는 용돈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다가 내 손으로 몇 달을 모아 원하는 것을 가지곤 했었다.
문방구를 서성이며 몇 날 며칠을 눈독 들이다 마침내 갖고 싶던 장난감을 손에 쥐었던 그날의 만족감과 기쁨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날 저녁 나는 크게 혼이 났다.
없이 사는 처지에 돈 가치도 모르는 놈이 어른도 쉽사리 사기 힘든 장난감을 마음대로 턱턱 샀다고 그렇게 혼이 났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분명 내가 쓰지 않고 모은 돈이었는데.. 나는 많이 억울했다. 지나간 이야기이긴 하지만 다시 한번 따지고 싶을 정도로.. 나는 아직도 그때 혼난 이유를 모르겠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저금을 잘했고,
경제관념이 철저했고 남들보다 돈에 밝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린 시절 나의 불만 중 하나는 늘 과자 사 먹을 돈은 내가 아닌 동생에게 쥐어주시고는 동생에게 나와 같이 사 먹으라고 하셨다.
왜 그러셨는지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나는 동생을 잘 구슬려야 했고 소위 형으로서 가오를 구기며 살살 달래며 먹고 싶은 걸 사서 먹는 날이 많았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나는 어떤 날은 마음대로 되지 않아 동생을 때리기도 했다.
나는 참 못되고, 못나게 굴었다.
그리고 둘이서 참 많이도 토닥거리며 싸웠다.
덩치 차이도 차이지만 여덟 살이나 차이나는 어린 동생과 싸우다니..
우리는 그저 여느 집 형제들처럼 싸우며 컸고, 다른 집의 형제들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싸우다 보면 늘 혼나는 건 내 몫이었고, 아버지는 동생을 앞에 두고 나를 많이 혼내셨다.
나는 동생 앞에서 혼이 나는 게 너무 약이 오르고 수치스러웠다. 내 입장 따윈 들어줄 생각이 없는 아버지는 말보단 손이 먼저였다.
나는 늘 서글프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이를 악물고, 서러움을 참아내야만 했다.
내가 왜 화를 냈는지 따윈 관심이 없었고,
들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같은 잘못을 해도 형이라는 이유로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더 많이 혼났고,
내 편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뭘 그렇게 대단히 큰 잘못을 한 적도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아버지에게 참 많이 맞았다.
그 당시엔 부모가 훈육을 할 때, 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손찌검은 하면 안 된다는 걸 배웠고,
아이는 꽃으로 라도 때리면 안 된다는 걸
가슴에 새겼다.
나는 어릴 적 소리를 내며 울어본 적이 없다.
늘 이를 꽉 깨물고 울음을 삼키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도 울 땐 소리가 나질 않는다.
동생이 태어나면서부터 묘한 감정이 들었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헤매는 날이 많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나는 나를 괴롭혔다.
아기에게 어른이 관심을 많이 갖는 건 당연하니까..
나는 철이 일찍 든 착한 아이니까..
스스로를 마치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빨리 어른스러워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를 낳아준 부모에게서
자연스럽게 사랑받기를 포기하는 법을 배웠다.
돌이켜보니 참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어린 시절 나에게는 지금의 넓은(?) 아량과
생각을 할 줄 아는 여유가 없었다.
나는 그저 부모의 사랑이 고픈 어린아이 일 뿐이었다.
점점 동생이 자랄수록 나 역시도 폭풍 성장했다.
키도 몸무게도..
그 말은 내가 형이니까 동생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런 생각은 나를 한 뼘 더 성장시켰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나는 늦은 시간까지 동생을 케어하는 일을 맡았고, 그 일은 내 일과 중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학교를 갔다 오면, 동생이 있는 어린이집에 가서 동생을 데려오고 집에서 밥을 챙겨 먹었다.
어쩌다 내 친구들 집에 놀러 갈 때에도 늘 동생을 데리고 다녔고, 어딜 가든 동생은 나와 함께 있었다.
내 친구들은 귀찮을 법도 하지만 그래도 다들 동생을 귀여워해 줬고, 친구네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배를 채우는 일이 많았다.
지금이야 키즈카페도 있고 돈만 있으면 어디든 가서 즐길거리, 놀거리가 많지만 그땐 돈도 없고 뭣도 없던 시절이라 동네 놀이터에서 흙 퍼먹으며 놀았다.
하지만 늘 문제는 놀이터에서 시작됐다.
동생은 내가 보기에는 위험한 일 위험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조금 더 크면서는 내 시야에서 없어져 늘 찾아다녀야 하는 수고스러움이 있었다.
그래서 늘 가슴이 조마조마했고 나는 내가 놀기보다는 동생을 뒤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하는 게 다반사였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동생을 돌보는 부모였다.
여느 날처럼 엄마가 준 돈으로 동생은 혼자 쭈쭈바를 사 먹었고 나는 짜증이 나서 그런 동생을 반쯤 무시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쭈쭈바를 쥐고 입에 물었고, 한 손에는 잔돈을 손에 꼭 움켜쥐고 있었는데 갑자기 켁켁 거리는 것이 아닌가!
동전을 갖고 놀다 동전을 입에 넣었다 빼는 장난을 했고 그러다 그걸 삼킨 것이었다.
동생은 호흡이 가빠오고 죽는소리를 내었다.
집에는 어른도 없었고, 우리는 둘 다 당황했다.
불현듯 나는 뭔가 동생의 목에 걸린 동전을 빼내야겠다고 생각했고 동생의 몸을 부여잡고 흔들어 댔다.
동생의 허리를 움켜쥐고 몸을 폴더처럼 굽힌 다음 강하게 흔드니 웩하는 소리와 함께 토를 하면서 동전이 목구멍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그날 하인리히법으로 동생을 구했고,
그날 이후로 동생은 나에게 돈을 맡겼다.
지금은 나의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거울처럼 지켜보는 느낌을 받는다.
큰 아이는 내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작은 아이는 영락없는 천방지축 막내다.
큰 아이는 혼자서도 잘하고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고,
작은 아이는 하고 싶은 건 해야 직성이 풀린다.
큰 아이를 보며 나는 어린 시절의 나와 만난다.
그래서 늘 큰 아이는 꼭 안아주려 한다.
어린 시절 나에게 필요했던 건
이렇게 부모의 사소하지만 따뜻한 부분이었을 테니
아이의 말을 늘 끝까지 들어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늘 불만이 가득하지만 말이다.
나는 과연 내 아이들에게 어떤 부모일까?
To. 엄마
자식을 키워보니 참 쉽지 않네요. 사실 힘들어요. ^^
우리를 어찌 그리 잘 키워내셨나요?
엄마! 우리 때문에 너무 고생하셨어요.
엄마의 희생으로 우리 형제가 올바르게 컸어요.
감사해요! 엄마.
From.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