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월급날과 통닭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통닭을 시키는 엄마의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by Hyean de TJ

지금 만약 회사원이 연봉을 1억 원 받는다면, 꽤 잘 나가는 회사원이라 인정받는다.


물론 서울의 평균 집값이 10억 원을 상회하는 요즘, 아무리 연봉 1억이라도 그냥 좀 괜찮은 정도로 인식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릴 적 우리 또래 아이들은 월급이 100만 원이라고 하면, 엄청 큰돈으로 인식했었다.


그 시절 보드게임인 부루마블의 서울 땅을 사려고 해도 100만 원이었고, 5,000만 원을 주는 주택복권에 당첨되면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새우깡 한 봉지 가격은 작은 봉지는 50원, 큰 봉지는 100원이었고, 빈병을 가져다 팔면 소주병은 30원, 음료수병은 20원, 어쩌다 큰 소주병을 주워서 동네슈퍼에 갖다 주면 50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돈을 모으면 원하는 과자 한 봉지를 살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귀하고, 충분하지 않아서 더 소중했던 시절이었다.




어릴 적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시집을 가지 않은 고모 둘과 함께 살았다.


아침은 각자 사정에 맞게 일어나 밥을 먹었고, 저녁이 되면 아홉 명이라는 대가족이 늘 둘러 모여 식사를 했는데 엄마와 숙모는 매일 그 많은 음식을 만들어내는 정성을 쏟아내셨다.


아홉 명이 매일같이 쏟아내는 설거지 양은 지금 다시 돌아가더라도 혀를 차게 만들 정도의 양이었을 것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식탁에 어린아이를 배려한 반찬이 있을 수 없었고, 국이나 찌개 종류는 아이 입에 맞는 간조 절이 될 리 없었고, 어른 위주의 맵고 짠 음식이 주를 이루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나에게 식사시간은 늘 어른들에게 혼나는 시간이었다.


어린아이가 먹을만한 반찬과 국은 제대로 없었고 늘 짠 된장찌개와 소위 풀때기 반찬이 위주였는데 고기류가 있었다면 대식구의 먹성을 감당하기에는 감당하기 벅찬 식비였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보다 싸게 구할 수 있었던 단백질 공급원은 시장에서 떨이로 파는 생선들이었는데 시장이 파한 후 할머니 손에 들려져 온 비린내 나는 생선은 늘 뒤늦게 조리되었다.


나는 생선류는 손도 대지 않았다.


어른들의 시각으론 편식이 심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럴만한 사정도 있었다.


어른들은 구이든 찌개든 작은 생선들은 잔 가시가 많아도 그냥 꼭꼭 씹으면 된다는 말을 하며 하나 둘 입을 댔지만, 어린 조카나 손자를 위해 어느 하나 제대로 가시를 발라주는 이는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가 가시를 발라주셨지만 뭘 하시든 열심히는 하지만 대충대충 하는 성격에 늘 가시가 있는 생선 살을 주셨다.


그런 일이 잦았던 나는 생선이 싫었고, 어쩌다 입에 넣은 밥 한 숟갈에는 언제나 잔가시가 있었고, 잔가시에 찔려가며 고통스럽게 입안의 밥을 뱉어냈을 땐 밥투정을 한다는 식구들의 비난을 받으며 서러워 눈물을 흘리며 자랐다. 아버지는 늘 가족들을 대변하듯 내게 혼을 많이 내셨다.


작은 약속 하나도 소중히 지키지 않고, 늘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시는 타입이셨고, 지금도 딱히 변하신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신뢰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트라우마처럼 기억 속에 남은 경험은 어른이 된 지금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가족인 데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남자와 여자가 따로 밥을 먹던 분위기는 어쩌면 다시 보기 힘들 풍경이겠지만, 그땐 그렇게 살았었다.


어른이 된 이후에도 나는 그냥 모든 음식은 그렇게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틀렸다는 것을 결혼한 이후로 처갓집에서 새로이 배웠다.


처갓집은 그 옛날에도 아이를 중심으로 한 분위기였고, 내가 겪은 경험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요즘 아이들에게 꼰대가 된다. 아빠 어릴 땐 말이야... 하면서 말이다.


엄마와 함께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면, 지금의 우리와 자연히 비교를 하게 되는데 지금의 엄마는 그 옛날처럼 늘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음식을 내어주신다.


내가 작은 시샘이 나서 한마디를 하면, 엄마는 "그땐 다 그렇게 살았지 뭐... 어쩌겠니..."라는 조커와 같은 멘트로 상황을 넘어가려 하신다.


엄마는 늘 나에게 잘 못해줬다고 하시지만 돌이켜보면 늘 "사랑"이었다.


소위 반찬 투정을 많이 했던 나는 어른들에겐 골칫거리였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는 계란 프라이를 따로 해주셨고 나는 그 따뜻한 사랑으로 바르게 자라났다.




라떼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나의 할아버지는 워낙 몸이 약해 험한 일은 하지 않으셨고, 평생 한학을 공부하며, 지방 향교를 드나들던 진짜 조선시대 선비셨던지라 험한 세상에서 몸을 쓰며 돈벌이를 하는 것은 애당초 어울리지 않으셨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할머니는 억척스럽게 밭일을 하셨고, 시장에 채소를 내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육 남매 중 장남이었던 아버지는 아주 어릴 적부터 허드렛일과 막일을 해서 돈을 버셨다고 한다.


그러다 내가 학교에 갈 때 즈음에는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무거운 주물로 베어링과 같은 부속품을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현장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야근에 특근까지 하면, 수입이 꽤나 괜찮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할아버지 집에서 분가를 하기로 결정하셨고,

아버지 직장 근처의 전세방을 구하셨는데 그 방에 가려면 대문이 아닌 작은 쪽문을 따라 집 안쪽까지 이어진 작은 통로를 한참을 들어가야 갈 수 있었다.


그 방은 복층처럼 창고방이 따로 있었고, 그 창고방은 11살에 가진 나의 첫 공간이 되었다.


이때 아버지는 단칸방 하나를 구할 수 있는 천만 원을 할아버지께 받으셨다고 한다.


허드렛일을 했던 11살부터 서른 중반이 되어서도 따로 돈을 모으지도 않았던 순진한 아버지는 그렇게 대가족을 위해 부양한 대가로 고작 천만 원을 손에 쥐고 나오셨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그 단칸방으로 간 날이 참 행복했던 날로 기억한다.


처음으로 우리 가족만 따로 살게 된 날이었고, 신혼이었던 부모님의 뭔가 꽁냥꽁냥 한 분위기에 가슴이 간질간질했던 것 같다. 엄마의 웃음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엄마와 더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어 좋았고, 이 즈음 서너 살이 된 동생과 함께하는 일상이 행복했다.




새로 구한 단칸방에서 우리 가족이 첫날밤을 자려했을 때 웃음이 떠나가지 않았던 게 생각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요즘 말로 시월드의 극강의 불닭 매운맛에 완전히 질려 있었고, 내 눈에 비친 시댁 식구들의 행동과 말들은 어린 내가 생각해도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니 엄마가 받았을 스트레스는 얼마나 크셨을지 지금에서야 이해가 된다.


그렇게 참 행복한 그 해를 보냈었는데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그 해 연말 즈음에 비보가 들렸다.

그것은 일터에 계신 아버지가 다치셨다는 소식이었다.


작업 선반에 있던 무거운 주물 덩어리가 하필 아버지의 발에 떨어져 버렸고, 그 일로 인해 아버지는 몇 달간 병원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고, 얼마 안 되는 합의금을 받으며 그 공장을 나오셨다.


먹고 살 일이 막막해진 우리 집은 비상이 걸렸고, 엄마는 동네에 있는 작은 공장에서 주는 일거리를 가져와 부업을 하셨다.


인형 눈깔 붙이는 일처럼 단순 반복하는 부업이었기에 어린 나도 제법 손을 보태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한 개 10원의 품을 쳐주는 일을 하며, 부업을 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싶다.


얼마 되지 않아 지방공무원이었던 작은 아버지의 권유로 아버지는 구청에서 뽑는 청원 경찰직에 지원을 하셨고, 운이 좋게도 합격이 되어 우리 집은 다시 이삿짐을 꾸려야 했다.




옮긴 직장은 남들이 보기에는 직업이 공무원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사실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은 기존에 받던 월급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내 기억엔 아마 60만 원 정도 벌다가 직장을 옮긴 후 30만 원 정도였던 것 같다.


나는 경제적인 위기가 가장 큰 위기라는 것을 몸소 느꼈고, 엄마는 천 원짜리 한 장을 손에 들고 시장을 수십 번 돌아다니며, 떨이로 파는 채소라도 사려고 갖은 애를 쓰셨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하면 엄마의 한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니 자고로 돈을 많이 벌어야 집안이 평안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시장으로 일하러 나가셨다.

처녀시절 잠시 배웠던 커튼 만드는 미싱 기술은 내가 공부하는데 밑천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 집은 맞벌이 가구가 되었다.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엄마는 "내가 너 하나는 똑바로 키울 거다!"라고 하시며 한 달에 6만 원이나 하는 비싼 학원을 다니게 하셨고, 나는 늘 엄마에게 학원비 낼 봉투의 돈을 걱정했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우리는 못 배우며 컸다. 너는 많이 배워서 엄마, 아빠처럼 힘들고 어렵게 살지 말고, 단디 공부해서 꼭 성공하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늘 엄마의 그 말을 마음에 담았고, 그 감사한 마음으로 학업을 잘 마쳤다.




나는 엄마가 첫 월급을 타 오셨던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엄마는 한 번 일하면, 무서우리만큼 열심히 하는 성격이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장에서 하루 종일 고군분투했을 것이다.


매일 저녁 숨을 몰아쉬며, 베개에 머리만 데이면 코를 골며 잠을 자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늘 엄마에게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댔다.


엄마의 귀에 이런 말들이 들릴 여유가 있었을까?


고된 하루 끝에 저녁밥을 지어먹고 대화 없이 잠만 자던 날들이 늘어갈 때쯤 어느 날 엄마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에게 말을 하셨다.


"준아! 엄마 오늘 월급 탔다!

우리 오랜만에 통닭 한 마리 시켜 먹을까?"


"오~예!!! 엄마 우리 진짜 통닭 먹는 거야?"


고무줄에 튕겨져 박스에 담겨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통닭은 나에겐 희망의 증거였다.


그저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내가 조금 더 잘하면, 우리 집도 잘 될 수 있겠다.


뭐 그런 희망의 씨앗이 마음에 심어진 것이다.


고작 6~7천 원 정도였던 통닭이 뭐라고!

우리 집에서 통닭은 사치였고, 희망이었다.


지금이야 치킨이라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통닭이었다.


멕시칸, 페리카나, 처갓집

이 3대 탑 브랜드 통닭을 시켜먹은 날에는 그 양념까지도 밥에 비벼 먹을 정도로 인기였다.


그야말로 없어서 못 먹었다.

70년대도 아닌데 90년대 우리 집은 그랬다.


나는 매달 엄마의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 희망이 작은 나를 크게 성장시켰다.




To. 엄마


오늘 우리 치킨 한 마리 먹을까요?

엄마가 좋아하는 닭다리로만 시켜서 먹어요.


From.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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