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에는 칼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심야버스를 기다렸다.
지방에 살다 보니 교통이 불편하면 이동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는데 흔한 대중교통수단인 지하철도 없는 지방은 그 상황이 더 열악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아니 지방에서는 필수인 것이 바로 자가용이다.
차를 구입하고서 아주 오랫동안 함께한 내 차는 늘 든든한 이동수단이 되고 있다.
그 이후 나이가 들면서 버스를 타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정도인데 가끔 서울에 가면 기차를 타고 가는 탓에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이라도 탈 때엔 그 어색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건 아마도 지방 사람만의 고충이리라!
우리 집은 한학을 공부하신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제사나 벌초 등 조상을 섬기고 보살피는 일에는 끔찍하게 생각하는 집안이었다.
내가 그런 집안에서 제일 첫 번째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식구들 모두에게는 매우 환영받을 일이었던 것 같다.
뭘 하더라도 나는 집안의 장손이자 대표로 뭘 하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다.
집안의 장손은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등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저마다의 지식과 정보를 쏟아내며 어린 나에게 강요에 가까운 가르침을 주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아니 자신들이 이만큼 많이 알고 있음을 뽐냈다.
정작 그들의 자식들은 금이야 옥이야 하며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듣기 싫은 소리,
애 기죽이는 소리는 절대 듣지 못하게
소위 커버를 치는 대화를 자주 했다.
누구를 위한 가르침일까?
누구를 위한 관심이었을까?
그 덕분에 나는 늘 울지도 떼를 쓰지도
덜렁거려서도 안되었고 철이 들어야 했다.
나의 모든 성장과정과 결핍을 아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내게 집안의 큰 숙제를 떠넘기려 늘 나에게 그런 쪽의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늘어놓았고 늘 이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시켰다.
지극히 내 관점에서는 그랬다.
그나마 어린아이였기에 내가 힘든 일을 하거나 고생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큰 부담과 짐은 오롯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받아내고 계셨다.
4대 봉제사를 잘 지내야 집안이 편안하다는 논리 아래 돌아가신 아홉 분을 향한 제사와 명절 차례상까지 총 열 한 번의 제사를 지냈고,
그때마다 우리 가족은 늘 할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가서 제사 준비를 하고 손님이 돌아간 뒤 새벽 한 시가 넘어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어릴 땐 무조건 밤 열두 시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제사가 끝나고 음복을 해야 복이 들어온다는 믿음으로 그 심야시간에 밥 한 공기를 깨끗이 비워내어야 겨우 이부자리를 깔았다.
그렇게 자리를 깔고 눕는 시간은 늘 새벽 한 두시가 넘어야 했다.
부모님이 분가를 하신 이후로는 그나마 제사를 시작하는 시간이 열 한 시 정도로 앞 당겨졌는데 그렇다고 집에 가는 시간이 빨라지진 않았다.
그 많은 제기들과 음식을 먹고 난 뒤의 뒤처리는 오롯이 엄마의 몫이었다.
하필 모든 제사는 차디찬 한 겨울에 몰려있었고, 기름보일러가 막 보급될 시기였던 그때 엄마는 연탄불에 데운 세숫대야 물을 받아 언 손을 녹여가며 차디찬 물에 설거지를 하셨다.
얼음물에 잠시라도 손이나 발을 담가본 적이 있는가?
나는 지금도 30초를 넘길 수 없다.
그런데 엄마는 한 시간이 넘도록 얼음물에 설거지를 하셔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엄마는 결국 그 어려운 일을 해내셨다.
짐작컨대 그날 새벽 엄마는 손이 마비되는 고통으로 선잠을 자며 밤새 퉁퉁 부은 손으로 괴로워했으리라.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큰 시장에서 커튼 일을 하셨고, 제사가 있는 날엔 죽을죄를 지은 사람 모양으로 가게 사장에게 머리를 숙이고 제사음식을 하러 겨우 30분이나 한 시간 일찍 나서셨다.
그나마도 제사가 있는 날이면 엄마는 그 전날부터 바삐 음식재료 준비를 하느라 늘 열두 시가 넘어야 잠을 잘 수 있으셨다.
그렇게 부리나케 일을 마치고 할아버지 댁으로 가면 할머니의 눈에선 레이저가 나왔고, 늘 못마땅해하시며 혀를 차고 한 숨을 쉬셨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자란 나는 엄마가 무슨 잘못을 하셨길래 저런 대우를 받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내겐 그건 그냥 어른들의 일이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그냥 그런 일을 해야 하고,
땀에 젖은 작업복을 던져놓고,
일찍 와서 음식과 모든 준비를 한 후
가족들을 위한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리고 뒤늦게 열 시 열 한 시에 오는
가족들의 식사까지 챙기며
까탈스러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비위를
다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절이었다고 하지만,
그러면 안 되었었다.
누군가는 바빠서 안 와도 되었고,
누군가는 멀리 살아서 못 와도 되었고,
누군가는 그냥 돈이나 붙여주면
자기 할 일이 다 끝난 것처럼 굴면 안 되었다.
당신들 그러면 진짜 죄받아!
‘대한’이가 ‘소한’이 집에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는가?
미친 강추위가 휘몰아치는 소한이란 절기에
우리 집은 늘 제사가 있었다.
그 날도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집으로 향했고, 운 좋게도 열 한 시에 제사를 시작해 열두 시가 넘어서야 제사가 끝이 났다.
할아버지 집을 도망치듯 뛰쳐나온 우리 가족은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버스정류장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심야버스를 기다리며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차가 없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이고, 택시를 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버스가 아닌 교통수단은 그저 사치였던 형편이라 불평불만 따윈 없었다.
그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 동안 기다렸을까?
심야버스 한 대가 반갑게도 온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모양새다.
앗! 저건 좌석 버스!!!
저건 엄청 비싼 버스다.
나는 점퍼 속에 손을 꼭 넣어두고, 엄마를 지켜봤다.
엄마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보셨고,
아버지는 버스기사에게 물어보셨다.
“이 다음 버스도 있는교?”
“다음 버스는 한 이십 분 뒤에 올거라예”
“일반버스라예!”
우리 가족은 그렇게 차가운 길바닥에서 이십 분을 더 추위와 견뎠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엔 프레스토라는 흰색 중고차가 새로 생겼다.
버스비 때문에 그 개고생을 했고 그 때문에 차를 샀다고 생각이 되지만, 실상은 사람을 죽이는 제사 때문에 차를 산 것이다.
차가 있으면 제사를 마치고 집으로 빨리 갈 수 있다는 이상한 논리가 우리 가족을 서서히 목을 조여 오는 것도 모른 채,
나는 그저 우리도 차가 생겼다는 게 꿈만 같고 좋았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보면,
그 숱한 세월 동안 부모세대가 치러온 고통으로 내가 지금 이렇게 먹고살만한 것인가?
아니면,
그 고생스러움을 지켜본 내가 어떻게 해서든 저렇게 살지 않도록 가난과 고통을 끊어낼 수 있을까 고민했기 때문이었을까?
어떤 말이 옳은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제사라는 것이 죽은 사람을 기리는 행사에서 죽어서도 산 사람을 죽도록 괴롭히는 것은 뜯어말려야 할 악습 중의 악습이라는 사실이다.
산 사람이 자신의 조상에게 마음과 정성으로 죽은 사람을 기리는 일이 무엇이 잘못이겠는가!
내가 말하는 악습은 자기들이 정해놓은 원칙을 들먹이면서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히고 누가 정했는지도 모를 원칙과 관습을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렇게 희생하면 누가 좋을까?
귀신이 제삿밥을 먹고 좋아해 주면 후손도 좋다는데 그건 명백히 잘못된 말이다.
후손이 마음을 내어 기쁜 마음으로 좋아서 해야 귀신도 좋은 것이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정을 느끼며 좋은 이야기 나누며 좋은 시간을 보내면 될 것을......
누군가는 잘나서 돈으로 해결하고
누군가는 못나서 몸으로 때우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고생하기가 싫으니 최대한 명절 때 늦게 오는 얌체족과 제사 때만 되면 바빠서 못 온다는 핑계족들도 결국 자신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같은 착한 사람들은 희생을 암묵적으로 강요했다.
나는 그런 인간 부류들이 세상의 중심에서는 위선을 떠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구침을 느낀다.
제사 지내는 사람 따로!
조상님의 음덕을 받는 사람 따로!
귀신도 편애를 하나? 묻고 싶다.
그리고 그들은 유산 분배를 할 땐
법대로 하자고 했다.
순진한 건지 바보인 건지 아버지는 엄마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내어 주었다.
그들이 가져간 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평생 일궈낸 집 한 채였고, 그 집은 재개발이 되며 전매차액만 10억원이 넘는 거액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몫의 십 분의 일도 안 되는 돈을 아버지에게 내밀며 제사 명목으로 장손에게 챙겨주라고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살아생전에 평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 집은 준이꺼다! 아무도 욕심내지 마라!”
나는 그냥 그런 줄 알았다.
할머니는 또 평소 이런 말씀을 자주하셨다.
“ 내 죽고 나면 다 니꺼지!”
“작은 아버지들이 가만히 있겠나?”
“ 그럴 사람 없다. 괜한 소리 하지 마라!”
원래 자식은 부모 말을 안 듣는다.
그리고 나는 그 돈을 받은 적도 구경해본 적도 없다.
아버지는 뒤늦게 자신의 몫을 형제들에게 좀 더 내놓으라고 했지만, 이미 돈은 그들의 주머니에 들어간 뒤였다.
아버지는 한동안 땅을 치며 후회하셨고, 처자식보다 소중히 여겼던 자신의 가족인 형제들에게 막말과 욕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선 형제들이 준 제사 명목비는 자신의 몫이라고 내게 당연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어차피 내 몫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내가 만들어준 제사음식을 싸들고 아버지 집으로 간다.
내가 죽일 놈이다!
To. 엄마
매 순간 열정적이었고 진심이었던 엄마의 성실함과 우직함이 저를 올바르게 클 수 있도록 인도했습니다.
많은 말이 아닌 하나의 행동으로 ‘바름’을 보여 ‘삿된 악행’을 분별하는 판단력을 키워주셨고, 조건 없는 사랑과 희생으로 다른 사람의 곤경과 처지를 이해하는 아량을 넓혀주셨습니다.
그 숱한 시간 속에서의 모든 희생이 의미 없다 생각하지 말아 주세요.
엄마는 저에게는 등불이었고,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사랑합니다.
From.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