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29일 D-day를 헤아리다. 슬픔의 무게
어느 날부터 제 삶은 D-day를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을 위한 D-day 인지도 모른 채
그 날을 위해 날짜를 표시하고 계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슬픔의 위안’ 이라는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의 책에 이런 글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셰익스피어 리어 왕(King Lear)의 마지막 장면”이다.
5막에서 백발의 군주 ‘리어’는
숨이 끊긴 딸 코델리아를 안고 무대를 걷는다.
이 모습은 비극적 상실의 상징적 이미지이자
‘슬픔의 무게에 대한 은유’이다.
슬픔은 ‘무거움(grief)’이다.
슬픔(grief)이란 말의 어원은 ‘무겁다’는 뜻의 중세 영어 grief이다.
사람들이 슬픔을 말할 때
가장 흔하게 쓰는 형용사는‘참을 수 없는’ 이다.
슬픔은 참아야 할 무엇이자
짊어져야 할 무거움인 것이다.
이 장면에서 리어는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대사를 한 줄 읊는다.
오직 한 낱말로 된 이 대사를 거듭거듭, 다섯 번이나 읊는다.
그 말은 바로 ‘결코 never’다.
늙은 왕 리어는 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그리고 그 몸에 다시는 생명이 깃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라고 다섯 번이나 말한다.
‘결코’는 그토록 받아들이기 힘든 의미이기 때문이다.
슬픔은 결코의 무게이며
슬퍼한다는 것은 ‘저마다의 결코를 말하는 과정’이다.
몇 번을 말하든 말이다.
슬픔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르다.
모든 죽음에
리어가 느끼는 무게의 슬픔이 다르는 것은 아니다.
슬픔은 애도와는 다르다.
슬퍼하는 사람은 자신을 내리누르는
그 모든 ‘결코’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삶을 재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슬픔의 무게를 짊어지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안다.
삶은 한잔의 커피처럼 소소한 것들로 연결된다.
모든 관계는 서로 관련이 있는 특이한 성벽들이 뒤섞여 이루어진다.
진정한 사랑은 큰 것들이 살짝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들이 마구 뒤섞이는 것이다(page 30).
고통은 엄연한 실재이다.
그래서 고통은 인식 가능한 고통의 무게로 공간을 채운다.
우리는 “내 안에 고통이 있어요”
‘I have pain in me’. 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나는 고통에 빠졌어요. ‘I am in pain’ 이라고 한다.
고통에 빠져 있을 때는
고통이 당신의 전 우주만큼이나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