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삐걱대고 있었다
우리는 빚이 꽤 많았고 모아둔 돈도 없었다.
결혼하고 5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갖은 애를 쓰다 맘도 몸도 상해서 다 필요없으니 이제 둘이 재밌게 살아보자! 이른바 욜로를 외치며 마구 써대던 중 느닷없이 아이가 찾아왔다.
맞벌이에서 외벌이가 되었고 한사람의 수입으로는 세식구의 생활비와 여러가지 대출을 겨우겨우 감당할 뿐이었다. 그나마 쥐똥만큼 있던 여유도 내가 뜨개공방을 하겠다고 다 끌어다 썼는데, 오픈하자마자 1달도 안되어 코로나가 터졌다. 그 다음은 뭐, 말 안해도 알 법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여러가지 상황속에서 나도 신랑도 지쳐가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일하는게 맞는거지? 너무 우울해. 따따가 크는 것도 못보고 새벽에 와 서너시간 자고 또 일하고 이게 사는건지 모르겠어”
연애할 적 온종일 기어코 내가 울때까지 장난을 치고 까불던 세상 똥꼬 발랄하던 신랑이 운다. 어스름한 새벽에 집에 돌아와 자는 우리를 깨울까 옷방으로 쓰던 자그마한 쪽방에서 혼자 이불 한장에 몸을 구겨 눕히고는 훌쩍이던 그 모습은 아직도 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한편, 나는 홀로 하는 육아에 지쳐가고 있었다. 아이는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빨빨거리고 돌아다녀야 하고 가만히 못있는 나의 성향상 아이와 둘이 하루 종일 있는 것 자체가 힘겨웠다. 아이가 잠들면 밤이 세도록 뜨개질을 했다. 그래야 살 것 같았다. 그러다 아이가 조금 자라 어린이 집에 가기 시작하자마자 뜨개 수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의 문제 행동이 시작되었다. 내 에너지를 아이와 노는데 썼으면 좋았으련만 그때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겠다고 아이를 망부석처럼 앉혀놓거나 조막만한 아이를 혼내기 일쑤였으니, 썩 좋은 엄마는 아니었던 것 같다.
셋뿐인 소중한 나의 가정은 이렇게 삐걱대고 있었다.
어쩌면 엄마의 통화를 들으며 덜컥 통영에 갈 생각을 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가서 해볼까? 펜션도 좀 수리하고 내가 운영하면 일주일에 한팀은 받을 수 있을것 같은데.. 거기다 아래 빈 공간은 카페하기에 딱이야!‘
머리가 팽팽 돌아간다.
‘집을 정리하고.. 신랑 퇴직금, 차도 팔고.. 그래!!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