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자서전 (앤 카슨)
고전은 어렵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더욱 어렵다. 고전을 모티브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을 하는 앤 카슨의 글은 정말 어려웠다. 온갖 생략과 상징으로 가득 찬 얇은 책 한 권을 설 연휴부터 붙잡고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줄거리 자체를 따라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지만, 한 상황을 포착하는 문장 몇 줄이 자꾸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아 몇 번을 다시 읽다가 포기하고 넘어가곤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표방하는 요즘의 시들보다 차라리 정철의 사미인곡을 더 이해하기 쉬운 건 나뿐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빨강의 자서전』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나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함과, 그 해괴함으로 인해 더 흥미를 가지고 공감하게 만드는 이상한 사조인 것 같다.
홀연히 나타나 일방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게리온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신화 속 헤라클레스처럼, 『빨강의 자서전』 속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을 괴롭게 한다. 게리온의 내면의 본질을 찾기 위한, 답이 없는 질문들에는 관심이 없고 섹스만을 욕망한다. 그는 게리온의 감정과 사랑을 이해했는가? 그를 사랑했는가? 아니다. 맞나? 아니, 모르겠다. 그것은 말없는 헤라클레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도 모를지도 모른다. 헤라클레스가 게리온을 사랑했는지 여부가 게리온에게 중요한가? 혹자는 시련이 성장을 만든다고, 게리온의 실연은 시련이 되어 그의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다름을 지고 있던 게리온에게 실연이라는 추가적인 시련이 과연 필요했을까?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 뿌리내린 식물에게 달콤한 빗물 한 방울 없이 냄새나는 비료덩어리만 푸지게 퍼주면 열매를 맞을 수 있을까? 게리온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그 다름까지 사랑하기는커녕, 그 다름을 유린한 헤라클레스를 원망하면서도,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던 게리온이 슬프다.
소모적이고 위험하고 지치는 로맨스에 대해 한참을 읽다 잠이 들어서인지, 오늘 아침 꿈에는 아주 힘겨운 멜로영화가 재생되었다. 꿈에서 깨어 눈을 뜬 후에도 한참 꿈 속에 젖어 있었다. (뒹굴거림에 대한 핑계가 맞다.) 내 웅크린 몸을 펼쳐 보이며, 코트 속에 빨간 몸과 작은 날개를 웅크려 숨긴 게리온에게 아주 작은 무언가라도 남아있었으면 좋겠다는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해본다.
- 게리온은 멍청이라는 말에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정의가 실현되면
세상은 무너진다. (p.33)
- 거리는 공간 없는 내면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것의
가장자리까지 뻗어 있다. 그건 빛에 의존한다. (p.64)
- 현실은 하나의 소리다, 그러니 주파수를 맞추고 열심히 들어야지 소리만 질러대선 안 된다. (p.91)
- 구(求)의 크기에 비례해 보면
달걀의 껍질에 비해 열 배는 더 얇은 지구의 껍데기처럼 영혼의 껍질은 상호 압력의 기적이다. (p.91~92)
- 하지만 난 그 별을 보는데. 넌 추억을 보는 거야. (p.102)
- 지금 세상이 끝난다면 난 자유로운 거야와
지금 세상이 끝난다면 아무도 내 자서전을 못 볼거야─ (p.110)
→ 삶을 유지하고 끊어버리는 모순적인 내면의 목소리는 혼란스럽다.
- 게리온의 삶은 혀와 맛 사이에 갇힌 무감각의 시간으로 들어섰다. (p.113)
- “가우초는 말을 타고
평원을 가로질러 멀리 달려가는 단순한 행동에서
그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다는 지나친 생각을 하게 되었다.” (p.130)
- 나는 의심의 성애학을 연구하고 싶어요. … 진실에 대한 … 올바른 추구의 전제조건으로서요. 인간의 근본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 앎에 대한 갈망을 … 포기할 수 있다면요. (p.139)
- 정의란 게 존재한다면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짧고, 깔끔하고, 리듬감 있고. (p.142)
- 나 자신을 의심하는 분별력을 갖고 신을 믿는 거죠.
필멸성이라는 게 결국 우리들에게 섬광처럼 비치는 신성한 의심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신은 잠시
승인을 유보하고 휙! 우리는 사라지는 거지요. (p.151)
- ‘거리’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
글쎄요. 예를 들어 오늘 아침에
나는 집에서 책상에 앉아 발코니 옆 아카시아 나무를 내다보고 있었는데
아주 키가 큰 아름다운 나무였고
우리 딸도 거기 있었어요 그 아이는 내가 일기를 쓸 때 옆에 서서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요.
오늘 아침은 무척 화창했고 마치 여름날처럼 예상 밖으로 맑았어요. 나는 고개를 들어
새 그림자 하나가 아카시아 잎 사이로
날아가는 걸 보았는데 마치 스크린에 비친 장면 같았어요. 그리고 난
언덕 위에 선 듯한
기분을 느꼈어요. 반평생쯤 걸려서 힘들게 언덕 꼭대기에 오른 거고
반대쪽도 비탈을 이루고 있죠.
뒤를 돌아보면 딸아이가 아침 햇살 속에 작은 금빛 동물처럼 엉금엉금 기어서
언덕을 오르기 시작하는 모습이
보이겠죠. 그게 바로 우리예요. 언덕을 오르는 존재들.
서로 다른 거리에 있는. 게리온이 말했다.
늘 변하는 거리에 있죠. 우리는 서로를 도와줄 수도 없고 소리쳐 부를 수도 없어요─
내가 딸아이에게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렇게 빨리 올라오지 마”라고 할까요? (p.152~154)
- 게리온은 불안이나 슬픔 같은 감정 상태에는
단계가 있지만 권태에는
단계가 없다고 생각했다. (p.206)
- 그들 사이의 공간에 위험한 구름이 생겨났다.
게리온은 다시 그 구름 속으로 들어가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갈망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검은 핏자국이 묻은
반짝이는 가시들이 눈에 선했다. (p.219)
- 시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나 떨어져 있을 때나 서로 얼마나 멀리 있는지 너도 알잖아 ─ (p.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