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횸흄 Aug 09. 2023

중드 덕분에 발음은 좋아요, 발음만...

ft. 구몬 중국어 화상 학습 

어릴 때 홍콩 가수의 노래를 대충 몇 소절 따라 부르곤 했는데 그건 그저 한문 발음을 살짝 꼰 것이었다. ‘이얼싼스~’ 숫자 세기와 ‘니하오’, ‘씨에씨에’같은 초간단 인사말 정도는 알았지만 그런 가사는 노랫말에 나오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저 들리는 대로 부를 뿐이었다. 다행히 나는 한자 세대라 한자를 지금 아이들처럼 어려워하지는 않았다. 꼬는 연습만 하면 영어를 한글로 적는 것보다 오히려 쉬웠다. 한글을 뗀 직후부터 천자문을 외게 하고, 조간신문을 읽게 한 것이 내가 중국을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챈 부모님의 선견지명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중국어 노래를 곧잘 따라불렀다. sky를 ‘스카이’라고 읽고 ‘하늘’이라고 뜻까지 공부하는 것에 비하면 천(天)을 ‘티엔’으로 읽는 것이 더 익숙했다. 큰 아들이 어릴 때 딸기를 영어로 뭐라고 하냐고 물으니 ‘똴기’라고 하던데 그 모습을 보곤 내가 중국어를 대충 꼬아 발음하던 때가 생각나 혼자 웃었다. 혀꼬는 기술은 무사히 유전된 듯 하다.  


올초 중국어 서점인 ‘이마녀 중국어수프’에서 열린 오프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좀 일찍 도착한 터라 사장님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다 보니 어느새 중드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다 사장님이 건넨 질문에 순간적으로 열이 확 식었다. “그럼 귀는 다 트이셨겠어요?” 그 다음에 중국어로 몇 마디 질문들을 하셨는데, 결론적으로 내 귀는 트이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뿐이었다. 이럴 수가! 엄마표 영어법 중에 ‘흘려듣기’라는 게 있던데 흘려들은 걸로 치면 내 귀도 중국어에 트이는 게 맞지 않나?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고, 미드를 보며 영어를 익힌 경우가 많다는 걸 알면서도 왜 나는 입은 커녕 귀도 중국어에 트이지 못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다. 그러다 어릴 땐 더빙판 아니면 한글 자막판으로 중드를 봤기에 결과적으로 내 귀는 중국어와 별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내가 보는 중드의 99%가 고장극이라 현대에서는 쓰지 않는 ‘디엔샤(전하)’, ‘비샤(폐하)’, ‘완쉐이완쉐이 완완쉐이(만세만세만만세)’, ‘꿰이(꿇어라)’에만 반복 노출되어 있어 회화에는 도무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장극에는 심지어 ‘워아이니’도 잘 나오지 않는다. 사장님, 그래서 제 귀가 꽉 막힌 겁니다. 뭔가 기대를 하셨다가 당황하신 듯 했던 그분의 얼굴이 떠올리면 지금도 부끄러워진다. 


그나마 단문이라도 알아듣고 그림책 몇 줄이라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구몬 학습 덕분이다. 어릴 때도 해 본 적이 없는 구몬 학습지를 마흔이 넘는 나이에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학 학습을 위해 학습지를 이용하는 어른이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어른의 공부는 대개 직장의 요구나 자기 계발 차원에서 이루어지므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스스로 할 것 같지만 애나 어른이나 공부가 힘든 건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학습지와 구몬 선생님을 빌려 게을러지려는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다. 나 역시 구몬 학습을 하면서 숙제를 몰아서 하기도 하고, 직장에 두고 왔다고 핑계를 대기도 하는 등 아이들이 부리는 꼼수를 같이 부려 가면서 아이들 모습 그대로 구몬 학습을 2년간 했었다. 혼자 했으면 아마 2년은커녕 두 달도 못 되어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래도 몸에 밴 성실함이 있어서인지 선생님들은 다른 분들에 비해 숙제를 잘 해오는 학생이라고 칭찬을 해주셨었다. 일주일에 15분 하는 화상수업이지만 그조차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밀리지 않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구몬 학습지는 매달 한 뭉치의 학습지가 배송되고 일주일에 한 번 화상수업으로 복습과 학습이 진행된다. 3만원 남짓의 비용으로 내 수준에 맞춰서 학습이 진행되는 점, 장소 이동이 필요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시작되고 이내 그만두는 사람이 많은지 초반 몇 달은 강사가 거의 매달 바뀌었다. 그것 때문에 그만 두는 사람도 있었을 것 같다. 뭔가 나를 간 보는 느낌이 들어 불쾌했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 그제야 ‘쉽게 그만둘 애는 아니’라는 등급이 매겨진 모양이다. 드디어 정식 선생님이 배정되었고 그분과의 합이 잘 맞아서 편하고 즐겁게 공부를 했다. 어릴 때 꼰 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을 텐데도 선생님은 늘 내 발음이 좋다고 칭찬했고, 나는 ‘아마 중드를 오래 봐서 그런가 보다’며 민망해하면서도 기뻐했다. 다른 선생님께서도 배운 기간에 비해 발음을 칭찬해주실 때가 많았는데 그때는 정말 ‘중드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현대어를 사용하는 드라마를 추천했지만 그 추천을 따르지 않고 나는 늘 고장극만 봤다. 


그때 현대극에 입문했으면 내 중국어는 더 유창해졌을까? 하지만 그보다는 오래 함께 수업한 선생님과 헤어진 것이 더 아쉽다. 그분과 더 오래 공부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코로나로 선생님도 육아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다른 선생님으로 교체되었다. 그래도 1년 넘게 배웠다고 이번에는 간 보는 단계 없이 베테랑 선생님이 배정되었다. 하지만 수업을 진행할수록 전의 선생님과 스타일이 너무 달라서 무척 힘들었다. 공부 내용도 어려워졌는데 선생님은 내게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난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하는 게 아닌데 HSK 중심으로 가르쳤다. 나는 느슨한 사람인데 선생님은 당김이 심한 사람이었다. 내 요구를 당당히 말해도 되었지만 열심히 가르쳐주시려는 선생님의 마음도 아는지라 차마 말하지 못하고, 대신 내가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만큼 했으면 혼자서도 하겠지 하는 믿음도 있었다. 


어쩌면 2년 가까이 중국어를 배우면서 내용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못 견딘 것일 지도 모른다. 그 핑계를 나는 선생님에게서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15분의 시간이 모자라서 따로 보강까지 잡아서 가르쳐준 그분의 열의를 뵐 낯이 없기도 했다. 여러모로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결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도 인간관계인지라 양측의 코드가 잘 맞으면 내내 즐거운데 그렇지 못하면 최소한 어느 한쪽은 괴롭다. 일주일에 15분만 만나서는 그 괴로움을 상쇄시키기가 어렵다. 진도 나가기도 바쁘고 선생님의 목표와 나의 목표가 너무 달랐다. 그렇게 나는 2년 만에 중국어 화상학습을 중단했고,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이 믿음은 믿을 만 했을까?


이때 내가 제출했어야 하는 정답은 선생님 교체를 요구하거나 그분에게 내가 완전히 맞추는 것이었지만 나는 남의 속도에 나를 맞추는 걸 어려워하기에 오답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현재 중국어 초기화 직전의 상태이다. 함께 공부할 사람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함께 하는 건, 어려운 일일수록 더 큰 힘이 된다. 하지만 내 주변엔 중국어를 함께 공부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학창 시절부터 ‘의지가 박약한’ 사람이라 화상 수업은 중도에 그만두었지만 다행히 ‘흥미는 충만’하다. 고로, 중국어를 배우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도서관에 가서도 한 번씩은 중국어 동화책을 들춰본다. 하지만 정작 읽을 수가 없어 덮고 만다. 병음이 써 있지 않은 책을 읽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아, 읽어내고 싶다! 그러다 읽을 수 있는 책을 발견하면 고함량 비타민C를 복용한 것처럼 흥미가 솟구친다. 그렇게 지금도 중국어를 놓지는 않았다. 아들 친구가 화상 수업하는 교재를 받아서 읽고 쓰며, 단기적이지만 공부 모임에 참여하기도 한다. 남들에게는 흘려듣기 중이라고 말하며 열심히 중드도 보고 있다. 눈뜨면 중드, 자기 전에 중드, 책 없을 때 중드! 이거면 뭐 흘려듣기 맞네! 그런데 자막 없이 보야 하는데 그 타이밍에 박약한 의지가 등장한다. 힘들구나 공부!

 

만약 내가 다시 누군가에게 중국어를 배우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1:1 과외가 아니고서는 다시 화상수업 학습지를 할 것 같다. 취미 생활로 가성비가 좋은 방법이다. 단, 처음 한두 달은 학습지 회사에서 나를 간 볼 수 있으므로 3개월 이상은 하는 게 좋다. 일단은 조금만 더 나를 믿어볼게요.

이전 08화 중드와 중국소설, 두 마리의 토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