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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Oct 22. 2023

마음이 순해지는 드라마

우리가 흔히 ‘킬링타임용’이라고 부르는 드라마들이 있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드라마를 틀어놓고 딴짓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드라마들이다. 그런데 또 그 시간에 예상치 못하게 몰입을 해서 밤을 꼴딱 새는 경우도 있으니 그 드라마들을 '킬링타임용'이라고 부르기엔 미안해진다. 유일하게 본 중드 현대극인 <아, 희환니>가 그랬다. 당시 나는 엄마를 간호해야 해서 잠을 자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고 그때 내 상황과는 반대 감정이 발산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재미와 죄책감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때 이 드라마를 보며 버틴 시간이 내가 나쁜 생각을 하는 걸 막아준 건 분명하다. 죄책감이 반복되고 피식피식 웃고 있는 내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시간을 버틸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고 할까? 고마움이 컸다. 그러니 '킬링타임용'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한다. '땡큐타임용'이 차라리 맞다. 내가 밤새워 걱정한다고 달라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내가 좋은 기분이면 내 행동도 좋아지지 않을까 그렇게 합리화하기도 했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밤새 뜬눈으로 누군가를 지켜줄 수 있게 해준 점이 고맙다. 비록 아들의 결혼에 반대하며 돈봉투를 건네는 매커니즘은 너무 식상해서 안쓰럽기까지 했지만 로코의 여신이라는 짜오루스(조로사)와 내 '고막남친 1호' 린위션(임우신)이 펼치는 로코 최적화 연기가 너무 좋았다. <아, 희환니>를 보는 동안은 고단하지 않았다.


<맹비가도>나 <췌서>는 <아, 희환니>처럼 몰입하지는 않았지만 보는 내내 건강함을 느꼈다. 모두가 황제의 사랑을 갈구하는 후궁에서 오직 오래 살기 위해 황제의 사랑을 피하려는 맹비의 이야기인 <맹비가도> 속 맹비와 동료들이 마치 미드 <섹스 앤더 시티>의 인물들을 떠올리게 했다. <췌서>는 타임슬립물인데 현대에서 건너온 데릴사위 녕의가 아내 소단아의 커리어를 위해 내조하는 태도는 보는 내내 건강식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못난 작은집 사람들까지도 맛있었달까? 그간 드라마 속에서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애쓴 남자들은 결국 그 여자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여자 역시 그런 보호와 구속을 받고 싶어하는 듯 보였고. 그런데 맹비나 소단아는 그런 사랑을 원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주는 대상을 원했다. 


그런 여성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했는데 <몽화록>의 조반아는 그것을 넘어 허락없이 주는 도움조차 경계한다. “네가 뭔데 내 허락없이 나에게 도움을 주냐?”는 스웨그 넘치는 언니랄까? 아무리 오래 만난 연인이라도 배신을 하면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능력있는 남자의 도움이 아닌 자신이 가진 재주로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조반아의 캐릭터가 맘에 든다. 류위페이(유역비)의 부드러우면서 강단있는 연기와 어우려져 최근 본 드라마 중 가장 인상깊었다. 권력을 가진 남자 주인공인데도 천샤오(진효)가 부드럽게 연기한 점은 더 좋았다. 중국은 다양한 방언이 많아 중드는 전문 성우의 더빙이 많은 편인데 이 드라마는 배우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들을 수 있다는 점도 특별하다. 류위페이(유역비)의 비음 섞인 목소리와 천샤오(진효)의 퉁퉁대는 말투가 묘하게 잘 어울린다. 비록 <신조협려>에서는 서로 다른 시즌에서 소용녀와 양과를  각각 연기해 어긋났지만 이번 작품에선 제대로 만났다. <몽화록>은 고전을 원작으로 하지만 원작이 그리 긴 내용은 아니라고 하니 재창작을 잘한 드라마이다. 원작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국내에서 구하기 어려워 읽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원작이 어떻든 간에 내용, 연기, 영상미 모두 뛰어나 연말에 상 몇 개는 거머쥐어도 좋을 드라마이니 역시 ‘킬링타임용’은 결코 아니다. 조반아가 잘 되어서 두고두고 마음이 좋고, 그 잘 되는 과정은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어진다. 역시 '땡큐타임용'이다.


이 드라마들과 반대로 머리가 무거워지는 드라마들도 있다. <천성장가>나 <학려화정>처럼 목숨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 드라마들이 그렇다. 이런 류의 드라마들은 대개 대작이거나 작품성이 뛰어나고 주연 배우들의 열연으로 작품 전체의 무게가 무겁다. 다 보고 나면 기립박수를 치고 싶기도 하고 온몸의 진이 다 빠지기도 한다. 나 역시도 가끔 어딘가 내 삶을 내동댕이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땐 이런 드라마들을 찾아보기도 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든 주인공을 보는 게 너무 힘들어 중도하차 하기도 하지만 다 보고 나면 뭔가 큰일을 하나 해낸 것 같기도 하다. 그건 머리싸움 때문만이 아니라 감정싸움 때문이기도 하다. 감정싸움이 머리싸움보다 더 힘들다. 그래서 <성한찬란>이 재밌으면서도 힘들었다. 자신의 신분을 숨기면서 사랑을 지키려는 릉불의의 인생이 너무 가여워서 보면서 엄청 많이 울었다. 우레이(오뢰)는 언제 이렇게 커서 매력적인 배우가 되었단 말인가?하는 잡념도 좀 섞이긴 했지만 <성한찬란>에서 남성미로 화면을 꽉꽉 채운다. <화천골>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는 화천골이 떠오르기도 하고, <백발왕비>를 보면서 이 사람 저 사람 간의 복잡한 감정 싸움에 지쳤던 경험이 떠오르기도 했다. 에너지가 많이 필요해서 내 경우엔 이 드라마들 보다는 <맹비가도>, <췌서>, <맹의첨처>, <장군재상> 등의 드라마를 더 찾게 된다. 내 머릿속은 현실에서 이미 충분히 복잡하므로. 나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우침으로 나를 괴롭히려는 때가 아니라면 마음이 편한 드라마가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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