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관계는 나날이 악화되는 듯 한데, 중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어나는지 중국드라마 수급이 무척 빨라졌다. 예전엔 몇 편 안 되는 드라마를 반복해서 보거나 일부러 천천히 보는 등 속도 조절을 했어야 하는데 지금은 일과 육아, 책을 뺀 나머지 부분을 모두 중드에 할애하여도 모든 중드를 보는 것은커녕 관심작조차도 다 챙겨보기가 어렵다. 그 점이 내내 아쉽다. 세상의 책을 모두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진작에 포기했는데 왠지 중드는 노력하면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중드들을 보니 일상을 모두 바쳐도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최대한 많이 보기 위해서 취미와 삶의 경계를 좀더 무너뜨리고, 더 나아가 일에도 중드를 활용하는 등 앞으로는 더욱 ‘중드 일상’을 도모해야 한다. 왜 이렇게 결연한가? 내가 생각해도 남들 보기엔 충분히 어이없이 웃긴 결심이지만, 지금 나는 무척 진지하다.
요즘엔 한중관계가 좋지 않아 동북공정 문제까지도 신경을 써서 봐야 하니 취미생활 답지 않게 조심스럽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성조기를 들고 모여있는 사람들을 내가 이해 못하듯, 열심히 중드를 좋아하는 나를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 할지도 모른다. 아니 중국이 지금 우리나라와 어떤데 중드만 본단 말이야? 한때 한드를 좋아하던 중국인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을 느낄 것이다. 세상에 좌가 있으면 우가 있고, 위가 있으면 아래가 있고, 앞이 있으면 뒤가 있으니 내가 한쪽에 느끼는 불편함을 다른 한쪽에서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랑은 굳건해지는 법, 취미라고 다를 이유가 없다. 좀더 고민 하면서 향유하는 방향으로 잡고 중드를 즐기는 중이다.
그 고민의 첫번째는 동북공정이다. 그다지 부지런하고 예민한 편이 아니라 동북공정이 심해서 미리 소문이 파다하게 난 경우가 아니라면 내가 알았을 땐 이미 드라마를 보고 난 후일 때도 많다. ‘어쩐지...’ 싶은 경우도 있고 ‘그랬나?’ 의아한 경우도 있다. 한중일은 인접 국가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어쩔 수 없고 특히 중국은 대륙으로 연결되어 일본보다 더 많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조선과 명의 관계 때문에라도 더더욱 그렇다. 중국의 입으로 ‘한복은 한푸를 따라한 것이다!’라고 주장을 하는 것에는 함께 격노하지만 때로는 고증이 잘못된 실수로도 볼 수 있다. 의도를 짐작하기 위해서는 예민한 감각이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내겐 논리적 예민함이 부족하다. 다행히 기운을 느끼는 감이 발달한 편이라 이상하다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찾아본다. 하지만 논란에 선 드라마라고 해서 모두 거르진 않았다. 위에서 말했듯 어떤 부분은 실수로도 볼 수 있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악의와 무능력은 결과적으로 보면 비슷하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차이가 분명 있다. 그래도 이미 알게 된 이후에는 스스로 판단이 설 때까지는 시청을 보류한 채 공부하고 나서 시청 여부를 결정한다.
동북공정 문제 외에도 중국은 드라마의 검열이 심한 나라이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검열이 매우 심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 중국이 그런 시대인 모양이다. 광전총국이라 불리는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의 악명은 중드 팬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떤 드라마는 다 만들어놓고도 사스 문제 때문에 한국 배우를 중국 배우로 전면 교체해서 다시 촬영하기도 하고(<중이전기>), 어떤 드라마는 검열로 인해 분량이 절반 가까이 줄어들기도 하고(<천성장가>), 심의 통과 문제로 기본적으로 제작 후 2~3년 후 방영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타임슬립, 왕조전복, 미성년자 애정씬, 브로맨스 등 검열의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방영이 되더라도 편집이 많이 된다. 동북공정은 대외적으로, 검열은 대내적으로도 불만을 낳으니 이런저런 여건 속에서 방영된 작품들을 고생이 많았다며 토닥토닥 안아주고 싶다. 반토막이 난 드라마를 보면서 화를 내거나 거부하기 보다는 더 애틋하게 바라봐주는 것, 그것이 중드를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동북공정이든 검열이든, 방영 지연이든 여러모로 골치가 아파서 중드에 마음이 멀어지면 또 멀어지는 대로 두는 것도 좋다. 취미생활인데 마음이 가면 덜 하고, 마음이 생기면 더 하는 게 당연하다. 덕질을 하다보면 분명 취미로 하는 일인데도 생사가 달린 일처럼 매달리게 될 수도 있다. 덕질유전자가 있는 모양인지 나 역시 배구, 중드 등에 덕질을 하며 살아왔는데 몰입하다보면 선을 넘기가 쉽다. 다 큰 어른이 아프다고 조퇴해서 스포츠뉴스에 대문짝만하게 얼굴이 나오다니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 나를 나의 밖에서 보았을 때 나라는 사람의 능력 밖에서 아등바등하고 있다면 그건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럴 땐 덕질일지라도 잠시 멈출 줄 알아야 한다. 꽉 잡고 있었던 만큼 놓기 힘들겠지만 언젠가 다시 잡을 수 있는 게 취미니까. 세상의 많은 일은 좀 두고 보았을 때 더 잘 보인다. 응급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에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도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흘려보낸 시간의 틈 사이에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답이 있기도 하다. 내가 지금 안 본다고 내 인생에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근 10년간 중드를 보지 않았다고 해도, 그 사이에 중국이 황하의 기적을 일으켜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해도, 내 마음에 프랑스 영화가 왔다 갔다 했던 20대와 결혼과 출산을 했던 30대에 멀어졌던 중드를 이렇게 다시 보느라 밤새는 일상이 다시 돌아왔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보는 데에 몰입하면 생각할 시간이 모자르기도 하다. 책을 읽는 양이 많아지면서 매번 쓰던 서평을 건너뛰게 되어 지금 거의 서평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정갈한 글을 한 편 완성하는 것에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모되어 현재의 독서양이라면 중드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서평의 빈 자리를 독서일기로 메우고 있다. 중드도 마찬가지이다. 보느라 정신이 팔리면 내가 중드를 보며 느꼈던 것들을 마음 한 자리에 둘 시간이 없이 다음 중드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기려고 한다 . 어떤 책은 밑줄 치며 읽고 어떤 책은 읽고 덮어버리고 말듯이, 어떤 중드는 SNS에 간단히 소감을 남기고 어떤 중드는 좀더 길게 글로 남긴다. 이 글들 역시 그런 기록의 한 방법이다.
중드를 보는 것은 그저 취미 생활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기록을 남기면 더 풍성해진다. 모든 독서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을 남겨야 의미가 남는다는 건 비단 기억력이 나쁜 내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중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SNS에 나만의 해시태그를 만들어(나의 경우 #중드일상 이라고 해시태그를 만들어 찰나의 감상을 남기고 있다.) 기록을 남기면 나중에 한꺼번에 보기도 좋다. 여건이 되면 블로그로 공유하는 방식도 훌륭하다. 어떤 것이든 오래 몰입하면 전문가가 된다. 중드를 보는 데에 자격증은 없지만 오래 보고 오래 기록을 남긴 사람들의 블로그를 보면 두손을 모아 예를 차리고 싶어진다. 이 글을 마무리 하면서도 굳이 내가 이 글을 써야 하는가 고민을 할 정도로 어떤 블로그의 글은 내가 쓴 모든 글들보다 깊다. 그 깊이에 고마움과 존경심을 느낀다.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그 대상을 알리고 싶은 마음, 그 마음으로 썼다. 내가 어딘가에서 읽고 싶었던 글들을 쓰며, 중드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누군가에게 이 글이 그런 마음을 더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