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횸흄 Nov 07. 2023

우리 불편러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우리'라는 말은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가진 관계의 말이며 뒤에는 의례히 '하나'라는 말이 붙고는 한다. 그 따뜻한 말이 나는 언제부턴가 불편하다. '보이지 않는 경계와 구분을 짓는다'와 같은 대의적인 명분을 가진 것이라면 차라리 떳떳하겠지만 내가 느끼는 불편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라 이 말을 하면 왠지 공동체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부적응자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나는 '우리'라는 말에서 종종 나를 옭아죄는 강압성을 느낀다.


내가 우리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가족, 우리 반, 우리 학교, 우리 모임, 우리 동네, 우리나라 등이 있다. 우리 가족은 우리 남편, 우리 엄마, 우리 아들들이 다. 우리 학교 안에 우리 동학년이 있고 우리 반이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대상에 우리라는 말을 붙이니 그 말은 더 불어날 것이고,  우리 동네나 동네 밖에서는 우리 아들반 엄마 모임 등의 다양한 우리 모임에 여럿 가입되어 있으니 수는 내가 지금까지 이름 붙인 것들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이중 내가 온전히 우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들들과 우리 반, 일부 우리 모임이고 나머지는 내가 원하기 보다는 사회가 정해준 소속이다.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에게서는 강압성을 덜 느낀다는 것이고,  거부감을 느낀다는 것은 강압성을 더 느낀다는 뜻이다. 물론 자식 역시 내 삶을 많이 가두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들로 인한 불편이나 부담감은 쉬이 이해하는 반면 부모나 남편으로 인한 불편이나 부담감은 불만으로 자주 이어진다. 그들이 내 삶에 있어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물론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이는 달라질 수 있지만 일단 나는 그렇다. 화목하지 않은 부모에게서 자라 많은 의무를 부여받은 K장녀이자 가치관이 너무 다른 배우자와 의견이 다른 때가 많은 내 경우에는 '우리는 하나'라는 말은 숨이 콱 막힌다. 당연히 우리나라나 우리 학교와 같은 사회적 소속은 더더욱 그러하다. 나는 나라를 존중하지만 나라를 위해 어둠을 기꺼이 짊어지고 싶지 않으며, 교장의 작은 국가라 일컬어지는 학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우리 반 만큼은 나와 아이들이 지지고 볶으며 만들어가는 사회라 다른 마음을 느낀다. 물론, 아이들 입장에서는 다르겠지만. 자발적으로 가입한 여러 모임들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다.


경험으로 인한 거부감이기도 하지만 선천적으로 자유인의 기질을 타고난 탓인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은 소속감을 느낄 때 행복하고 안정된 마음을 느낀다고 하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소속이 만들어지면 벗어날 궁리부터 했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좋아서 동아리에 가입하였지만 동아리 문화에는 적응하지 않았으며, 일보다도 회의나 회식이 싫어서 기피하는 업무가 생기곤 한다. 결속력이 단단한 조직일수록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커지곤 했다. '우리'이기 때문에 같은 의견을 내야 하고, 다름이 미안한 일이 되며, 독자적인 행동이 비난받아야 할 때 '우리' 속에서 나는 전혀 안정된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 


가족이기 때문에 늘 함께 해야 한다는 남편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신혼 초 얼마나 많은 다툼을 했던가 생각해 보면 '우리 가족' 안에 정해진 사람을 넣어두고 그들만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행동을 내가 얼마나 못 견뎌했는지가 떠오른다. 나는 가족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배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고 배려해야한다는 입장이다. 또, 민원을 우려한다는 이유로 모든 반이 같은 수업안을 가지고 일년 내내 수업을 해야 한다는 1학년의 교실들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모든 일을 다 짊어지고 한다해도 차라리 한 학년에 한 반만 있는 학교에서 내가 하고 싶은 수업안대로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우리'라는 말이 '일체성'을 뜻하는 말이라면 폭력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나 역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One Team'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서 이건 무슨 내로남불이냐 싶다. 하지만 나는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자는 뜻의 원팀을 강조하는 것이지 모두가 같은 색깔을 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물론 때때로 많은 일들은 모두가 같은 색깔을 내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런 색깔을 내어준 사람들 덕분에 혜택을 보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연대와 환대의 우리가 아니라 성과와 통일성을 위한 우리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어떤 사안에 대하여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다는 호의에 기대어 어느 '우리 불편러'의 푸념이라고 해 두자. 그래도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무례함에 다정하지 않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