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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Jul 25. 2023

무례함에 다정하지 않겠다.

교단일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인사말을 자주 하게 되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이 말에 큰 의미를 담지 않고 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언니의 죽음 앞에서 그 말을 하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래서 '더 의미있는 말'을 고민해봤는데 예의와 진짜 마음 사이에서 저울질하다 결국 마무리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가 되어버렸고 지금도 누군가의 죽음에 이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을 쓰진 않는다. 그 대신, 이 말을 할 때 마음을 담기로 했다. '삼가'는 우리말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고 정중하게'라는 뜻이며, '명복(冥福)'은 '저승에서 받는 복'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는 '온 마음을 다해 돌아가신 분이 저승에서 행복하길 바랍니다'는 뜻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굳이 다른 말로 인사를 하느니 마음을 다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 주말, 서이초에 다녀왔다. 사람들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써붙인 쪽지가 학교 온 벽을 빼꼭히 채웠다. 그 쪽지에 쓰인 마음들 역시 내가 그 글에 담는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쪽지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울컥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친구들이 쓴 쪽지, 고사리 손으로 쓴 쪽지, 교사가 아닌 시민이 쓴 쪽지와 화환, 조문화환 위에 핀 무궁화 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방학을 앞두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젊은 선생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져있을지 먹먹하다. 아침마다 얼마나 학교에 가기 싫었을까? 직접 가 본 교실의 위치와 환경은 너무 음침했다. 그 앞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자리를 쉽게 뜰 수 없는 것은 그 곳에서 반 년을 보냈을 젊은 교사의 삶이 너무 잘 떠올랐기 때문이다. 함께 지내는 사람들이라도 좋았더라면 이 환경을 그럭저럭 이겨낼 수 있었을 텐데 마지막 한 방은 결국 사람이다.


6학년이 되었어도 걸핏하면 선생님한테 해달라고 요구하는 아이들을 보면 이 아이들의 훈육은 어디에서 멈춘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교사는 불친절하거나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곤 한다. 수업 시간에 전화를 걸어서 아이를 바꾸라는 무례함은 어떻고, 나이가 어리다고 교사에게 말을 놓는 천박함에도 싫은 소리 한 번 하기가 어렵다. 이런 무례하고 천박하고 무식한 학부모와 학생들의 피해를 보는 것이 교사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 외에는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에만 반응하는 행태가 한 반에 한 두명이던 진상을, 절반 이상의 진상을 만들어냈다. 그것도 아주 짧은 기간 내에. 몇 년전부터 '학교엔 미래가 없다'고 말한 내 마음이 젊은 교사의 죽음으로 더욱 단단해졌다면 너무 비관적일까?


며칠 전만 해도 나는 한 아이더러 수업에 바르게 참여하라고 종용해서 '교육청에 신고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상처받는다. 하지만 내가 이 직업을 천직이라고 여기지 않는 만큼 절절 매며 고객님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아닌지라, "해! 그 말을 들으니 딱 그만 두고 싶다."고 응수했다. 아주 싸늘한 눈빛으로. 이런 말에까지 다정함을 장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제는 엘자 화일을 주지 않는다고 통지표를 구겨서 갈 거라고 내 눈앞에서 구기는 시늉을 한 아이에게 "나는 너에게 엘자 화일을 줄 의무가 없다. 하지만 너는 그것을 가지고 다니는 게 바른 태도다."라고 말했다. 이미 학년 초에 하나씩 다 나눠줬고 그 이후에도 몇 번씩 더 주기도 했다. 선생님에게는 그렇게까지 무례해도 된다는 것이 이 아이들의 일반적인 태도이다.


물론 절반은 예의가 바르다.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자는 내 제안에 순순히 따르고 그렇지 못할 경우 공손하게 종이컵을 빌린다. 그런 태도에 어찌 흔쾌히 주지 않을까? 어제는 사람 몸 만큼 토한 아이가 처리를 못해서 나와 함께 처리했다. 정말 나나 그 아이나 최악의 경우에 최선을 다했다. 그 태도를 아이들에게 칭찬했다. 그리고 그런 태도가 아니라면 돕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교사는 아이들의 일을 대신 해 주는 사람이 아니다. 심지어 부모도 그런 사람은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걸 가르치는 사람이 부모와 교사이다. 그리고 1차 훈육은 부모이다. 부모의 공백을 교사가 메워주고, 그런 교사에게 부모는 협조하는 게 이상적인 교육이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가? 아이가 꾸중이라도 들으면 자기가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해서 A4용지 3장 분량으로 자신의 일생부터 현재 자신의 마음 상태까지 써서 메시지를 보내는 학부모가 흔하다. 자기가 잘 못 가르쳐 보냈으면서 교사가 못 가르쳐서 그렇다고 그렇단다. 그런 부모 아래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을까? 부모가 매일 아이에게 반에서 일어난 부정적 일들을 캐물어서 아이가 녹취 수준으로 집에 써서 가고 그걸 꼬투리 삼는 사람도 있다. 사례는 무궁무진한데 그걸 다 교사가 사과해야 하는 방식이다. 사과해도 사과가 마음에 안 든다는 식인데 이건 아이들 세계에서도 그렇다. 용서를 모르는 아이들은 반에 널렸다. 용서가 특권인 양, 따지는 게 능력인 양 행동한다. 어제는 방학과제를 내주는데 한 아이가 대놓고 "안 할 거야!" 라고 한다. 다른 때와 달리 정색했다. "교사가 과제를 내주는 것까지 너희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나는 너희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고 노력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검사할 것이며, 안 하겠다는 의지로 버티는 너를 억지로 끌고 갈 힘은 내겐 없다."고 했다.


어쩌면 좀 냉정하게 느껴졌을 지도 모른다. 저희들 말이라면 거의 다 들어주던 선생님의 단호함에 아이들은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저희들을 위해 늘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아는 아이들은 이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라 믿는다. 내가 하는 말들에 늘 조용히 힘들어했던 아이들의 눈빛을 보았다. 그간 그 아이들의 눈빛에 '너희가 이해해 달라'는 눈빛으로 호소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서이초 사건 이후로 더 이상은 많은 교사가 말도 안 되는 행동에까지 다정을 가장하며 얼르고 달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례하고 천박하고 무식한 행동이 용인되는 일이 최소한 내 교실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다짐을 젊은 교사의 죽음을 빚으로 삼아 해 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함께 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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