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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횸흄 Nov 22. 2021

[교단일기]인스타를 털렸다.

반 아이 중 한 아이가 유독 기계에 능하다. 기계 뿐만 아니라 여타의 다른 생활 면에서 센스가 있는 편이라 임기응변도 잘 하고 눈치도 빠르다. 그래서 비록 공부가 좀 더디게 향상되어도 걱정을 하지 않는 아이이다. 그런데 결국 그 아이가 일을 쳤다. 패션이면 패션, 앱이면 앱, 정리정돈이면 정리정돈 생활지수 만랩인 그 아이가 어찌 SNS를 놓칠쏘냐!


급식을 먹고 하교하려고 가방을 싸다가 갑자기 휴대폰을 내미는 아이,

"이거 선생님 인스타 맞죠?"

순간 동공에 지진났다.

"아...닌데?"

"여기 선생님 셀카도 있는데요?"

"셀...카?"

"여기 그리고 제가 만든 책 표지도 있어요!"

"아니, 누가 나를 사칭하는 거지?(먼산)"

눈 레이저로 아이에게 얼른 집으로 가라고 쏘았지만 이내 소문을 들은 아이들이 너도나도 알려달라고 한바탕 난리이다. 일단은 사칭인 걸로 하고 애들을 다 보내고 나니 앞으로 이 일을 어쩌나 싶었다. 전부 비공개로 돌려야하나 싶어 내 인스타그램 자체 검열에 들어갔다.

내 인스타그램에는 나와 가족들의 모습이 간간히 보이지만 신상을 털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가족들의 모습은 거의 아이들에게도 이야기하는 에피소드인 경우가 많아 그다지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그리고는 죄다 책이야기 뿐인지라 일단은 그냥 두기로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보니 아니나다를까 얌전하던 우리반 여학생으로부터 팔로우되었다는 알림이 왔다. 팔로우까지는 맺지 않는 것이 좋아서(아이들에게 SNS 활동을 하지 않을 것을 권유하는 중이므로) '스토리 숨기기' 설정한 후 다음 날 아이들에게  SNS를 하지 않도록 하며 나를 팔로우 할 경우에는 그 어떤 내용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해두었다. 그렇게 며칠을 나의 인스타그램을 소재삼아 아이들은 나를 놀리기도 하고 재밌어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악의는 없었다. 그냥 선생님을 더 알게 되었다는 기쁨만 있어보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은 착각일 수도 있다. 요새는 선생님들이 개인 전화번호를 공개하지 않고 개인SNS가 대체로 비공개 계정인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니까. 밤에 술 마시고 전화해서 있는 말 없는 말 다하고선 다음 날이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의부증이 있어 난데없이 "당신 누구야?"라는 전화를 하는 사람, 카톡 프로필을 보고 어딜 그렇게 놀러다니냐며 민원을 넣는 사람 등 별의 별 사례들을 주변에서 보곤했으니까.  내가 아직도 내 개인 번호를 공개하고 이렇게 SNS가 들통나도 여유있을 수 있는 것은 그저, 운이 좋아서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닐 것이다라고 믿는다면 나는 순진한 것일까, 어리석은 것일까, 자만심에 빠진 것일까?


우리 반에 나를 참 좋아해주는 학생이 하나 있다. 내가 쓴 책, 그리고 그 책을 함께 쓴 큰 아들에게까지 애정을 보이는 것이 느껴지는 아이이다. 오늘 하교하는 길에 한 아이가 또 내 인스타그램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마침 그 아이도 곁에 있었고 애정어린 눈빛으로 함께 그 화면을 들여다본다. 그런 눈빛을 보면서 어떻게 '차단'이라는 마음을 먹을 수 있을까? 어제 [이수의 일기]를 읽었다. 어른스럽다는 말 보다는 세상을 예쁘게 바라본다고 말하고 싶은 이수의 일기처럼 예쁘게 보는 눈을 예쁘게 봐야 하는 게 어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일단은 그냥 두기로 한다. 어차피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았고, 너희들의 관심이 떠날 날도 머지 않았으니까. 그래, 당황하는 나의 모습이 재밌으면 재밌어 하려무나. 그 정도의 선은 넘어도 내가 받아줄 수 있단다. 더이상의 선을 넘지 않으리라는 것도 나는 믿는단다. 그렇게 우리 남은 한 달여를 보내보자꾸나. 그래도, 당분간은 최소한의 게시만 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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